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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에티오피아 전쟁

<그림자 왕>(문학동네, 2025)를 읽고

by 고목나무와 매미
2차 에티오피아-이탈리아 전쟁


마자 멩기스테의 <그림자 왕>(문학동네, 2025)은 2차 에티오피아-이탈리아 전쟁(1935-1941)을 배경으로 한다. 이 전쟁에 대해 알고 있으면 소설을 읽을 때 더 몰입할 수 있다. 2차 에티오피아-이탈리아 전쟁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1차 에티오피아-이탈리아 전쟁에 대한 설욕과 기존의 아프리카 내 식민지를 연결시키고자 하는 욕구로 발발했다. 이탈리아는 월등한 전력으로 수도 아디스아바바까지 밀고 들어왔고 결국 당시 에티오피아 황제이던 하일레 셀라시에는 망명길에 오른다. 이 소설은 황제가 나라를 떠난 도중에도 지속해서 이탈리아와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중에서도 역사는 기억해 주지 않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역사는 기록하지 않은 여성들의 서사


책에는 굵직한 여성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주인공인 히루트, 히루트의 주인이자 귀족인 에스테르, 중요한 순간마다 에티오피아 군을 도와주는 피피(페젠), 에티오피아의 구체제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여성들과 긴밀히 연대하는 요리사가 그들이다.


히루트는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모두 잃고 어머니와 평소 친분이 있던 에티오피아 군 총사령관인 키다네의 하녀로 들어가게 된다. 에스테르의 의심과 질투, 키다네의 폭력, 주변 사람들의 멸시, 여성 포로로서의 참혹함 등을 겪으면서도 히루트는 자신이 에티오피아의 전사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에스테르는 귀족이지만,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키다네와 결혼하게 된다. 키다네는 남성의 강인함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에스테르를 강제로 범하고 에스테르는 그때부터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키다네에 복속하게 된다. 전쟁이 터지자 에스테르는 마을 곳곳을 누비며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낸다. 키다네의 무시에도 여성들이 참전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끊임없이 한다.


한때 직조공의 동생이었던 피피는 수려한 외모와 해박한 지식으로 이탈리아군의 수뇌부에 침투한다. 거기서 알아낸 정보로 에티오피아 군이 필요할 때마다 정보를 제공한다.


요리사는 에티오피아 귀족의 노예로 사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심지어는 이탈리아 군을 도울 생각도 한다. 하지만 그는 에티오피아 여성들과 백성들을 저버리지 못했으며 에티오피아 포로들이 처형당하는 순간까지도 그들을 돕는다.


작가는 소설의 발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증조모 게테이의 이야기를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다. (중략)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각 가정에서 가장 나이 많은 아들을 군대에 보내라고 명했을 때, 게테이는 가장 나이 많은 누이인 자신이 군대에 가겠다고 나섰다. (중략) 그녀의 아버지가 반대하며 새신랑에게 가족을 대표하라고 자신의 총을 주자 게테이는 그 총을 갖기 위해 소송을 걸었다. (중략) 게테이는 입대했고 전쟁에 나갔다.

645-646쪽



역사는 기억하지 않지만 아직 사람들은 기억하는 전쟁에서 여성의 활약을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다루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이 들었던 증조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거기에 당시 에티오피아의 상황을 덧붙이고 작가의 상상력으로 마무리했다.


등장인물의 입체성

그 누구도 함부로 미워할 수 없음...


등장인물들의 가장 큰 매력은 모두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 히루트는 내면의 긍지를 간직하고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에도 그들에 맞서 싸우는 강인함을 가졌다. 하지만 포로로 잡히게 된 이유도 그의 부주의 때문이었다. 혼자의 생각에 사로잡혀 이탈리아 군 쪽으로 달려나갔기 때문이다.


에스테르는 전쟁에서 여성들을 독려하고 그림자 왕을 교육하는 데 힘썼지만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히루트를 이해하지 못했다. 히루트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계급이 낮은 여성들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아스테르를 두고 요리사는 불평한다.


저는 아씨의 실수들을 부당할 정도로 많이 감당했어요. 요리사는 아스테르에게 등을 돌린 채 그에게 말한다. 아씨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보시게 될 거예요. 아씨가 다음번에는 이 애한테 무슨 짓을 할지 보시게 될 거라고요. 요리사가 손짓으로 히루트를 가리킨다.

150-151쪽


에티오피아 총사령관인 키다네는 전쟁 시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황제가 떠난 후에도 병사들을 조직하고 훈련시켰다. 하지만 그는 여러 여성을 추행했으며, 자녀를 잃은 에스테르를 위로하지 않았고, 타인의 슬픔에 무감각해졌다.


에토레는 군인으로서도 민간인으로서도 실패했다. 에티오피아 포로들에 대한 연민은 가졌으나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했고 오히려 아스카리 부대(이탈리아에 협력하는 에티오피아인들로 이루어진 부대)의 대장인 이브라힘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정당화한다.


소설의 구성


전쟁에 참여한 여성의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설화 또는 역사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여성 독립투사들부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까지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여성들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노력들은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다른 책들과 다르다. 그 구성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의 시각을 혼용한다. 희곡을 읽는 것처럼 중간에는 하일레 셀라시에의 이야기가 막간으로 들어가 있고, 전지적 시점에서 등장인물들을 바라보는 글들이 합창으로 존재한다. 소설의 독특한 구성 덕분에 등장인물들의 감정들은 더 풍부해지고 그들의 이야기가 1970년대로 연결된다. 또한, 무기력한 하일레 셀라시에와 끈기의 에티오피아 군들의 대비가 극명해진다.


비슷하지만 다른


책을 읽다 보면 기시감이 느껴진다. 1900년대 초 에티오피아와 우리나라 모두 제국주의의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인/조선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 열강의 편에 붙어 동포를 죽이는 사람들과 무능력한 정부, 열강에 붙잡혀 성적인 수치심까지 감내해야 했던 여성 포로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맞서 싸우는 사람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프리카에서도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두 나라의 지리적 위치, 풍습 등으로 인한 배경의 차이가 우리나라와의 다른 점들을 부각시킨다.


식민지 여성들의 이야기


식민지 여성들은 이중으로 고통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요리사이다. 기존 계급에 의한 억압, 폭력 여기에 새로운 서구 열강의 수탈까지. 기존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떠났던 요리사는 결국 다시 에티오피아인 곁으로 돌아온다. 처형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환각제를 모아 주고, 그들을 기억한다.


요리사는 때가 되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받아들여요, 요리사는 말했다. 무슨 일이 닥치든 받아들이고 아침에 일어나서 살아가요.

85쪽


에티오피아 여성들은, 그리고 전 세계의 식민지 여성들은 이렇게 살았을 것이다. 부당하고 화가 나지만 결국 아침에 일어나서 생을 이어갔다. 이렇게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이어간 삶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림자 왕>은 이중, 삼중의 차별을 이겨내고 살아간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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