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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ly Aug 12. 2024

퍼펙트 데이즈(2023)

 ★★★★(4)

"이어진 날들과 끊어진 세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눈부신 햇빛, 결국엔 그 모든 날들이 완벽했음을."


- 퍼펙트 데이즈

 <퍼펙트 데이즈>는 빔 벤더스 감독의 장편 영화로 도쿄의 한 화장실 청소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이름은 '히라야마'로 별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를 누구보다 성실히 보내는 초로의 남성이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러운 조카의 방문, 예상치 못한 동료의 퇴직, 뜻하지 않게 듣게 된 단골 가게 사장의 내밀한 속사정까지 연이어 들이닥치며, 그의 일상은 심하게 요동친다. 영화는 그의 일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그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하지만 관객들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의문을 잠재우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사실 이 영화는 도쿄의 도시 재개발 프로젝트인 "The Tokyo Toilet(TTT)"에서 출발하였다. 프로젝트의 목적은 도쿄의 여러 공중 화장실을 새롭게 디자인해 화장실 및 주변 공공시설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유니클로와 패스트 리테일링의 임원인 야나이 코지는 빔 벤더스 감독에게 프로젝트에 관한 단편 영화 제작을 부탁했고, 이에 빔 벤더스는 단편이 아닌 장편 영화를 만들겠다며 <퍼펙트 데이즈>를 제작했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흥행에 성공해 우리에게 굉장한 감동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프로젝트의 성공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상업성을 띈 프로젝트 속에서 이렇게 훌륭한 작품이 피어났다는 사실에 우리는 영화 내적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영화 외적인 측면에서의 감격을 받게 된다.


- 일상의 즐거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반복’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 속에서 피어나는 ‘변화’는 반복만큼이나 중요한 테마이다. 히라야마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매일매일 똑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일종의 측은함이나 안타까움을 느끼며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낼지도 모른다. 작품의 초반에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할 일을 해내는 히라야마의 반복적인 삶을 보며 관객들은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긍휼히 여기려는 우리의 태도는 그저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반복적인 일상을 즐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청소 도구를 만들어가며 공중 화장실을 청소한다. 마치 남들이 업신여기는 직업인 화장실 청소부라는 일을 그 스스로는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히라야마는 그저 자신이 할 일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해내는 끈기와 인내의 소유자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을 감사할 줄 아는 겸손함의 소유자이다. 그가 화장실을 빛내는 모습은 하물며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화장실 청소부가 아닌 구도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를 안쓰럽게 여기는 것은 우리의 기우일 것이다.

   

 게다가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삶은 그저 반복적이지만은 않다. 그의 반복엔 자그마한 변화들이 숨어있다. 예를 들어, 그가 고목의 밑동에서 발견한 새싹이나, 누군지 알 수 없는 상대와 즐기는 빙고 게임, 공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과의 인사 같은 것이 그의 삶을 반짝이게 만드는 미세한 변화들이다. 그는 반복적인 삶을 즐기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삶 속에 스며들어있는 작지만 반짝이는 순간들을 누구보다 잘 잡아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가끔씩 소리 없이 보여주는 그의 푸근한 미소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우리는 어쩌면 그의 삶을 지루하게, 혹은 측은히 여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써 본받으려 노력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 히라야마의 과거

 히라야마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과거를 지나온 사람일까?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영화 속의 몇몇 장면들을 통해 짧게나마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는 추측건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가정 학대를 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원에서 울고 있는 아이의 부모를 찾아준 뒤 그에게 보이는 경고 표지판이나, 그의 여동생이 찾아와 그에게 건네는 말에서 그러한 부분을 추측할 수 있다. 때문에 히라야마는 과거에 크나큰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된다.

 

 그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과거에 발목이 붙잡힌 사람이다. 그가 찍은 사진은 흑백이다. 사진은 과거를 남긴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자신이 남긴 과거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자신의 과거가 담긴 사진을 그는 철제 상자 안에 담아 보관한다. 뿐만 아니라 그가 꾸는 꿈 또한 흑백이다.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그의 꿈에는 그의 과거가 그려진다. 그리고 그러한 꿈은 두 화면이 하나로 합성되는 디졸브 기법을 통해 현실과 뒤섞인다. 이러한 장면은 과거와 현재의 혼재를 여실히 보여준다. 게다가 그는 읽는 책은 전부 옛날 책, 그가 듣는 노래는 전부 옛날 노래이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과거에 파묻혀 사는 사람인 것이다. 후반부에는 이렇듯 과거에 단단히 묶여있는 그에게 끊임없이 찾아오는 새로운 변화들을 살펴볼 수 있다.


- 이어진 날들과 끊어진 세상들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이 그의 삶은 반복으로 점철되어 있고, 그러한 삶과 삶 사이를 잇는 꿈은 디졸브 기법을 통해 어떠한 경계나 구분 없이 이어진다. 그의 인생만 놓고 본다면 그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상을 성실히 보내는 노동자이다.


