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앤 오프라는 프로그램에 이하이 님이 나와서 "렌즈에 도수가 없는 걸 좋아해요. 세상을 너무 깨끗하게 보는 게 별로 안 좋아요."라고 말하는 걸 보았다. 시력이 나빠 잘 안 보이는 게 갑갑할 뿐이지 좋을 건 또 뭔가 싶은 패널들의 반응이 이해되긴 하지만, 나는 뼛속 깊이 이하이 님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자막엔 '세상을 흐리게 보고 싶은...'이라고 나왔는데, 나도 그걸 바랐다.
지금 내 시력은 교정 전 양 쪽이 0.1 정도 된다. 중학교 때부터 점점 나빠지기 시작한 게 이렇게 굳었다. 뭐 때문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전자기기들과 너무도 친밀했기 때문이리라.
시력이 나빠짐과 동시에 사춘기가 찾아왔고 그때쯤엔 세상을 흐리게만 보고 싶어서 안경을 쓰지 않고 보는 뿌연 세상이 좋았다.
안경을 쓰지 않으면 멀리서 오는 누군가가 아는 사람 같아도(아니 아는 사람이어도) 시력이 나쁜 내가 안경을 쓰지 않았단 핑계로 모르는 척 지나쳐도 되는 게 좋아서. 시력이 나빠져서 좋았다. 눈을 맞추고 먼저 인사하는 것조차 버거웠던 사춘기였다. 사춘기는 각자의 인간관계론을 정립하기 시작하는 시기인지라 시행착오를 많이 겪고 잘은 일에 구석구석 스트레스도 받는다. 나도 그랬고 이런 맥락의 스트레스 중 하나로부터 외면할 수 있는 그럴듯한 변명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으로 이 핑계에 많이 의존했다. "내가 시력이 나빠서"라는 핑계를 꼭 말하고 다닌 건 아니어서 남들 눈엔 그냥 모른 체 지나치는 걸로 보였겠지만 내 마음속에 간직한 나름 합당하고도 죄책감을 덜 수 있는 핑계가 돼 주었다. 대신, 안타까운 점은 내가 나를 볼 때 조차도 흐리게 볼 수밖에 없었단 점이다.
안경을 쓰는 것은 내겐 어떠한 일의 시작을 의미했다. 안경을 챙기면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또렷이 봐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에 부딪혀야 한다는 뜻이다. 그게 힘겨운 일이든 즐거운 만남이든. 사춘기인 내겐 둘 다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좋든 싫든 전부 바깥 '일'이었다.
모든 게 일이었던 그때로 잘근잘근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봤는데, 나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를 쳐다보지 않더라도 그저 남의 시선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부담스러운 그때의 나여서 집 밖에선 그 무엇을 하더라도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버거워서 그 한복판에 서야 할 때면 나만의 현실 도피 도구로써 어느 정도 시각이 차단된 상태를 누렸다. 그럴 때면 세상과 분리되어, 내가 (사회적 역할로써의) '나'가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뵈는 게 없자 온전히 '나'일 수도 있는 순간이다.
짱구 만화에 보면 캐릭터 중에 안경을 꼈을 땐 매사에 불안하고 눈치를 보는 떡잎 유치원 선생님이 있다. 이 캐릭터는 안경을 벗기는 순간부턴 평소처럼 눈치를 보려 해도 보이는 게 없어서 숨겨왔던 할 말은 곧이곧대로 하고 오히려 터프하단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말이나 행동이 과감해진다. 안경을 다시 쓰면 급작스럽게 다시 소심 해지는 모습인데, 만화적 비약이 있겠지만 전혀 과하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럼 안경을 쓰거나 벗은 것 중 어떤 게 진짜 성격인가?라고 여러분에게 묻는다면 대부분 당연하단 듯이 안경을 벗은 상태라고 대답할 것이다. 안경을 벗어야 보이지 않아서 눈치를 보지 않고 그때서야 진정한 선생님의 '나'가 나온다고 그 장면을 읽어낸 것이다.
결론을 내보자면,
또렷이 잘 보고 싶은 것보다 흐릿한 채로 덜 보거나/보이고 싶은 게 더 많았기 때문은 아닐까? 시력이 나빠야만 겪을 수 있는 시야와 그 나름의 낭만을 즐기기도 했던 게 생각나서 열어두고자 결론을 물음표로 마친다.
다행히도 앞의 생각은 졸업하면서부터 점점 바뀌었다. 스무 살이 넘어가고, 뿌옇게 블러 처리해서 필터링된 혹은 그나마 미화된 보고 싶지 않은 것들보다 또렷한 화질로 선명히 눈에 담고 싶은 것들이 내게 더 많아졌다. 지금은 꼭 안경을 쓴다. 선명하게 보려 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선명해지길 바라면서.
뿌옇게만 보고 싶던 마음과 선명하게 보고 싶은 지금의 마음. 어떤 차이일까, 지금은 분명하게 바라보고 가고 싶은 곳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