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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호 Nov 16. 2021

칠하는 족족 번지는 오늘을

유리어항을 들이기로 했다


 아주 예전에 미술을 배운 적이 있다. 명에도 없는 비싼 물감을 사다가는 며칠을 말린 뒤에야 겨우 써볼 수 있었는데, 나는 색을 뚜렷하게 칠하는 법을 몰랐거니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밑그림에 맞춰 정해진 색을 칠하는 것보다는 흑연과 물감들이 경계를 잃고 넘나드는 풍경을 좋아했다. 도화지가 울면 오히려 좋은 작품이라며 좋아했다. 그런 때에만 얻어지는 미감이 있었다. 물론 남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그렸어? 선에 꼭꼭 맞춰 그려야지.


 나는 내가 현재에 있다고 느끼는 감정을 현재감이라 부른다. 운명을 마주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귀가 먹먹해지면서 내가 보고 있는 것만 보게 되는 일. 운명의 종소리를 듣는 때. 나는 삶이 무료하다는 말 대신 나에게 더 적절한 말을 찾았다. 그러니까 요즈음 나는 현재감이 모자라다.


 청명한 소리를 내며 풍등이 울린다. 강아지가 움직이며 풍등을 건드릴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는 바람이 내는 소리에는 없는 쨍함이 있기도 했다. 다급한 삶을 몽롱하게 만들어주는 존재들이 있다. 풍등 소리라던가, 가을비라던가, 수족관이라던가 하는 것들. 대청마루에 앉아 담 너머의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추측해보는 상황. 삶을 그렇게 멀리서 볼 수 있게 되는 때이다. 몽롱할 때에는 항상 현재감이 가득해진다.


 잠이 많아지자 꿈들이 수채화처럼 현실의 경계를 넘나 든다. 어제 받은 전화가 진짜 받은 전화였는지 혹은 꿈이었는지 종종 분간하기 힘들 때가 생긴다. 마음들도 괜히 동한다. 경계가 확실한 삶을 살아야 해. 번지지 않는 삶이 아름다워. 사랑이 찾아오면 나도 바뀌는 거야. 그런 말들이 너무 떠올라서 나는 탕, 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장난감 총으로 쏴 깨버리고 싶은 마음들.

 

 작은 유리어항을 하나 놓아두면 고양이들은 밤새 어항만 쳐다본다고들 한다. 그 고양이들도 어쩌면 현재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다른 야옹, 야옹, 하는 소리는 신경도 쓰지 않겠지. 졸린 눈을 떠가면서라도 현재를 느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어항 앞의 고양이가 될 수 있다.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 하루들이 야속하다. 그래도 아직은 물기가 가득하다는 반증 정도이려나. 뚜렷하게 순간을 느끼기에는 나는 아직 서투르다. 칠하는 족족 번지는 오늘이 미워 어찌할까 하다, 새 어항이나 하나 들일까 했다. 장난감 총이나 장만할까 했다. 선에 꼭꼭 맞춰 칠하는 법은 배우기 싫으니, 그냥 고양이처럼 살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어항에는 번진 오늘들을 하늘하늘 띄우기로 다짐했다. 장난감 총으로 어제들을 쏴버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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