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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ED Nov 02. 2021

나의 첫 편지

나의 진부한 편지를 위하여

편지 ; 안부, 소식, 용무 따위를 적어 보내는 글.



 처음 제대로 장문의 편지를 써본 건 초등학교 5학년, 다가올 어버이날에 부모님께 드릴 편지를 써보라던 수업시간인 걸로 기억한다. 5학년 정도면 나름 고학년이라 머리도 좀 컸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깊이 있고 그럴싸한 편지 내용을 쓰고 싶었다.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같은 말만 적는 건 내가 갖고 있던 가족이라는 특별한 공동체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기에 너무도 평면적인 말이라고 생각해서 진부하지 않으면서도 진심이 느껴지게 쓰고 싶었다. 그렇지만 처음 장문의 편지를 써보던 내가 셰익스피어의 편지 같은 서사와 활자를 줄줄이 떠올리기엔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내 기준에서 첫 편지는 말 그대로 처참했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진부하고, 고루하고, 흔하고, 단조롭고, 반복적이고 형식적인 들 뿐이었다. 그렇기에 00 올림이라는 형식까지 다 갖추었고 마침표 하나 잃어버린 바 없었지만 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보다도 우선 당장 버리고 싶었다. 사실 고소장, 고발장, 결투신청 같은 게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수신자의 입장에선 받는 것만으로도 기쁜 마음으로 잘 보아줄 만한 내용의 편지였지만 난 굉장히 맘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엄마께, 아빠께 라고 운을 띄운 종이를 버리는 게 죄책감이 들어서 방에 두었다. 혹시라도 편지지처럼 보여서 눈에 띄면 부쳐지지 못한 편지라는 걸 알아보시곤 읽어보실까 봐 구겨서 방 한편에 먼지와 함께 묵혔다. 진부한 편지가 싫어서 그래서, 첫 편지는 발신인의 손에서 그쳤다.



 이를 계기로 어떻게 하면 더 진심을 담은 특별한 편지가 될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다. 편지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을 떠올려 보면 대개 따스하고 정성 어린 손편지를 떠올린다.

 따스한 마음을 담은 편지를 쓴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쉽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고 편지를 쓰려는 마음에서부터 편지는 시작된다. 그 사람과의 관계성과 추억, 하고 싶은 말 등 어떤 주제도 포용할 수 있는 백지 위에 오직 나와 수신인을 생각하며 그를 위한 글을 적어 내려가야 한다.

 우선 편지를 쓰기 전에 편지를 받는 입장이 되어보았다. 쓰는 시간 동안 온전히 나를 떠올리며 썼을 것이란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니 아무리 짧은 글 한 줄일지라도 나라는 수신자가 정해져 있는 한 의미는 다르게 다가왔다. 이게 편지라는 일대일 문학이 그 자체만으로 가질 수 있는 최대 장점이라고 느꼈다. 발신인과 수신인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너와 나, '우리'라는 프라이빗하고 특별한 관계성 부여된다. 이걸 잘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편지를 받고 싶은가?
진심이 담긴 편지? 진심은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경험 상, 감동을 느끼는 포인트는 생각보다 이 사람이 나에게 무척이나 관심이 많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이 포인트는 절대 한 순간에 얻어질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공 들이지 않으면 뻔한 내용밖에 쓸 수 없다. 다분히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을 유심히 뜯어본 다음, 드는 생각들 속에서 또 한 번 밀가루를 체 쳐 고운 가루를 내듯 쓰지 않을 내용은 솎아내어야 한다. 즉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더 우리의 의미 있는 편지가 탄생한다. (이 과정이 귀찮게 느껴진다면 그 사람에 대한 나의 마음이 거기까지인 거다.) 소재가 생각보다 사소해도 되는 건 당연하고, 상대에게서 빈번하게 드러나는 뻔한 소재여도 그 부분이 나에겐 특별하게 다가왔음을 표현한다면 진심이 담긴 편지가 될 수 있다. 한마디로, 그가 날 평소에 깊이 생각해본 적 있는지 알 수 있는 한 구절이 들어가도록 하면 된다. 구체적일수록 좋다.



 예시로는 평소 굉장히 밝은 이미지로 사람들과 두루 잘 지내는 친구에게 먼저 다가와주어 고맙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경우 나는 이렇게 적을 것이다.

'친해지고 싶었는데 먼저 다가와주어서 고마워.'라고 하는 대신에 다음과 같이.
'새 학기에 어중간한 뒷자리에 앉아서 애들이랑 친해질 틈이 없었는데 점심시간에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 난처했거든. 그때 먼저 같이 밥 먹자고 말 걸어줘서 너무 고마웠어. 네가 평소에 얼마나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고 챙기기 위해 노력하는지 그때부터 느꼈어. 네 덕분에 어색하지 않게 친구들과 친해진 것 같아.'

 이렇게 그와 나의 서사를 담아 얘기하면 구체적인 상황의 예시를 듦으로써 그때를 회상하게 되고 다시금 기분 좋은 기억으로 새겨줄 수 있다. 또한 형식적인 말 뿐이라는 생각도 없앨 수 있다.



 이럴 때 적절한 비유법까지 사용해 마음을 표현한다면 더 특별한 편지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 비스듬한 향, 각진 마음, 걸쇠 같은 손, 젖은 신문지 같은 발걸음, 우리 관계는 미지근한 물 같아, 네 목소리는 맑은 가을 하늘 같아 처럼 직유법이나 은유법을 써서 전혀 다른 심상을 가진 것들끼리의 조합으로 특별한 의미를 더해줄 수 있다.

 처음 알게 된 계기가 같은 길고양이를 번갈아가며 돌보다 어느 날 마주쳐 알게 된 인연이며 연인 상태라면,

너랑 나는 고양이 물그릇과 밥그릇 같은 사이야. 항상 함께하잖아.

라고도 표현해볼 수 있을 테다. 대신 비유법은 너무 많이 쓰진 않아야 한다. 비유로 계속해서 돌리고 돌려 말하는 건 외려 내용에의 집중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편지를 잘 쓰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 서사를 만들기

둘째, 특유한 표현법으로 의미 부여하기


 그렇게 나는 편지를 마무리지었다. 물론 손편지로 쓰는 게 가장 좋았다. 아무리 악필이더라도 알아볼 수 있게끔만이라도 정성 들여 쓴 성의가 보인다면 빼곡히 손으로 써 내려간 글자 위로 시선이 가로지르는 순간 인쇄된 활자보다 최소한 10배는 더 진심이 와닿을 것이다.



 어느 날, 내가 쓴 편지들을 습작처럼 쌓아두고 싶어졌다. 주고 나면 나는 다시 못 볼 내용이라 아쉬운 기분도 들고 무엇보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을 듣고 나면 나도 내 글을 다시 살피며 같은 감정을 느끼고도 싶었으니까. 어떤 날엔 가끔 편지를 쓰다 너무도 감정이 들어가 버려서 솔직해지다 못해 벌거벗겨진 기분이 든 적도 있었다. 그래도 어떤가. 진짜 벗은 것도 아니고. 내 속을 투명하게 내비치고 싶을 만큼 그만큼 좋아한다는 의미로 느껴질거야. 소중한 사람에게 소중한 편지를 쓰는 건 다른 말 할 것 없이 그냥 좋다는 말로도 충분한 것 같다. 많이들 쓰고 받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이 글을 적었다. 많이 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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