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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낭송 Dec 30. 2023

체호프, 『드라마』를 읽고

독서 모임 시리즈: 체호프 단편




이 이야기는 무라슈키나라는 여인이 파벨 바실리치를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파벨 바실리치는 꽤 저명하지만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작가는 아니며, 무라슈키나는 장래의 작가를 꿈꾸지만 누군가로부터의 인정을 갈구하는, —그것도 자신이 흠모하던 작가에게 직접적으로 인정을 갈구하는— 계급적 여인이다.[당시 러시아의 귀족 사회는 불어를 배움으로써 프랑스 귀족 세계를 따라하는 과시적 성향을 보였다.] 이 이야기는 무라슈키나라는 여인이 파벨 바실리치를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한 편의 드라마이다.


그런 만큼 이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운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 이야기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희곡]이라면, 드라마 속에서 드라마를 읽는 일종의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 속에 등장하는 두 명의 인물은 모두 글을 쓰는 인물이다. 이 작품 속에서 대중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글만을 사랑하지만 강제로 대중이 되어 버린 작가와 갓 처음 글을 써보았으나 약간의 글에 대한 허영이 있는 아마추어 작가만이 등장한다. 그러니 결말은 당연스럽게 파국적으로 흘러간다. 작가에게 작가의 역할을 파괴해 버렸으니.


무라슈키나라는 여인이 쓴 작품 내부의 내용에서는 전형적인 드라마의 내용이 등장한다. 부유한 상인 대신 가난한 선생을 사랑하는 감정적인 여인, 이성과 논리로만 세상을 대했으나 사랑을 통해 감정을 깨달아 버린 남자.


드라마란 무엇인가? 드라마란 근본적으로 계몽주의적 산물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묘사하는 ‘드라마’라는 용어 자체가 일종의 합리와 감정을 뒤섞은 신—계몽주의적 성격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전까지 극play은 축제의 성격을 발현했다.] 무라슈키나라는 여인은 이러한 계몽주의적 작품을 자연스럽게 드러냈으나, 체호프가 살았던 시기에는 계몽주의의 흐름은 이미 구시대의 산물이 된 상태였다. 도리어 계몽주의의 흐름이 구시대적 산물이 되는 동시에 이 여인과 작가 파벨 바실리치가 가지는 특권주의적 성격을 부각하는 장치로 활용한다.


결국 이 작품은 극적으로 파벨 바실리치가 여인을 죽이는 것으로 끝이 난다. 황당하고 말이 되지 않는 흐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드라마적이다. 드라마 속에서 드라마를 읽는 여인과 드라마를 읽다가 작가를 죽이는 작가. 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코미디한 발상이란 말인가.


배심원들은 끝내 파벨 바실리치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다시 말해서, 체호프는 파벨 바실리치에게 무죄를 선고한다는 뜻이다. 도중에 파벨 바실리치가 본인의 의지대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견디면서” 희곡을 읽지 않았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살인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초기에 나쁜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견디지 못한 파벨 바실리치는 끝내 살인이라는 무거운 중죄를 달지만, 이마저도 무효화된 채로 끝이 난다.


작품 내 “그대는 지나치게 분석에만 열중하는군요. 그대는 너무 일찍 심장으로 사는 걸 그만두고 머리에 의지하는 것은 아닐까요?”라는 인용구를 보자. 이 작품의 결말은 심장으로 읽어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파벨 바실리치의 입장에서 얼마나 지루했을지 심장으로 대입하면서 읽으라는 뜻이다. 머리로 읽었을 경우, 향후 파벨 바실리치에게 무죄를 내린 배심원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책을 심장으로 읽었는가, 머리로 읽었는가? 






당신이 만일 파벨 바실리치의 배심원이 된다면, 과연 어떤 판결을 내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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