 반면에 히라야마의 삶, 다시 말해 그의 세상은 비교적 다른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중 히라야마는 그를 찾아온 조카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넨다.


"이 세상은 서로 다른 삶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중 연결된 세상도 있고, 그렇지 않은 세상도 있지."


 아마 그의 세상은 다른 세상과 연결되지 않은 후자에 속할 것이다. 적어도 영화의 전반부까지는 그렇게 보인다. 다만, 흥미로운 부분은 영화의 후반부에 그에게 연이어 다가오는 변화에서 기인한다. 그는 여태 타인의 세상과 끊겨 있던 자신의 세상을 의도치 않게 이어 보게 된다. 그런 연결들은 평화롭고 성실하게, 하지만 어딘가 서글프게 지내오던 히라야마에게 큰 폭풍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히라야마가 자신의 세상을 타인의 세상과 포개어 봄에 따라, 이에 그치지 않고 그의 삶과 스크린 너머의 우리의 삶까지 포개어보게 되는 것이다.


- 그림자를 겹쳐보면

 히라야마는 자주 방문하던 술집 여주인의 전남편과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에게 암이 발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히라야마는 문득 그에게 '그림자를 겹치면 어두워질까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그는 여주인의 전남편과 함께 직접 그림자를 겹쳐본다. 하지만 결국, 그림자는 짙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눈여겨볼 만한 점은 그림자를 '겹쳐보는' 행위와 결국 '짙어지지 않는다'는 귀결이다.


 히라야마는 여러 사건을 통해 자신의 세상을 다른 사람의 세상과 겹쳐보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그림자와 상대의 그림자를 겹쳐보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니다. 히라야마와 여주인의 전남편이 겹쳐본 '그림자'를 '각자의 세상에 닥쳐오는 어둡고 험난한 시련'이라고 치환해 보면 어떨까? 그의 '그림자 겹쳐보기'는 알다시피 더 어두워지지 않는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어쩌면 우리의 격랑은 겹친다고 해서, 포개어본다고 해서 더욱 깊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영화는 말해준다. 그리고 이 장면의 다음날 나오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우리는 더욱이 눈부시고 희망찬 앞날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된다.


- 마지막 장면의 의미는?

 <퍼펙트 데이즈>라는 영화를 보고 어떤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았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십중팔구는 마지막 장면이라고 입을 모아 말할 것이다. 그만큼 마지막 장면이 주는 임팩트와 여운은 강렬다. 배우에 대한 감독의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장면을, '야쿠쇼 코지'라는 배우는 탁월하게 소화해 낸다. 이 장면을 보는 순간 관객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은 채로, 영화가 끝나지 않기만을 기도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장면의 의미, 히라야마의 표정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러한 의미들을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히라야마는 불쑥 찾아온 조카와의 만남, 그리고 이어진 여동생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트라우마인 과거와 마주했기에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히라야마는 지루했던 자신의 반복적인 일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 기뻤고, 그러한 일상을 뒤로한 채 또다시 반복적인 일생을 보내게 된다는 생각에 슬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추측들을 뒤로한 채, 우리는 그의 표정에 관해서 한없이 무지에 휩싸이게 된다. 인생을 영위함에 있어 때로는 자신도 명확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 때가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뿐 아니라 그조차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저마다 각각의 여운을 느꼈고, 그러한 여운을 눈부신 햇빛이 감싸 안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 결국엔 그 모든 날들이 완벽했음을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퍼펙트 데이즈>는 수미상관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의 시작과 끝 모두, 일출과 함께 따스한 햇빛이 히라야마의 삶을 감싸 안는다. 반복적이고 지루해 보이는 그의 삶도, 새로운 변화들로 요동치는 그의 삶도, 결국엔 모든 날이 완벽했음을 본 작은 시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눈부신 일출뿐 아니라 자그마한 '코모레비' 또한 영화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코모레비는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일본어입니다. '코모레비'는 바로 그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영화의 처음과 끝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햇살, 그리고 그 사이에 일렁이고 있는 그의 일상은 '코모레비'로 가득하다. 그의 삶에 눈부신 희망이 틈입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세상에 자그마한 틈과 균열들이 있었기에, 그의 세상 자체가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순간을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내는 히라야마였기에, 바로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코모레비'가 불어왔던 것은 아닐까.


- 마치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앞서 얘기했듯이 마지막 장면이라는 답변이 압도적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대사가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아마 대사가 가장 많이 언급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이 대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매 순간을 아낌없이 만끽하라는 말처럼 나에겐 포근하게 다가온다. 이 대사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면 '어제는 어제'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지나가버린 어제의 상처에 발목을 붙잡힐 필요는 없다. 찾아오지 않은 내일의 불안에 떨 필요는 없다. 결국 우리의 삶은 모든 날들이 완벽하기에. 모든 날들이 바로 '퍼펙트 데이즈' 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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