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실비 Sep 16. 2022

베를린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

일상을 살다 보면 나를 아무도 모르는, 어디 먼 곳으로 훌쩍 떠나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이방인으로써 이름도 성격도 완전히 다른 누군가로 살아보는 게 환상이라면 환상, 로망이라면 로망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현재의 나와는 정 반대인 페르소나를 가지고 내 주변 사람과 완전히 다른 타입의 사람들을 만난다. 나 자신이라면 하지 않을 법한 행동을 하고 나라면.. 하는 모든 행동들과는 조금은 다른 방법으로 살아보는 것이다. 아마 누구든지 한 번 정도는 상상해봤을 것이다. 상상이기 때문에, 그리고 잠깐이라면 ‘진짜 현실의 삶'이 아니고 내 삶과 분리된 일탈이기 때문에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좋아하고, 특히나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고, 그걸 추억 삼아 살아갈 힘을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행에서의 변화는 언젠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현실을 버티고, 이방인으로써의 추억은 작은 일탈로 남겨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독일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인생에서의 일탈을 하는 것 같았다. 아는 사람들이 이미 꽤나 많이 살고 있었지만,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의도했던지 아니 던지간에, 새로운 문화권에 적응하려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살아내야 한다. 생각하는 방식, 사소한 습관, 말투, 표정, 제스처 같은 사소한 부분들에서 가는 장소, 어울리는 사람들, 먹는 음식들, 예절 같은 것들까지.  그런 문화적인 충돌을 경험하면서 처음 1년에서 1년 반 정도, 그러니까 학교에 입학하기 전 까지는 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로 살아왔던 것 같다. 언제 학교에 붙을 수 있을지, 과연 내가 여기에서 오래 살지…이런 것들이 불확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방인의 상태를 받아들였다. 


모국어나 모국어 수준이 아닌 다른 언어를 배울 때 신기한 점은 내 성격도 언어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이다. 언어를 처음 배울 때는 친절하거나 정중한 화법을 사용하는 게 당연하다. 한국말이 서툰 외국인들이 착하고 순진해 보이듯이 나 역시도 독일어를 쓰거나 영어를 사용할 때 착하고 친절한 동양인이 되었다. 언어뿐만이 아니라 낯선 곳의 생활과 행동양식에 적응하는 동안은 계속 그랬다. 나는 내가 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으로 보이는 게 싫었다. 그렇게 보이는 건, 내가 정말 친절하다거나 착한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무미건조하고 표정도 별로 없는 데다가 까칠하다. 뭔가를 보고 웃기다고 말하면 친구들이 “진짜 웃긴 거 맞아?”라고 장난스럽게 되묻게 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 내가 독일에 와서 착하게 생겼다는 말을 듣고 있다니, 웃겼다.


어떤 장면이나 행동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나 스스로의 경험과 살아오면서 쌓아온 어떤 무의식의 판사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어떤 말을 한다면 그건 무례한 것이다. 혹은 누군가가 어떤 행동을 하는 걸 보고 옳다고 생각하거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해야 하고 남한테는 이런 식으로 대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만의 도덕 법칙이 있다. 그건  자기의 기준, 내면의 힘, 혹은 가치판단.. 뭐가 되었든 간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되고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 


뭔가를 받아들이는데 꽤나 포용적인 것이 스스로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런 성격이 판단의 기준을 만드는 데에는 좋지 않았다. 원래 누가 뭘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도 하고 정말 싫은 것이 아니고서야 아 그렇군... 하는 무딘 성격이다. 그래서 그런지 낯선 곳에 오니 내 내면의 판사가 사라졌다. 다른 문화에 빨리 적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에 뭔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거나, 한국인들은 왜 그래?라는 말을 들으면 ‘어쩌라고 그러는 너는 왜 그러냐'가 아니라, ‘아 독일인들은 다 저렇게 행동하는군' 혹은 '내 행동이 한국인스러워서 구려 보이나보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여행일 때는 신경 쓰지 않던 외국어도, 독일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독일어로 말을 못 하는 게 부끄럽거나 미안하게 생각되었고, 영어도 완벽히 알아듣지 못하면 주눅이 들었다. 내가 나 자신으로 있지 못하니까 점점 나는 나 자신이 아니라 그냥 순진한 외국인, 표면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생각, 그러니까 나도 네가 궁금하지 않다는 생각, 너는 내 친구가 아니니까 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공유하지 않겠다는 생각. 내가 이방인이라서 나를 표면적으로만 대하는 건가 하는 허탈함이 오기도 했다.


1년이 조금 지나서야 서서히 언어속에서 잃어버린 정체성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학교에 들어가고, 공통분모가 확실하게 있는 친구들이 생기고, 내 생활이 안정적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 자신을 꺼내놓을 수 있었다. 이제 누가 한국인은 왜 그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게 장난인걸 알고, 농담으로 대꾸할 수 있다. 아니 말할 필요도 없다. 주눅 들지 않고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심지어 나를 대하는 현지 친구들의 태도도 한국 친구들과 비슷해졌다. 한국 친구들이 나한테 장난치는 밈을 외국 친구들이 똑같이 할 때 드디어 내가 적응했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독일어는 잘 못하고 영어도 문법 지적을 받을 때가 많지만 비로소 나 자신이 되고, 뭔가를 보고 내가 이것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필터링할 수 있는 내 관점이 생긴 것이다.


원래 있던 환경을 벗어나서 살다 보니 나 자신에 대해 배우는 점이 많다. 싫어하는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 취향이었고, 귀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내가 배우고 실천해야 할 점이었고,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 그런 것들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