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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화강고래 Aug 08. 2024

안방 말고 내 방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193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다.

 

대학교 신입생시절, 멋도 모르고 페미니즘 수업을 들었다. 지극히 단순하게 말하면, 여성이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충분한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초, 경제적 정신적 독립을 통해 온전히 한 개인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엄마세대와는 다르게 남녀 차별 없이 대학교까지 입성한 나는 당시로서는 도발적이었을 그녀의 주장을 차곡차곡 새겨듣지 못하고 슬쩍 지나쳤다. 사실 학창 시절보다 나이가 들면서 그녀의 주장이 귓가에 자주 맴돈다. 특히 "자기만의 방"이라는 말이.


우리 삼 남매에게 각자 방이 생긴 건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월세, 전세살이를 10년 넘게 하시던 부모님은 생애최초로 집주인이 되셨다. 엄마가 흘린 감격의 눈물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로 은평구의 우리 집은 처음이자 마지막 해피하우스가 되었다. 1층 주택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2층집으로 다시 지으셨다. 1층에는 할머니방과 안방이, 2층에는 우리 삼 남매방이 마련되었다. 그중에서 내 방이 제일 컸다. 맏딸의 특권을 받아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에 침대, 책상, 장롱을 넣었다. 할머니와 동생과 함께 쓰던 방을 혼자 쓴다는 건, 대단히 놀라운 설레는 경험이었다. 그때 처음 느꼈다. 내 방이 있다는 게 이런 거구나!라고.


결혼 후 방 세 개짜리 아파트에서 내 방을 만들었다. 현관문 옆, 남편이 옷방으로 쓰던 방이었다. 거창한 인테리어로 꾸민 방이 아닌 그저 행거를 한쪽으로 치우고 조립식 책상과 핑크색 듀오백의자를 산 게 전부다. 조용하게 쉬는 내 방으로 마련해 두고 주로 책을 읽었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 내 방에 아이들 옷을 담는 서랍장을 하나 더 세워 좁아졌다. 그래도 여전히 내 방이란 공간에서 퇴근 후 일을 해야 할 때면 방해받지 않기 위해 방문을 잠그고 급히 일을 처리하곤 했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내 방이 사라졌다. 4인가족이 사는 집이라면 보통 그럴 것이다. 지금 사는 아파트에 입주하면서도 여전히 남편은 자기 방을 고수했다. 안방, 아들방, 남편방. 방 세 개는 이렇게 찼고, 거실 한편에 내 책상을 두었다. 번역을 본격적으로 해 보겠다고 노트북과 모니터를 사서 작업데스크처럼 꾸몄다. 책상은 있지만 거실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온전히 집중하기는 쉽지 않았다. 두가 잠든 한밤중이 되어서야 홀로 있었다.


딸의 초등학교 입학후 할 수 없이 딸에게 방을 내준 남편은 안방 드레스룸을 자기 방으로 만들었다. 드레스룸 선반을 철거하고 나니 작은 책상 하나와 책장이 들어갈 만큼의 공간이 나왔다. 다행히 창문까지 있어 작지만 아늑한 공간이 완성되었다. 곳에서 일도 하고 음악도 들으면서 항상 뒷모습을 보이며 앉아있다. 


가끔은 내 방이 필요하다. 엄마도 엄마의 공간이 필요하다. 엄마 사람이니까. 식구들 없을 때 혼자 있는데 왜 방이 필요하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혼자 있는 것과 자기 방에 들어가 있는 건 엄연히 다르다. 가족이 한 집에 다 같이 있지만 각자 방에 콕 박혀있을 때 나도 내 몸을 집어넣을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엄마방은 없고 안방이 있으니 현실적으로 안방을 내 방으로 받아들이면 될 텐데 그게 잘 안된다. 안방은 부부가 공유하는 방이라 내 방이라는 느낌이 없다. 드레스룸이 바로 옆에 있어 남편과 공간분리라는 게 사실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창하게 페미니스트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아도 이름 없는 전업주부의 일상을 살면 가끔 무력감 고개를 들고 나를 흔든다. 초라해진 나를 보면서 내 방이 필요하다는 외침이 들린다. 독립된 방을 소유한다는 게 이름 석자를 내세울 수 있는 힘 같이 느껴진다. 여성 작가가 아니라도 그냥 여자사람으로서 경제력이 갖춰진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당장 해결방법이 없어 또 한 번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럼에도 내 방의 필요성을 잊지 않고 느리더라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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