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황금시간은 언제나 신파와 통속이 넘치는 드라마의 소유다. 넘어져도 울지 않는 씩씩한 주인공,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갈등,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랑, 시한부 인생 등등. 단 한 회차로도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뻔히 보이는 드라마들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시간이 흘러 시대가 변하고, 주 시청자들이 바뀌어도 여전히 그런 드라마들은 인기가 많다. 왜일까? 《폴링 인 폴》(문학동네, 2024)에서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폴링 인 폴》에는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삶의 모습들이 등장한다. 마음의 문을 닫은 유학생(<거짓말 연습>, 가족의 반대에 부딪힌 사랑을 하는 남자와, 그 남자를 짝사랑하는 여자(<폴링 인 폴>), 소통의 문제, 현실의 벽에서 오는 고통을 마주하는 사람들(<감자의 실종>, <꽃 피는 밤이 오면>) 익숙한 사연들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동안 진부하다거나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등장인물들에게 공감하며 몰입할 수 있었다. 우리와 비슷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에서 위안을 받기도 했다. <거짓말 연습>의 '나'는 도망치듯 떠난 유학에서 유창하지 않은 현지 언어, 고국에 두고 온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때문에 앞으로의 방향성마저 잃는다. 어학당의 마지막 날, 어설픈 외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마음을 열게 된다. '나'가 마침내 자신의 이야기를 위해 입을 뗐을 때 어두운 터널의 끝에서 빛을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나'가 얻게 된 평안이 나에게도 위로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유령이 출몰할 때>에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폐허가 된 지역에서 혼자 카페를 운영하는 J 선배는 '남들과 다른 길을 가도 괜찮다'라는 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나'가 치열한 현실을 떠나 카페에 머무르기로 결심한 모습은 팍팍한 경쟁 사회를 살아내느라 지친 나에게 포근한 느낌-유령이 출몰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의 사진을 건네는 듯했다.
불통의 시대에 소통을 주제로 한 소설이 많았던 점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감자의 실종>에서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고립되었던 '나'는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과의 소통을 시작한다. <꽃 피는 밤이 오면>의 화자는 영상과 언어를 잃어버린 남편에게서 일방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말들에 갇혀있었다. 덥고 눅눅한 반지하,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남편, 막막하기만 한 현실에서 화자는 남편의 말을 시도하게 되면서 꿈에서 생계 수단이 되어버린 말과 글의 관계를 다시 정립한다. 소통을 하려고 애쓰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동안 어떤 노력을 했는가를 되돌아보게 되었고, 주변에 있지만 내가 들으려 하지 않았던 말들이 없었는지를 살피게 됐다.
"나는 당신이 쓰러진 이래 처음으로 희곡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 <꽃 피는 밤이 오면>, 263쪽
《폴링 인 폴》 초판이 출간됐을 당시, 백수린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보면 세상에는 새로운 얘기라는 것이 없잖아요. 결국은 같은 얘기를 변주하는 것인데 다소 진부해 보이지만 우리가 흘려들었던 이야기들을 새롭게 전해주고 싶었어요."
늘 뻔한 내용의 드라마가 사랑받는 것도 《폴링 인 폴》에서 느낀 감정과 관련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누군가의 뻔한 이야기가 작가를 만나 마음에 와닿는 영상으로, 글로 변주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등장인물들의 시간에 위로를 받고, 내가 지나쳐온 진부한 이야기들을 되돌아본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