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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은빛 Nov 18. 2021

6. 이 밤의 끝은 어디인가요

 아버지는 24시간 보호자가 필요한 환자였다. 아버지의 24시간 중 나는 밤을 지켰다. 그 밤은 안개가 내려앉아 축축한 숲길을 맨발로 헤매는 것처럼 깊고 길었다. 이정표가 되어주는 북극성이나 희미한 달빛 한줄기 존재하지 않는 숲 속에 버려진 나는 오늘 밤은 부디 아무 일 없길 바라고 또 바랐다.


 세상이 내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데서 온 배신감, 눈을 뜨고 병원의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없는 현실, 내게 닥친 이 비극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부정은 아버지의 밤을 암연한 섬망에 가두어 버렸다. 해거름이 지고 어김없이 찾아오는 밤마다 아버지는 병원이 현실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섬망은 아버지를 불면의 늪으로 끌고 들어가 나와 아버지 그리고 의료진 모두를 희롱했다.



    

 어김없이 찾아온 그날 밤, 아버지는 휑뎅그렁한 눈을 하고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면제를 먹고 자리에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미 두 차례 수면제를 증량한 터라 오늘 밤은 부디 약의 효과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던 찰나였다. 오전에 만난 교수님께서 수면제를 더 이상 증량하는 것은 무리라고 할 정도로 최대치의 약이 투여되었는데도 잠들지 못하는 밤이라니. 아버지의 무의식 속 불안과 고통은 대체 어디쯤에 위치한 것일까. 아무리 깊은 바다라도 지면이 있기 마련인데 아버지의 불안은 심해 어종조차 발견되지 않는 어둡고 깊은 어딘가에 쓸쓸히 처박혀있는 나무상자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아버지는 내게 물었다. 내가 왜 병원에 있느냐고.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아버지에게만 들리도록 조용히 대답했다. 우리는 오늘 병원에서 자야 하니 어서 주무시라고. 매일 밤 반복되는 일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날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내게 장난치지 말라며 집에서 곤히 자고 있을 동생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코에 연결되어 있던 산소 튜브를 벗어내고 다시 착용하라는 나의 손길을 거부하고 화를 내었다. 주인을 잃은 산소 튜브는 아랑곳하지 않고 쉴 새 없이 산소를 뿜어내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내야 하는 내 상황이 꼭 산소 튜브와 닮았다고 느껴졌다. 여기저기서 다른 환자들의 한숨 섞인 불평의 소리가 들려왔다. 내 가슴속은 맹수에게 쫓기는 초식동물 떼가 들어온 것처럼 그들의 뜀박질이 만들어내는 진동과 소음으로 어지러웠다. 심장의 떨림이 머리 꼭대기까지 전해지는 밤이었다. 나를 그 초식동물 떼의 광란의 이동으로부터 구해준 것은 리본 망으로 머리를 단정히 묶은 간호사 선생님이었다.




 의료진의 등장은 병실의 소란을 잠재우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으나 얼마지 않아 이 방법조차 통하지 않는 밤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병원을 마치 영화 세트장 같은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간호복을 입은 병원 직원 조차 자신을 속이는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설득과 설명도 소용이 없었다. 끝내 아버지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모두를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의 상황이 담당 교수님에게 여과 없이 전달되었고 교수님은 조현병약을 추가 처방했음을 알려왔다.


 섬망은 차츰 잦아들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제 남은 문제는 불면이었다. 아버지는 수면제를 먹고 누운 뒤에도 30분 단위로 깨어나 기갈이 든 사람처럼 물, 주스, 식혜 따위의 마실 것을 찾았다. 폐암 환자는 코로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워 입이 마르기 때문에 마실 것을 자주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마실 것들이 꼭 냉장고에 시원하게 보관된 삼다수 생수여야 하고 빙그레에서 만든 따옴 천혜향 주스여야 하며 밥알이 적당하게 섞인 식혜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요구하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시원한 마실 것의 종류를 적당히 골라 꺼내어 종이컵에 따라줄 것, 그리고 소변통을 비워줄 것. 1시에 음료를 마셨다면 1시 30분에 소변을 보고 다시 2시에 음료를 마시고 2시 30분에 소변을 보고. 아주 단순한 패턴이었다. 낮이었다면 힘들이지 않고 했을 일이지만 새벽에 30분마다 반복되는 이 심부름은 요구 자체는 단순하지만 버거웠다. 나 역시 수면이 필요한 동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병원에 오기 전, 나는 어린이집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를 챙기며 이미 체력의 상당 부분을 소모한 채 아버지의 간병에 뛰어들었다. 잠이 절실했다. 겨우 쪽잠이라도 들려던 차에 들려오는 새벽 3시 아버지의 부름은 내 안의 무언가를 울컥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버지의 소변통을 들고 오물처리실로 가는 복도에서 눈물이 왈칵왈칵 쏟아졌다. 병동 중앙에 위치한 간호 데스크에서 담소를 나누던 간호사들은 벌게진 눈을 하고 소변을 비우러 가는 나를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물처리실의 소변 냄새와 병동의 약 냄새가 한데 엉켜 나의 머릿속을 더욱 헤집고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간절해졌다. 어떤 감정도 그릇된 것은 없다던데 내가 힘들기에 도망치고 싶은 것뿐인데 그 상대가 아버지라는 사실은 나의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여기서 내가 손을 놓아버리면 유약한 어머니가 쓰러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빌어먹을 동양 문화권의 효도 의식을 짓밟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시금 내 안에는 맹수에게 쫓기는 초식동물 떼가 들어앉았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병동을 나와 멀찍한 곳에 떨어진 휴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생에는 비극과 희극이 적절히 섞여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비극 또한 지나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극을 받아들이는 것은 거울에 묻은 지문을 닦아내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비극 또한 내 삶의 일부였다. 받아들이고 감당해내야 했다. 나는 빅터 프랭클처럼 삶의 모든 순간에 ‘예스’라고 화답할 자신은 없었지만 아버지를 홀로 둘 수는 없었다. 고요하고 어두운 병원 휴게실에서 나는 내게 주어진 시련을 받아들이고 슬픔을 삼켰다. 그렇게 마음 정리를 하고 돌아온 병실에서 아버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그냥… 너무 답답해서. 근처 좀 걸었어요.”

“새벽 3시인데 위험하게 혼자 다니면 어떻게 해. 어서 자.”


 아버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으며 자세 또한 흐트러짐이 없었다. 매일 밤부터 새벽까지 암으로 인해 고통받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암은 빌어먹을 암은 끝내 아버지의 정신까지 갉아먹었으나 아버지 마음 깊숙한 곳에 간직되어 있던 자식에 대한 사랑은 탐하지 못하였다. 나를 걱정했던 그 눈빛과 그 말투는 온전한 우리 아버지였다.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하지 않아도 활자 자체로 울림을 주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그날 새벽 나를 울린 아버지는 텅 빈 눈으로 밤부터 새벽까지 끝없이 잔심부름을 시키고 부끄럼 없이 내게 소변통을 내밀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 이 밤의 끝은 어디일까요. 우리 언제쯤 이 밤의 어둠에서 벗어나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 기다림 끝에 아침이 오지 못하더라도 나를 사랑했던 마음 간직해주세요. 나도 아버지 손 놓지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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