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하면 감히 '운명'이자 '신의 가호'가 아닐까(본문 中)
엄마 뱃속에서부터 억양 센 경상도 사투리를 들으며 세상에 나와
20년 가까이를 경상도 사나이로 살았다. 경상도 중에서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정기를 모두 빨아들였는지 '기 센 동네'로 자주 언급되는 곳에서 살았으니, 말투는 물론 그 정서까지 내게 스며든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18살 무렵, 나는 꿈을 하나 품게 됐다. 무려 '아나운서'...
맞다. 그 '뽄재이'(멋을 잘 내는 사람을 일컫는 영남 지역 사투리) 서울 사람들의 언어, 표준어를 정확히 쓰는 것은 물론 위트와 센스를 겸비한 번듯한 방송인.
이를 밝히자 주변 모두가 웃었다. '네가?'부터 '되면 장을 지진다'는 친구들끼리의 못되고 놀림 섞인 말까지 하며...
굴하지 않았다. 학교 야자(야간 자율학습)가 끝나면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심야 라디오, TV 진행 모습을 보며
따라 하고 홀로 예행연습을 했다.(아, 볼펜은 물지 않았다) 아나운서들이 모인 서울로 대학 가기 위해 공부하다 코피도 나름 쏟아가며 그렇게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다가서기 위해 달렸다.
그렇게 경상도 촌놈은 서울의 옛 청와대 근처 한 대학에 입학했다.
정말 신기하게 사투리를 퍽 고쳤다. 상경해 처음으로 만난 사람들 중 아주 예민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내가 경남 출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놀랠 정도였다.
'경상도 사람들 중에 사투리 억양 고친 사람 거의 못 봤는데. 특히 남자가...' 가장 듣기 좋았던 말이었다.
외양도 꽤 세련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아나운서라는 꿈에, 아니 그 꿈을 좇는 사람에 어울리게끔 모습을 갖춰 갔다. 수강료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아나운서 아카데미도 알바로 돈을 벌어 갚아 나가며 다녔다. 힘들지 않았다. 행복했다.
투박한 원석인 나의 일말의 가능성을 봐준 여러 고마운 사람들도 있었다. 방송 3사 카메라 테스트, 케이블 방송사 시험 몇 관문을 통과했다. 많은 이들이 모인 곳에서 마이크를 잡을 기회도 수없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감히 '계획된 운명'이자 '신의 가호'가 아닐까 한다. 사투리 고친 것부터 시작해 여러 기회와 성공까지.
현재 한 언론사 아나운서 겸 기자로 일하는 중이다.
시골 근성으로 연습해 더 단단해진 목소리와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며 더 반짝이는 눈빛. 그리고 사회 곳곳의 소식들을 알리기 위해 바삐 타자를 두드리는 손까지...
사투리 쓰던 경상도 촌놈은 그렇게 다듬어져 간다. 지난 세월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