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다. 언제였던가. 생각해 보니 엄마가 아침마다 사과를 깎아주던 그 철없던 시절 이후 처음이다. 10여 년 만에 엄마가 아닌 누군가가 깎아주는 사과를 맛봤다. 뜻밖의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서.
엄마같이 느껴진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노란 황금사과가 그 손에서, 내 손에서 빛났다. 아삭아삭하면서도 새콤한 즙이 가득한 사과를 베어 입안에서 씹으며 나도 모르게 뭉클해졌다. 그냥 사과일 뿐인데, 엄마가 보였다. 받은 게 참 많은 사람이구나, 특히 먹을 것만 보면 고마운 게 천지인 사람이구나. 난 왜 이럴까.
두 달에 한번 찾아가는 가발집에 커피를 자주 사갔다. 오전 시간에 커피를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게 좋아 습관처럼 돼버렸는데, 이번에는 평소보다 늦게 방문했다.
커피 대신 건너편 빵집이 보여 간식거리를 사들었다. 뭔가 나눠먹고 싶었다. 염색약을 바르고 앉아 우리만의 간식타임을 가졌다. 견과가 든 담백한 호밀빵을 나눠먹으며 요즘 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게 테이블에 책 한가득 꽂아놓고 독서를 하시는 분답게 한강 작가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고 우리 둘 다 <채식주의자>에서 멈췄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전작보다 더 주목받은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어봐야 한다고 말하며 웃었다. 국내 베스트셀러와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어떻게 다른지 우리가 아는 얄팍한 지식 범위내서 주가니 받거니 하다가 마무리지었다. 빵을 먹으며 무심코 던진 "허기진다"는 내 말에 얼른 사과를 꺼내오셨다.
황금사과인 시나노골드였다. 처음 본 것도 아니요, 처음 맛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앞에서 직접 깎아 준 사과여서 달랐다.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했다. 아침마다 엄마가 그랬듯, 나도 사과를 깎는다. 남편도 주고 나도 먹는다. 그렇게 깎아주는 건 먹지만, 남편은 태어나 한 번도 과일을 깎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결혼 전에는 우리 엄마처럼 자식밖에 모르는 어머니가 과일을 깎아주셨고, 결혼 후에는 내가 어머니에게 바통을 넘겨받았다. 농담으로라도 죽기 전에 남편이 깎아준 사과를 먹고 싶다고 말해도 그저 웃기만 한다. 받아먹다가 주기만 하는 사람이 되다 보니, 가끔은 엉성하게라도 깎아준 과일을 먹어보고 싶다. 항상 줄 수 있는 것도 기쁨이지만, 소소하게 미소 짓게 만드는 받는 자의 행복도 바라는 보통 사람인데 그걸 몰라준다.
사장님은 사과 두 개를 덤으로 챙겨주셨다. 자그만 빵 한 덩어리가 황금사과 세 개로 변신했다. 동화에서나 있음직한 행복한 결말로 이야기는 끝났다.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그 나눔이 더 큰 나눔으로 돌아오다니. 나보다 한참 어린 딸을 키우는 엄마라서 그랬을까. 캐나다에 사는 딸들 이야기를 하시며 곁에 두고 살지 못하는 그리움을 슬며시 비추기도 하셨다. 12월에는 어떤 것을 챙겨갈까? 벌써부터 먹거리 생각에 즐거웠다. 바깥은 쌀쌀했지만 안은 훈훈했다. 마법 사과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 그날 저녁 가족들과 나눠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