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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카고 최과장 Nov 04. 2024

내로남불 1 (첫 번째 이야기)

알코올솜 소독에 관한 추억

마취과 레지던트 2년 차 시절에 생겼던 일이다.

마취과 레지던트 시절 수련받던 병원의 심장 마취 총책임자로 계셨던 분이 있었다.

성함이 정말 이탈리아스러운 (비탈레) 미국인 마취과 전문의 선생님이셨는데, 심장 수술 마취 케이스를 몇 번 같이 한 적이 있었다.


레지던트 시절부터 나는 환자에게 정맥주사를 주는 경우에는 항상 알코올 솜으로 주사기를 연결하는 부분을 깨끗이 닦고 정맥 주사를 주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정맥주사는 환자 정맥을 통해서 바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당연히 감염예방을 위해서는 주사하기 전에 항상 알코올 솜으로 소독을 해야 한다고 배웠다. 모든 질병은 치료보다는 그에 대한 예방을 하는 것이 무조건 우월하므로, 알코올 솜 소독은 항상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일회용 알코올 솜


비탈레 선생님과 심장 수술 마취 케이스를 할 때였다.

당시에 수술이 거의 끝나가고 있던 와중이어서, 환자를 전신 마취에서 깨우기 전에 항구토제를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맥주사제인 온단세트론을 재빨리 물약병에서 뽑은 후에, 환자에게 주사하기 위해서 정맥주사를 줄 수 있는 포트를 알코올 솜으로 닦으려고 준비 중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비탈레 선생님은 나에게 물어보았다.

정맥 주사기를 연결할 수 있는 포트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

“알코올 솜으로 포트를 닦아서 온단세트론을 주려고 하는데요…”

“지금 그럴 시간이 어디 있냐? 이런 건 빨리빨리 줘야 하잖아? 스피드가 생명이잖아”

‘아- 그렇구나 스피드가 생명이구나…’

굳이 약을 재빠르게 주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당시 우리 병원 심장 마취 총책임자 선생님의 말씀이었으므로 그 무게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렇게 심장 수술 마취 로테이션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 6 주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 나는 응급실 로테이션으로 바뀌어서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응급실에서 환자를 보고 있을 때였다.


새로 내원한 환자의 응급실 내원 이유와 병력을 잘 정리해서 응급의학과 전문의 선생님께 보고를 하러 가는 와중이었는데, 환자복을 입은 어떤 사람이 나에게 갑자기 아는 척을 하면서 말을 걸어와서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비탈레 선생님이 환자복을 입은 채로 나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평소에 수술복 입고 있는 모습만을 보다가, 환자복을 입은 비탈레 선생님을 응급실에서 갑자기 뵙게 되어 다시 한번 놀랐다. 비탈레 선생님이 나에게 다급하게 말씀하셨다.

“응급실에 신장결석으로 오게 되었는데, 내 부탁 좀 들어줄래?”

“예,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수술방에 올라가서, Toradol (Ketorolac) 물약병을 좀 가져다줄 수 있겠나?”

“예, 뭐 별로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 바라본 비탈레 선생님의 모습이 완벽한 '껄렁한 프로 환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 또다시 한번 놀랐다. 

한국의 환자복은 잘 모르겠지만, 미국의 환자복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본의 아니게 자신의 맨 뒤태를 시원하게 노출시킬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입원기간이 좀 오래되는 환자들은 환자복을 두 겹으로 겹쳐서 입으면서 안쪽 환자복은 앞에서 뒤로 입고, 바깥쪽 환자복은 뒤에서 앞으로 입어서 본의 아니게 자신의 뒤태를 노출시키는 것을 방지한다.



미국 병원 환자복은 보통 매듭이 뒤에 달려있는 데다가 매듭 사이의 간격이 넓다. 따라서, 주의하지 않으면 본의 아니게 뒤태를 시원하게 공개할 수도 있다.

