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슨 문제야?
1998년 건강하지 않게 태어난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짙은 눈썹과 소두증으로 유난히 머리가 작았다. 엄마는 열 달 동안 소중히 지켜온 아이가 다른 아이와 다르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집안엔 이렇게 눈썹이 짙은 사람이 유난히 많았어’ 라고 생각했고 머리가 작다는 건 머리가 큰 사람이 문제지 좋은 거 아니야 라고 생각했다.
뱃속에 있는 아이가 심장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급하게 서두른 수술이었다. 두려움이 그득 이였지만 첫째아이도 직장 다니면서 잘 낳았고 유난히 동네에서도 귀염을 받는 똑똑한 아이였고 집안에 아프게 태어난 아이가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믿겨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의사도 오진이라는 걸 할 때가 있어. 얼마나 많은 의료사고도 있고 사건 사고도 많은데 라는 생각에 엄마는 다른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었다. 단지 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컨디션이 힘들 거라는 이유로 아이를 보여주지 못해 직접 볼 수 있는 시간이 지체된 것이 지, 아이를 품에 안는 순간 다른 아이와 다르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는 엄마 품에 안겼고 소아과로는 최고라는 대학병원 예약을 했다 티비에도 나오는 유명하다는 의사를 만날 때 까지도 예약시간에 맞춰서 기다리면서 밀려지는 진료시간을 보면서도 그럴 리 없다는 말을 듣고 싶단 바람으로 꼭 확인하고 싶어 기다렸다.
하지만 예상과 너무 달랐다.
인정도 바람도 그냥 단순한 헛것 이었다는 걸 의사의 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코렐리아 드랑게 신드롬이고요, 성장지체, 정신지체가 동반되고요 20살을 넘기기 어렵고, 2살 이전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만명 중에 한 명 꼴로 나타납니다”
얼마나 많은 환자를 보면 저렇게 쉽게 말이 나올까 싶을 정도였다.
제대로 보호자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은 듯 했다. 난 꼭 아님을 증명해 저 의사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2살 이전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어떻게 부정해서 보여줄까도, 저 짧은 말을 듣기 위해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했나도 싶었다. 슬프다기 보다는 억울했다.
믿을 수도 없었다.
결코 인정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아이는 키워졌고 제일 두려운 것은 흘긋 보고 다시 보는 타인의 시선 이였다.
하지만 난 그 시선을 외면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 숱하게 부딪치는 타인의 시선을 곁디지 못해 아이와 함께 먼 길을 떠났다. 몸이 불편한 아이를 혼자 남겨둘 수 없어 함께 가는 길을 택한 이들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나 뿐만 아니라 결국엔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시선이 될 수 있기에 웃으며 그들에게 반대로 물었다. “왜요? 이상해 보이세요, 우리 아이는 아픈 아이예요?”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물었다. 난 그 시선이 우리 아이에게 더 깊은 상처가 되지 않게,
나 한사람의 이런 모습이 열사람의 시선을 막아 주길 바랬다.
예전에 몰랐던 그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기에 그 전에 나도 그들의 시선이 되었을지 몰랐던 그 잘못을 용서 받고 나도 힘이 되고 싶었다.
난 엄마였다. 세상 누구라도 엄마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몸이 불편한 장애가 있어도 어떤 환경이 놓여있어도, 그렇게 태어 날 수 있다는 건 엄마의 소중한 바람이 함께였다 는 걸 잊고 싶지 않았다.
그런 소중한 존재 였다는 걸 자꾸 잊어 버리는 날이 안타까웠다.
무엇인가는 계속 변할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가치가 항상 함께 임을 잊지 않고 있기에 , 그 날의 그 소중한 기억을 안고 존재이유를 알며 오늘도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