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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ly Nov 17. 2024

존슨 집안의 기묘한 일(2011)

★★★★(4.0)

(단편 영화는 4점 만점입니다.)

"뒤틀린 욕정의 덫에 걸린 참극은 차마 못 본 체하려 해도."


- 존슨 집안의 기묘한 일

 <존슨 집안의 기묘한 일>은 아리애스터 감독이 2011년 발표한 단편 영화이다. 30분가량의 짧은 러닝 타임 내에, 감독은 관객에게 상상 그 이상의 충격을 선사한다. 이 영화는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어긋난 욕정, 뒤틀린 사랑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뜨거운 욕망을 느낀 아들은 수차례에 걸쳐 자신의 아버지를 겁탈한다. 어머니는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만, 안간힘을 쓰며 못 본 체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못하는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분노와 그런 아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아버지의 갈등은 극에 치닫는다.


- 참극의 효시

 영화의 초반, 아버지는 아들의 방으로 들어와서 아들의 자위행위를 목격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누구나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기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가 터놓고 얘기했으니 금기가 아니라고 얘기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가 금기시하지 않은 것은 아들의 자위행위이다. 하지만 아들이 당시에 자위행위를 하면서 보고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사진이다. 즉, 아들은 아버지가 용인한 것이 자위행위가 아닌, 아버지를 향한 사랑, 그리고 그를 향한 성적인 욕망이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후에, 아버지가 먼저 시작한 것이라며 고함을 지르는 아들의 모습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 문의 의미

 작중에선 문이 빈번히 등장한다. 첫 번째는 바로 아버지가 자위행위를 하는 아들의 방으로 들어오는 장면이다. 이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아버지가 아들의 세계로 들어와, 자신에 대한 사랑을 용인해 주었음을 의미한다.

 그다음은 14년 후, 아들이 아버지의 방에 들어오는 장면들이다. 이는 곧, 반대로 아들이 아버지의 세계에 억지로 들어와 그의 일상을 헤집어 놓음을 뜻한다. 빛 한 줄기 없이 어두컴컴한 아버지의 방은 그의 심정을 대변한다.

 화장실 씬은 이 영화의 핵심 장면 중 하나이다. 아버지는 음악을 들으며 목욕을 즐긴다. 몸을 씻는다는 행위는 아들로 인해 더럽혀진 치욕과 오욕을 헹궈낸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문이 잠겨있다는 것은 아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 아들의 일방적인 사랑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의 심정에 비유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그러한 문을 부수고 아버지가 있는 화장실로 강압적으로 들어가 겁탈을 자행한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 현관문을 열고 아버지는 급히 뛰어 나간다. 즉, 이 장면에선 아들로부터 회피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이러한 끔찍한 일상으로부터 탈피하고 싶은 심정이 부각된 것이다.

 마지막은 어머니가 문을 통해 아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오는 장면이다. 아들의 입장에선 아버지와 자신의 공간에 어머니가 침입했다고 느껴질 것이다. 어머니의 입장에선, 여태껏 묵살해 온 진실을 밝히려는 용기를 보여준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을 통한 공간의 이동은 정리하자면, 두 사람 간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동시에, 하나의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뜻하기도 한다. 아들의 공간에 들어온 아버지, 아버지의 공간에 들어온 아들, 아들의 공간에 들어온 어머니는 극의 스토리 진행과 일치한다. 차례대로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욕망의 요람,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사랑, 아들로부터 회피하려는 아버지의 발악, 아들의 만행을 들춰내려는 어머니의 시도와 대응되는 것이다.


- 뛰어난 미장센

 본작은 여러 가지 뛰어난 미장센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조명을 굉장히 능숙하게 활용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어두컴컴한 아버지의 방은 그의 심정을 대변한다. 그의 방에 빛이 들어오는 순간은 바로 아들이 그의 방에 들어오는 순간이다. 빛이 그의 방에 만연한 어둠을 비춤에도 희망적인 느낌은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빛은, 그가 그토록 공포스러워하는 아들이 만들어낸 빛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들이 방에 들어올 때에, 빛은 어둠 속에 가려진 아버지의 얼굴을 훑는 식으로 들어오는데 이러한 광휘는 관객에게 더할 나위 없는 불쾌함을 선사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역시 탁월한 미장센을 보여준다. 계단으로 내려온 아버지는 거실에 있는 아들과 마주한다. 하지만 아들은 창문에 가려서 그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쇼트가 아버지의 시점 쇼트(혹은 적어도 그의 입장의 주관적 쇼트)라는 점이다. 때문에 창문에 가려진 그의 아들은 그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은 미지의 존재로 다가오게 된다. 그는 그런 아들을 창문을 통해 가리고 싶다. 공포의 대상이 된 아들을 안간힘을 다해 덮어보려 한다. 하지만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창문이기에 그의 아들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창문의 유리를 통해 아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결국, 그가 아들의 어긋난 욕망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음을 영화는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묘사해 낸다.


 마지막 씬은 색상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아들이 있는 방과 아들이 입고 있는 옷의 색은 붉은색이다. 반면, 그의 어머니가 입은 의상의 색은 녹색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색상의 대비는 아들의 공간에 들어온 어머니를 낯선 침입자, 그리고 이질적인 존재로 보이게 만든다. 주목할 점은 적색과 녹색이라는 두 가지 색이다. 왜냐하면 두 색은 서로 보색이기 때문이다. 보색의 의상을 사용해 두 인물의 첨예한 대립을 보여주고, 통렬한 각축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 참극의 일소

 영화는 아들의 만행을 적은 아버지의 자서전이 불에 타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여기서 살펴봐야 하는 것은 태우는 주체와, 타는 객체일 것이다.


 누가 태우느냐? 추측건대 어머니일 것이다. 여태 발생한 사건들은 어머니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일이다. 어머니는 그러한 수치를 밖으로 내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그리고 여태 벌어진 모든 일들이 없던 일이었으면 하기에 아들의 만행에 관한 모든 기록을 말소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태워지느냐? 바로 아버지의 통사(痛史)이다. 아버지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자신이 당한 일들을 세상에 널리 알려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냐, 혹은 전처럼 침묵한 채 아들의 욕망을 견뎌낼 것이냐. 하지만,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기에, 아들이라는 질곡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아들로부터 당한 수치와 오욕의 나날들 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아버지의 생애에 묻은 얼룩을 일소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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