비탈레 선생님은 

환자복을 두 겹으로 앞 -> 뒤, 뒤 ->앞으로 야무지게 잘 겹쳐서 입은 후에,

환자복 안쪽에는 선명한 색깔의 카라 티셔츠를 입고 나서 카라를 바짝 세운 모습에, 

한 손에는 정맥 수액 백을 움켜쥔 채로,

신발은 신지 않고 환자용 양말을 신고 있으면서 이곳저곳을 빠르게 다니고 계셨다. (환자용 양말은 미끄럼 방지 고무 밑창이 되어 있어서 병원 복도등에서는 신발을 신지 않고 좀 더 빠르고 안전하게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아마도 오래된 병원 근무로 인해서인지 '프로 환자'의 모범적인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주신 비탈레 선생님이셨다. 

'환자가 맞긴 맞는 거겠지?'




Toradol 은 비스테로이드 항염증 약물 중의 하나로, 수술 후 진통 소염제로 투여할 수 있는 주사제이다. 마약성 진통제가 아닌 약물이라서, 수술방안에 있는 마취약 카트에서 쉽게 구해서 가져올 수 있는 약이다.


Toradol 주사약병


당시 병원 심장 마취 책임자로 계신 분이 친히 부탁하셨으므로, 나로서는 빠르게 그분의 요청에 응해야 했고 이렇게 개인적으로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내심 매우 기뻤다.

빠르게 수술방으로 가서, 마취약 카트에서 Toradol 물약병과 주사기와 주사 바늘을 챙겨서 다시 응급실로 내려왔다. 비탈레 선생님은 Toradol약물을 뽑아서 본인의 정맥 주사에 넣어달라고 요청하셨다.


이왕 심장 마취 총책임자 선생님을 도와드리게 된 거라면, 좀 더 강렬하면서도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6주 전에 나에게 남기신 피드백을 실전에 바로 적용해서, 배운 것을 잘 흡수하고 실전에 잘 적용시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스피드가 생명이다’라는 그때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 빠르게 Toradol 약물을 뽑아서 바로 주사해 드리는 모습을 보여 드리면 흡족해하시리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빠르게 약물을 뽑아서, 배운 그대로 비탈레 선생님 정맥주사에 곧바로 주입하려고 다가섰다. 스피드가 생명인 상황에서는 알코올 솜 따위로 연결 포트를 소독하는 것은 당연히 생략되어야 했다. 

그러자 갑자기 비탈레 선생님이 외치듯이 다급하게 말씀하셨다.


“어… 어… 너 뭐 하는 거야?”

“스피드가 생명이라고 하셔서 빠르게 주입하고 있습니다만...”

“정맥주사를 줄 적에는 항상 알코올 솜으로 포트를 소독하고 주입해야지, 너는 너무 개념이 없는 거 아니냐” 




그랬다.

머나먼 이역만리 미국 병원에서도 '내로남불'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필자 注, 내로남불 =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이중잣대를 가진 사람들이 행하는 행동을 일컫는다)


레지던트를 가르치는 입장에 있던 비탈레 선생님은 당연히 환자에게 약물을 주입할 때에는 항상 알코올 솜으로 소독해야 한다고 나에게 올바르게 가르쳤어야 맞다. 환자에게 정맥주사를 줄 때에는 알코올 솜으로 연결 포트를 소독할 시간도 없다고 하면서, 정작 본인이 환자가 되어서 정맥주사를 투여받을 때에는 당연히 연결 포트를 소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로남불’의 장인 비탈레 선생님이셨다. 


정맥 주사 포트에 연결한 주사기


이때의 사건에서 나름 교훈과 깨달음을 얻어서일까?

나는 이 사건 이후에 환자에게 정맥주사를 줄 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알코올 솜으로 소독을 하고 주게 되었다.

이렇게 행동하게 된 것이 내가 위의 '내로남불' 케이스를 반면교사 (反面敎師)로 삼아서, 레지던트들에게 모범을 보이려고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나도 미래에 응급실을 방문했을 때,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레지던트가 알코올 솜으로 소독한 후에 약물을 주입받기를 원해서 그러는 것인지는 아직까지도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렇게 함으로써 ‘내로남불’의 위선적인 모습은 방지할 수 있으므로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알코올 솜으로 소독한 후에 환자에게 약물을 투입할 예정이다. 

또한 정맥 주사를 주입하기 전의 연결 포트 소독은 원래 아주 당연한 일이고, 환자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 중의 하나일 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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