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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등석 Nov 29. 2021

혼술


 육순이나 되었을까?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삐딱하게 서 있다. 나에게 격양된 어조로 한참 동안 자기 할 말만 하다가, 끝에는 이런 말을 내뱉는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 말이야! 자기 엄마한테도 그러나?”


 나는 조용히 속으로 ‘우리 엄마는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 안 해요.’라고 말하고는 비굴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의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오늘도 나는 대충 수긍하며, 적절히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머리로는 잘 알겠지만 사람인지라 뜻대로 되지 않고 종종 상처를 받는다. 항상 져야 하는 내 생활에 가끔 서러워질 때가 있다.  


 나에겐 자주 가는 식당이 있는데, 퇴근 후 멍하니 걷다 보니 어느새 그곳 앞이었다. 사장님이 나를 먼저 발견하고는 늘 그랬듯이 활짝 웃었다. 나도 인사를 하고 반가운 척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 앉았다. 사장님이 오늘도 고등어 정식을 추천했다. 사실 며칠 째 똑같은 메뉴를 권하고 있는데, 내가 고등어를 좋아해서 참 다행이다. 사장님께서 물을 가져다주실 때, 소주 한 병을 시켰다. 항상 식당에 혼자 오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이다. 그걸 핑계 삼아 내 마음을 달래보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반 병쯤 먹었을 때, 어르신 두 분이 오셨다. 사장님은 나보다 더 반갑게 어르신들을 맞아주셨는데, 정말 웃기지만 나는 조금 서운했다. 이게 이 허름한 점포의 매력 아닐까? 어르신들은 항상 그래 왔다는 듯이 바둑을 두시기 시작하셨다. 바둑알을 잡지 않은 손에는 술잔이 어여쁘게 자리했다. 바둑을 한참 두시던 차에 안경을 쓴 어르신이 갑자기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세상 각박하게 사냐고, 오늘도 이겨 먹을 것이냐고. 안경을 안 쓴 어르신은 묵묵부답. 난 남은 소주를 마시며 어르신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했다. 정말 맞는 말이다. 나라님 될 것도 아닌데, 아등바등 이겨서 뭐하겠는가? 내 꿈은 고향마을에서 술이나 먹고사는 것이다.


 우리 고향집 뒤에는 조그만 산이 하나 있다. 나는 그곳에다 정자를 짓고 싶다. 봄이면 정자 옆에 텃밭을 가꾸어 배추나 호박 같은 곡식들을 심고 싶다. 곡식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늦여름이 지나면 하나둘 수확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을쯤 되면 내 벗 연우가 인천에서 찾아올 것이다(연우는 배를 타다가 손가락이 잘렸다). 그는 어떻게 늙어갈까? 나이가 들면 오리농장을 하고 싶다고 하였으니, 한적한 산골에서 오리들과 여생을 보내고 있지는 않을까? 날 만나러 올 때 술안주 하자고 한두 마리 잡아올지도 모른다. 그 오리요리랑 내가 키운 곡식들을 정자에 가지런히 늘어놓고는, 술판을 벌이면 얼마나 즐거울까?


 겨울이면, 촉촉하게 내리는 하얀 눈 바라보며 집에서 홀로 책을 읽고 싶다. 안개 낀 우리 동네 호숫가를, 새벽에 산책하는 일도 정말 멋질 것이다. 그렇게 책 몇 권 읽고 산책 몇 번 하다 보면, 다시 봄이 올 것이고 나는 정자에 쌓인 눈을 쓸면서 다시 연우를 맞이할 준비를 할 것이다. 몇 해는 연우가 날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좋다. 기다리는 것조차 즐거운 인연이 있으니.


 술은 딱 소주 한 병이 좋다. 술에 취하니 너무나도 뚜렷했던 세상이 춤을 추며, 흐릿해진다. 그 흐림이 나의 고민과 근심을 옅어지게 만들고, 내일 아침 일어나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첫 발걸음이 된다. 가만히 들어보니, 결국 말이 없으셨던 어르신께서 이기신 것 같다. 안경을 쓴 어르신이 다음에는 이길 거라며 껄껄 웃으셨다. 나는 그 어르신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항상 지기만 하던 복서도 카운터 펀치를 날리며 챔피언을 이기는 게 멋지지 않은가?


 오늘도 나는 참 크게도 졌다. 그래서 소주가 다른 날보다 더 달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르신도 나도 오늘은 졌지만, 또 지는 날이 더 많겠지만 평생을 지기만 하겠는가? 이런 나의 인생에도 멋지게 카운터 펀치를 날릴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장님은 날 보며 빙그레 웃기만 한다.




덧붙이는 글) 사회생활을 처음 할 때(어느새 10년이 다 돼가네요.)의 첫 직장이 울산이었는데 그때 쓴 글입니다. 단골 식당 사장님 덕에 타지 생활을 잘 견딜 수 있었는데, 잘 계시는 지 모르겠네요. 건강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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