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동네에서 작은 영어공부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이들 영어 가르친 지는 햇수로 벌써 20년이 되었네요. 처음에는 중고등 입시영어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초중등 아이들을 더 많이 지도하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 아이들을 만나 영어를 가르치며 소통하는 제게는 정말로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하나 있었어요. ‘너희들은 왜 맨날 기분이 나쁘냐?’
(출처-픽사베이)
과장이 아닙니다. 하루에 평균 열댓 명의 아이들이 공부방에 오는데요, 환하게 웃는 보름달 얼굴로 공부방에 들어오는 아이들을 꼽자면 한 손은 커녕 손가락 두 개를 펴기도 어려운 날이 많아요. 대개는 조선백자처럼 허옇고 무감한 표정으로 들어섭니다. 그리고 한 손에 꼽힐 정도의 아이들은 미간에 두 줄 정도 주름을 세우고 입꼬리가 아래로 스윽 쳐진 채로 공부방에 발을 들이지요. 그런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외치는 거죠, ‘오늘은 너냐?’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아이들의 기분은 롤러코스터와 같다는 거예요. 그렇게 쭈그러진 표정으로 공부방에 들어선 아이들의 기분은 대개 오 분 내로 금방 괜찮아집니다. 기분이 그렇게까지 빨리 바뀔 수 있는것인가-라고 물으신다면, 네! 아주 순식간에 호떡 뒤집듯 바뀌던걸요. 아니, 이렇게 금방 괜찮아질 것을 세상 분하다고 씩씩거리고, 세상 억울하다고 퉁퉁거릴 일인가요. 정말 이해할 수 없던 어린이 청소년들의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제가 엄마가 된 이후에 그것도 몇 년이나 지나서였습니다.
엄마가 되고 아이들을 몇 년 키우다 보니 엄마의 위치에 조금 익숙해지며 아이의 온전한 하루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었어요.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 씻고,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양치하고, 어린이집에 가는 이 모든 과정이 아이에게는 모두 새롭고 낯선 경험이겠구나.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세상을 만나고 적응하는게 참 피곤하겠구나. 힘이 드니까 울고 떼를 쓰다가 엄마가 안아주고 토닥토닥해주면 금방 기분이 괜찮아지는 거구나.
어른인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아침에 일어날 때 피곤하면 기분이 좋지 않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면 상태가 조금 나아집니다. 출근길에 만원 버스 콩나물시루 지하철에서 시달리며 짜증이 솟구쳤다가, 회사에 도착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타서 향을 맡는 순간 출근길의 피로가 조금이나마 회복되는 듯해요. 그러나 일을 시작하는 그때의 그 기분이란.
우리도 매일매일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채로 하루를 보내지만, 어른들에게는 그것들이 그렇게 힘들고 짜증 나지는 않아요. 우리가 매일의 감정변화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일상은 대개 예측가능하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일이 있으며 이런 기분이 들지만, 이런 일이 지나가고 저런 일이 시작되면 이 속상한 마음은 곧 사라질 거야.
아이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매일매일 학교생활 힘이 들지만, 익숙해지면 괜찮습니다. 잘 모르는 친구들 불편하더라도 인사하고 친해지면 금세 함께 뛰어놀며 깔깔 웃게 돼요. 익숙하고 편해질 때까지, 시간을 조금 주면 됩니다. 아이의 불편하고 힘든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알아주고, 인정해 주고, 그 후에 조금만 기다리면 됩니다. 아이가 스스로 자기의 마음 상태를 들여다보고, 그 상태와의 낯선 관계를 회복할 때까지요.
“아~ 선생님, 저 오늘 학교에서 진짜 짜증났어요!”
“어머, 정말? 많이 짜증났어? 왜 그랬는데?”
“아니, 제 옆에 앉은 애가 자꾸 저보고~ 블라블라 어쩌고저쩌고.”
몇 마디 짜증 난 마음을 토로한 아이는 그저 “아이고, 그랬어? 어머어머, 진짜로?” 추임새만으로도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마법같이 아주 금방요. 특별히 아이 편을 들어주지 않아도 함께 그 친구 흉을 봐주지 않아도 그렇습니다. 그저, 한껏 분한 마음을 털어놓고 나면 스스로 자신의 마음 상태를 깨닫습니다. ‘아, 이제 좀 속이 시원하네. 에이, 별 거 아니었네.’
눈꼬리가 다시 온순해지고,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오자마자 잘못도 없는 선생님한테 목소리 높여 짜증을 토해냈던 것이 조금은 미안하기도 한 봅니다. 이제야 우리 아이는 마음속 서랍에 오늘의 감정을 잘 갈무리해 넣고, 영어 공부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얼른 수업해야 하는 급한 마음을 뒤로하고 아이에게 잠시 틈을 허락한 나, ‘잘했다’ 싶은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