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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비 Apr 25. 2022

독일에서 알바하기

독일에서 아르바이트하기(하)

내가 구한 일은 호텔, 국제무역박람회, 컨벤션, 또는 회사 이벤트 케이터링 등으로 파견되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었고, 그 이벤트 장소들에 사람들을 파견하는 게 이 회사가 하는 일이었다. 높은 수준의 독일어를 구사해야 하는 장소도 있었지만, 바 키퍼가 아니라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랑 제대로 소통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느껴졌다.


아르바이트 첫날, 나는 직원이 적어준 주소로 향하기 위해 아침일찍부터 분주하게 집을 나섰다.

직원이 적어준 주소를 검색해보니 베를린의 중심가에서 꽤나 떨어진 외곽이었다. 한적한 주택가를 지나 도착지에 가까워지면서 나는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벤트가 열린다고 들었는데, 이런 곳이라고? 내 앞에는 독일인들만 살 것 같은 한적하고 평화로운 주택가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곧 도착한 곳은 마당이 딸린 그냥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설마, 작은 규모의 파티인가, 무슨 프라이빗 파티 이런 건가? 나한테는 안 보이는 큰 건물이 주변에 있는 건가?


출근시간이 되었고 여전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지도를 다시 켜서 설마 하는 마음으로 건물 이름을 검색했다.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다.

똑같은 주소를 가진 장소가 두 군데였다.

하나는 내가 바보처럼 혼자 서있는 그곳, 다른 하나는 내가 이미 도착했어야 하는, 베를린의 중심가에 있는 큰 이벤트홀.

나는 한 시간이나 걸려서 왔는데 다시 보니 내가 도착했어야 하는 곳은 우리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도로명과 번지수가 똑같아서 벌어진 실수였다. 주소는 같은데 완전히 다른 곳에 떨어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회사 앱을 다운받아서 스케줄과 이벤트 정보를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하필 내가 유니폼을 받으러 간 날에 오류가 나서 주소가 뜨지 않았고 직원이 수기로 주소를 적어줬던 것이다. 

주소를 적을 때 우편번호를 적는 이유를 이런 식으로 알게 되다니. 지금 다시 되돌아가도 40분은 걸릴 것이다. 첫날인데... 사무실에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What? ONE HOUR???!! please quick please!)


그냥 집에 가버릴까... 다시 출근지로 돌아가는 길 내내 생각했다. 하지만 이대로 집에 가기엔... 내가 면접 볼 때 봤던 다른 사람들은 전부 독일인이었고, 독일어도 못하는 나를 뽑아준 사람한테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내빼버릴 수는 없었다.


꼭 학교에 늦은 학생 같은 기분으로, 별별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하면서 도착한 그곳은 의외로 한산했다.

전혀 바쁠 게 없었다.

파견된 사람들은 나까지 총 4명이었고, 저녁에 있을 이벤트를 위해 테이블을 세팅하는 게 할 일의 전부였다.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테이블 세팅하는 걸 알려주고 다른 직원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사실 그런 일은 그냥 보고 따라 하면 되는 거라서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고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때면 같이 일하게 된 터키계 독일인 여자애가 다시 쉬운 독일어로 말해주었다.


첫날을 그렇게 한가하게 끝내고, 일을 하면서 동료들에게 재밌게 일할 수 있는 파견 장소들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여기 호텔은 매니저가 기분 나쁘게 말하고, 저 이벤트 장소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재밌고, 여름에는 휴양지 섬에 가서 일할 수도 있고, 뭐 이런 얘기들.

일하면서 주방 아저씨가 뷔페 음식을 몰래 챙겨주기도 하고, 너무 피곤하면 다른 사람들이랑 숨어서 잠깐 쉬기도 했고, 어린 사람들만 일하는 건 아니었지만 대학생 아르바이트 같은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어떤 날은 ABIball 행사에 가기도 했다. 아비발은 독일 학생들의 졸업기념행사인데, 여자애들은 영화에서나 보던 파티 드레스를 입고 오고 남자들은 정장을 입고 온다. 학부모들도 참석하는데 저녁이 되면 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파티를 즐긴다. 부모는 이때 빠지기도 하지만 끝까지 남아서 애들이랑 댄스파티를 즐기는 것을 보면 한국과 다른 분위기가 신기했다. 십 대들이라서 그런지, 자정쯤 되면 한 편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술을 마시고 술잔을 다 깨트리면서 뛰어다니거나, 한쪽에서는 우는 친구를 다독여주는 여자애들 모임이 있고, 다른 쪽에서는 싸우고 있는 풍경이 있다. 음악과 술잔 깨지는 소리는 밤늦게까지 멈추지 않았고 그날은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집에 갈 수 있었다.


그 일을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하면서 몸은 좀 피곤하긴 했지만 베를린의 다양한 이벤트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약 5개월이 지나자 처음에는 너무 빨라서 알아들을 수 없던 독일어도 훨씬 더 많이 들리게 되었고 어느 정도 얼굴이 익은 사람들과는 따로 만나서 놀러 다니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조금 고생이긴 하지만 어학원과 집만 오가던 나한테는 충분히 괜찮은 돌파구였다.  많은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기 때문에 대화할 일도 많았다. 아는 사람도 없이 좁은 세계에서 혼자 생각만 하다보면 작은 일에도 예민해지게 된다. 기분이 안 좋은 날은 일을 하면서 몸을 움직이고, 다른 사람들과 시답자 않은 이야기를 하거나 격려하면서 털어내 버릴 수 있었다.


가끔은 이벤트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유니폼 입고 일하는 나 자신과 비교되어 부러울 때도 있었다. 그럴 땐 그냥, 몇 년 뒤에는 나도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방문자로 와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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