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의 보름>(다산북스, 2025)을 읽고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보름의 달콤한 휴가
런던 인근 커루나 로드에 사는 스티븐스 가족에게는 연례 행사가 있다. 9월에 인근 해안가 작은 관광도시인 보그너에서 15일 동안 휴가를 보내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보그너에서의 안식처였던 '시뷰(seaview)'는 낡았고, 아이들은 이제 자라서 다른 휴가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들의 휴가는 과거만큼 달콤할까?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추천작
<구월의 보름>(다산북스, 2025)는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시구로가 코로나 시국에서 추천한 책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 책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고양적이며 삶을 긍정하는 책이다.
평범하지만 긴장감 있는
스티븐스 가족이 보그너에서 보내는 15일 동안, 큰 사건은 발생하지 않는다. 큰 딸 메리에게 "신나는 일"이 벌어진 것과, 뜻밖의 거래처 고객을 만난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하지만 456쪽의 페이지들은 순식간에 넘어간다. 가족들의 심리 묘사가 쫀득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스 부인은 다른 가족들만큼 휴가를 즐기지 못하지만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환상적인 시간을 보내는 척한다.
그녀는 다른 식구들이 즐기듯 보름간의 휴가를 즐기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그녀는 휴가를 즐기는 체하자니 불행해졌는데, 그런 짓은 가짜, 어쩐지 부정직한 짓이었기 때문이다.
15쪽
스티븐스 씨는 휴가에서의 시간을 즐기지만 휴가를 망치게 될까 봐 조마조마한다. 자신의 계획이 어그러지지는 않을지, 아이들이 휴가를 재미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을지 걱정한다. 동시에 가장으로서의 자신의 위엄도 늘 신경 쓴다.
햇빛은 오만 가지 희망을 줄 만큼 충분히 밝았지만, 그는 그런 빛줄기가 얼마나 기만적일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늘이 반짝이며 커튼 사이로 꽤 밝은 빗줄기를 보냈던 아침, 커튼을 걷자마자 인정머리 없이 내리는 가랑비를 발견하고 놀란 적도 있었다.
42쪽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한 딕은 아버지와 주변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것들을 자신이 무시한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
거의 아버지는 그 일자리에 자부심이 있었고, 아들이 그 일자리를 낮추어보았고, 싫어했다는 것을 알면 가슴이 미어질 터였다.
254쪽
마찬가지로 성인이 되어 자신만의 생활을 구축해 가는 메리는 가족들의 행사에 참여하지 않고 친구와 놀러 나가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죄책감 서린 비밀을 품은 사람들 위를 맴돌던 처벌의 악마라도 있었단 말인가? 기만이라는 여린 조직에 제 손가락을 푹 찍어서 조직들을 찢어발길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던?
319쪽
스티븐스 가족이 휴가에서 보내는 즐거운 시간 중간중간에, 가족 구성원들의 서로 다른 감정들과 상황을 세세히 설명함으로써 읽으면서 긴장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스티븐스 가족들과 함께하는 휴가
가족들의 내밀한 사정들을 읽는 재미도 있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스티븐스 가족과 함께 보그너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작가는 책을 쓰고 난 후에 이렇게 말했다.
이 이야기의 매력은, 내가 그 어떤 계획도 설계하질 않았던지라 다음 챕터로 가보기 전까지는 나조차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절대로 몰랐다는 점이다. 그러자니 내가 등장인물들과 계속 동반하게 되었는데, (후략)
446쪽
가족들이 클래펌 환승역에서 허겁지겁 환승을 할 때에는 같이 마음이 급해지고 보그너에서 느긋하게 휴가를 즐길 때에는 같이 나른해졌다. 보그너는 들어본 적도 없고 가 본 적도 없지만 이미 그 장소에 함께 있는 것 같았다. 보그너, 스티븐스 씨가 가는 산책길의 생생한 묘사와 그들의 행동에 대한 상세한 설명 덕분이었다.
일상의 소중함과 즐거움
책은 스티븐스 부인의 불평 아닌 불평으로 시작해서 집으로 출발하는 장면까지 책은 휴가에서의 소소함으로 가득 차 있다. 매년 똑같은 장소로의 휴가이지만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과 동시에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하는 즐거움이 있다. 이 소설은 그 두 가지 모두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