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과 비움
시골 책방이라면 자연과 어우러져야지. 타샤의 정원처럼 다채롭지 못하더라도, 헤르만 헤세처럼 철학적으로 가꾸지는 못할지라도, 나의 손으로 직접 정원을 만들어 나가고 싶었다. 물론 조경 업체에 맡길만한 여유도 없었다.
집 앞마당에는 좁고 긴 화단을 만들고, 책방 앞으로는 곡선으로 잔디밭과 경계를 두었다.
화단은 만들어 놓았는데, 무얼 심어야 할지 막막했다. 귀촌 정보를 얻기 위해 가입했던 소셜 카페에서 씨앗 나눔 글이 올라오면 부지런히 신청했다.
봄이라고 부르기엔 이른 2월 말이었다. 남편은 중고 나눔 카페에 올라온 글을 보여 줬다. 집 화단에 있는 배롱나무를 직접 캐 가라는 글이었다.
“예쁘지? 너 배롱나무 꽃 좋아한다고 했잖아. 이거 가지러 가자.”
“뭐라고? 나무를 직접 캐 온다고? 이걸 어떻게 캐고, 어떻게 가져와?”
“용달차 빌리면 되지. 진표랑 같이 가서 캐 오면 돼.”
나는 무리라며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이미 나무 이식 방법을 검색하고, 용달차를 빌리고, 필요한 자재까지 준비해 두었다. 3월의 첫날, 아들과 나는 남편이 운전하는 트럭 조수석에 올라 당진까지 내려갔다. 아직 덜 녹아 단단한 땅을 삽으로 파고, 뿌리를 감싸고, 흙이 흩어지지 않도록 마대를 묶는 데 반나절이나 걸렸다. 그렇게 배롱나무와 화살나무, 남천 몇 그루를 실어 와 화단에 심었다.
4월이 되자 산림조합 나무시장이 열렸다. 목련, 과실나무, 철쭉을 사 왔고, 배롱나무도 두 그루 더 들였다. 휑한 화단을 채우려는 마음에 듬성듬성 심었다. 화분 식물도 들여와 책방 안팎을 채웠다. 나눔 받은 꽃씨는 모종판에 심고, 물을 주고, 밤에는 비닐을 덮어 주었다. 새싹이 돋으면 두 손으로 조심스레 옮겨 심었다. 조급한 마음에 화원에서 모종을 사다 심기도 했다. 들풀 하나도 소중해 뽑지 못했다. 초보 가드너에게 정원은 그저 신기하고 기쁜 일이었다.
남편은 한술 더 떴다. 당근에서 무료 나눔 하는 화분을 받아 왔다. 그중에는 건강한 화분도 있었지만, 시들어가는 것들도 있었다. 우리 집에 오면 다시 살아나는 것들도 있었다.
우리 집에는 정원 선생님이 있다. 아랫집 순옥아주머니와 전 이장님이다.
두 분의 정원은 소박하면서도 화려했고, 다채로우면서도 정갈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끊임없이 피고 졌다. 두 선생님은 수시로 올라와 정원을 살펴주셨다.
“이건 잡초야. 더 크기 전에 뽑아야 해.”
“이렇게 많으면 햇빛도 못 받아. 중간중간 솎아줘야 해.”
두 분은 꽃을 나눠 심어 주고, 다육이를 옮겨 심고, 풀을 뽑아 주셨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초록은 다 같은 초록이 아니라는 것을.
휑하던 정원은 조금씩 빛을 얻어 갔다.
하지만 가을이 되자 문제가 보였다. 키가 큰 칸나는 시야를 가렸고, 흩어져 심은 꽃들은 제 빛을 내지 못했다. 샤스타데이지는 지나치게 번져 다른 꽃의 자리를 침범했고, 무작정 심었던 나무들은 간격이 맞지 않아 다시 옮겨야 했다. 모양과 크기가 다른 각양각색의 화분은 결국 빈 흙만 남은 채 뒷마당으로 밀려났다.
집은 몇 달이면 지을 수 있지만, 정원은 그렇지 않았다. 몇 달도, 한두 해도 부족했다.
성급한 마음으로 심었던 것들은 다시 뽑히고 옮겨졌다.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없었지만, 더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가지를 쳐야 했고, 서로의 자리를 위해서는 거리를 두어야 했다.
정원은 기다림이고 여유였다.
서둘러 채운 자리에는 결국 다시 손이 갔다. 비워 둔 자리에서 오히려 더 단단한 뿌리가 내렸다.
무언가를 더하는 일보다, 덜어 내고 기다리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을 정원에서 배웠다.
그래서 이제는 서두르지 않는다. 조금 빙 있는 자리를 그대로 두고, 다음 계절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