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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비 Sep 14. 2024

청춘을 즐기는 법

마지막 여름

올해의 마지막 여름은 지난 일요일이었다. 

 하루종일 약 27-28도 가량의 더위를 기록하고는 다음날부터 흐린 구름과 비가 찾아왔다. 기온은 훅 떨어졌고, 여름은 미련 없이 물러났다.


일요일 오후, 문득 창밖을 보니 트램 선로 위에 자라던 풀들이 온통 갈색으로 변해있었다. 

주변 독일친구들은 올해 여름이 유난히도 초록빛이라고 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로 홍수도 많았지만 오히려 식물들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보통은 건조하고 따가운 햇살때문에 나뭇잎이나 풀들이 다 타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때 트램을 타고가다 보면, 유난히 그림자가 지는 부근만 싱싱한 풀들이 남아있고, 주변은 이미 말라 비틀어진 잔디들로 가득하다. 


올해 여름은 특히나 바쁘게 지나갔다. 올해는 호수에 못 갔지만, 공원 바베큐만큼은 미련없이 즐겼다. 어차피 하지도 못하는 수영보단 공원 바베큐와 비어가든을 즐기는게 더 좋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베를린에서 처음 호수에 갔을때의 충격이 생생하다. Krumme Lanke는 베를린안에서 수영이 가능한 호수가 있는 곳으로, 10대 20대들의 메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서는 영화에서나 보던, 10대들이 호수에 거리낌없이 풍덩 뛰어들어 수영을 하는 장면들이 펼쳐졌다. 나는 그게 영화적인 연출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는 호수에서 수영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호수 자체보다도 그 안에 있는 온갖 청춘들이 반짝거리는 풍경을 구경할 만 하다. 


그때 나는 예전에 대림미술관에서 봤던 라이언 맥긴리의 청춘사진들을 떠올렸다. 한국인들에게는 너무 말이 안되어서 기만적이기 까지 하던 그런 청춘사진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것만 같았다. 그리고는 괜히 영혼없이 학원 뺑뺑이를 돌던 10대가 생각나 허탈했다. 한국의 10대들은 이런것들을 영화나 만화책이나 사진으로만 즐기는데 말이다.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이런곳에 와서 차가운 맥주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질릴때까지 수영하면서 노는 여름이라니. 억울하다 억울해. 

나는 친구들에게 한국의 10대들이 어떻게 여름을 보내는지를 툴툴거리면서 불평해댔다. 






베를린의 공원에서는 바베큐를 할 수 있는 그릴플랏츠가 따로 정해져 있다. 

주말만 되면 그 부근은 고기굽는 냄새와 바베큐 연기로 가득차고는 한다. 대가족들과 커플들, 대학생들...


시작은 바베큐 그릴통을 가지고 있던 친구였다. 올해 여름, 우리는 네명이서 공원에 앉아 적당히 단촐하게 바베큐를 하고는 했다. 그러던것이 어느순간부터 판이 커지면서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을 고기를 끝없이 굽게 되었다. 나는 밥과 바베큐 소스 담당이었다. 가끔 버섯에 마늘와 파프리카를 조금 넣고 위에 치즈를 얹어 굽기도 해봤는데, 성공적으로 맛있었다. 다만 여름에 퍼지는 공기의 밀도를 생각하지 못하고 봉인을 서툴게 했더니 트램을 타고 가는 내내 주변에  강력한 마늘냄새가 퍼졌다. 에어컨도 없는 후덥지근한 트램 안에서 어떻게든 마늘냄새를 감추려고 미동도 하지않고 눈알만 굴렸던 기억이 난다. 


친구의 생일도 올해 내 생일도 공원에서 바베큐를 하면서 보냈다. 

한 친구는 구루마에 맥주를 두박스 담아서 끌고왔다. 본격적인 파티였다. 우리는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바베큐를 할 공원을 정했다. 어느날은 탁 트인 경치가 있는 템펠호퍼펠트, 어느날은 폴크스파크...다만 암묵적으로 마우어파크만은 가지 않기로 했다. 








유난히 사람이 많이 모였던 어느 공원 피크닉에서, 한 친구가 말했다.

자, 남자들은 남자들의 일을 하고, 우린 여기서 수다떨면서 기다리자. 

그녀의 말에 문득 바베큐통을 바라보니 어느샌가 남자인 친구들은 죄다 불통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원래 고기굽기 담당은 그룹에서 유일한 남자였던 D였다. 교대하자고 해도 한사코 자기가 좋아서 하는일이라며 마치 프로메테우스마냥 불통을 사수하고는 했다. 처음에 서툴게 고기를 태우던 그는 곧 그릴마스터가 되었다. 


우린 쟤들이 남성성을 지키게 해주자구. 

자연스럽게 남녀가 분리된 풍경이 웃기다며 L이 나서서 사진을 찍었다. 








누군가의 생일로 공원에 모이면 가끔 플렁키볼 게임을 했다. 일종의 술게임인데 방식은 이렇다. 

- 두 팀을 짜서 마주보는 중간에 빈 맥주병을 세운다. 

- 한 팀에 한명이 페트병을 던져 맥주병을 맞춰 쓰러트린다.

- 맥주병이 쓰러지면 상대 팀원이 달려나가 맥주병을 세우는 동안에 페트병을 던진 팀의 모든 사람이 맥주를 최대한 빨리 마신다. 

- 이걸 번갈아가면서 반복한다. 한팀에 모든 사람들이 먼저 맥주한병을 끝내버리면 이기는 게임이다. 


가스가 있는 맥주 한병을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하기 떄문에 한두판 하고나면 이미 확 취하게 되는 게임이다. 이 미친게임을 한번 하고 집에가는동안 두번 토하고나서 다시는 안하기로 했다. 


여름이 오기 직전에 친구들과 올해 여름에 뭘 할건지, 각자 신나게 계획을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말했던 계획처럼 우리는 이 계절을 빈틈없이 누리려고 노력했던것 같다. 건조한 햇빛이 쬐는 테라스에서 마시는 첫 아페롤 스프리츠, 노동절의 Görlitzer Park, 끝없이 굽는 공원 바베큐와 피크닉, 그리고 낮에 노는 테크노 파티, 귀여운 여름 원피스, 야외 영화관, 비어가든....그리고 여름 바캉스. 


모든 사람들이 이런것들만을 기다리며 겨울을 버틴다. 똑같은 여름을 무수히 반복한 끝에 이런것들이 언젠가 질려버릴수도 있을까? 몇번이나 반복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언젠가 이 모든것들이 또 다시 지겨워질 때가 오면, 그럼 그때서야 억울하지 않게 청춘을 제대로 즐겼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때 그 공원에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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