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우리 꼭 약속!
졸려도 잘 수 없고 기뻐도 웃을 수 없고 슬퍼도 울 수 없는 날들이 많았다. 의지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삶은 보고만 있을 뿐 잡을 수도 없었다. 나는 나의 쓸모에 대해 가끔 생각했다. 표정 하나 마음대로 지을 수 없는, 입가가 바느질된 봉제인형 같았다.
현재감은 모자랐고 내일은 항상 미지수. 무엇을 해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마음 깊은 곳이 시리기도 했다. 2마일 전력질주의 열기로도 차가운 볼은 데워지지 않았다. 꺼지고 남은 구공탄 같은 검회색의 온도. 여전히 나는 쉽게 지친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있으면 내가 나를 사랑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명랑한 글을 다시 쓸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존재해야 마땅한 낭만들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운명적 사랑과 타오르는 붉은빛 일몰 중 무엇이 더 아름답냐는 거리로 밤새 떠들기만을 기다렸다.
저물녘 어둑어둑 해가 질 때에도 붉은 기가 남는 날이 있듯이, 어스름 가득한 날에도 빨간 홍조 띄울 수 있는 날이 올 테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가을이 늦여름 사이에서 꼬리 치는 요즘, 나는 밤이 마냥 무섭지만은 않다. 여전히 겁이 많지만 쌀쌀해지는 날씨를 병풍 삼으려 애써본다.
한 번 놓치면 쉽게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 세상에는 딱 세 가지 있다. 시절 인연, 제철과일, 그리고 입맛. 알면서도 늘 놓친다. 마지막처럼 사랑하자. 이 계절의 온도를 즐기자. 나를 위한 근사한 식사를 하자. 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어렵고 앞으로도 어려울 참이다. 아직 여름에 있다.
떠나보내는 모든 인연이 늘 처음처럼 아프다. 지금의 나이로 평생 살고 싶다. 하기 싫은 일은 끝까지 하기 싫다. 언제든 발걸음을 돌려 여행을 떠날 거다. 나에게 험하게 구는 사람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과거를 보다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여전히 좋아하는 노래 한 소절이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삼키듯 말하는 버릇은 버리고 토해내듯 소리치려고 한다. 나무처럼 오는 바람에 흔들리지도 않으련다. 부서지는 파도처럼 시원하게 돌진해야지. 그러니 가을이 성큼 다가오면 꼭 크게 소리 지르겠다. 혹시 내가 울어도 당황하지 말길 바란다. 사실 난 웃고 있는 것일 테니까.
그러니까 우리 꼭 약속! 울어도 웃자. 웃으면서 울자. 어리광 좀 부려보자. 답답한 건 질색이니까 참지 말고 뱉자. 무서우면 손 잡고 가자. 추우면 붙어 지내자. 심심치 않게 안부도 묻자. 깨작깨작 말고 크게 한바탕 하자. 내일 지구가 멸망하면 우리 사과나무 다 뽑으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