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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화강고래 Nov 03. 2024

아빠, 미안했어.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238

아빠, 부칠 수 없는 편지라도 써 볼 작정이야. 보고 싶어. 해마다 가을이 되면 유독 보고 싶어. 꿈에도 안 보이고, 안 보이는 게 좋은 거라고는 하지만 가끔은 얼굴이라도 스쳐 지나가면 좋으련만. 꿈에서조차 만날 수가 없네. 이상하게, 아빠가 세상을 떠난 때는 여름의 시작이라 가을과 상관없는데 꼭 단풍철이 되면 아빠가 더욱 생각나. 2024년 11월이 시작되었지만 더위로 늦깎이 단풍이 든 거리의 가로수를 바라보다 12년 전 일기장에 쓴 글이 생각났어.


2012년 10월 말, 그러니까 아빠가 떠나고 4개월 후 가평에 바람 쐬러 갔었어. 둘째는 태어나기 전이라 셋이갔어. 새빨간 단풍잎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했어. 


"너무도 빨게, 불이 붙은 듯한 단풍잎, 올해 다사다난했던 힘든 2012년도 얼마 남지 않았네. 자연은 올해도 어김없이 결실을 맺고 있는데 난... 어떤 결실을 맺기 위해 살고 있는 걸까? 눈부신 가을의 아름다움에 서러움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시간은 누구도 어떤 이야기도 기다려주지 않고 제 갈길만을 가며 기쁨도 슬픔도 그 시간 속에 묻어갈 뿐이다."


맏딸로 때어나 받기만 했는데 허무하게 떠나게 했어. 삼 남매 중 마지막으로 결혼하고, 엄마가 둘째네 산후조리하러 미국 가서 한 달 동안 집을 비운사이 아빠를 챙기지 못해서 미안했어. 직장생활에 곧이은 임신으로 용인에서 서울로 자주 가보지 못했지. 엄마가 쓰러지고 또 아빠홀로 남겨졌을 때도 같은 핑계를 대며 혼자 쓸쓸하게 끼니를 때우게 해서 지금도 마음이 아파.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서 아빠가 가장 힘들었을 텐데도 그땐, 아픈 엄마만 보였나 봐. 


아빠, 애들이 커가면서 더 생각나. "부모가 돼야 부모 속을 안다"라고 하는 그 말이 다 맞아. 아빠가 가장으로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해가 갈수록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야. 큰 애가 벌써 중학생이 되었어. 중학교 1학년 아이를 앞에 두고 아빠 사위가 자주 학업에 대해 이야기해 줘. 큰 그림을 보고 공부를 하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는데 얼마 전에는 우리 집의 경제력과 학교를 주제로 이야기를 했어. 영재학교, 과학고, 외국어고, 국제고, 자사고 같은 특목고와 일반고를 준비비용과 학비 측면에서 설명했어. 그는 아빠와 달라. 현실적이야. 우리 집 형편상 일반고에 가서 1등급 받게 공부해서 대학가야 한다고 논리적으로 이야기했어. 그 말을 듣자 한편으로는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어. 혹시라도 공부욕심이 생겨 비싼 학교에 가고 싶다 해도 보낼 수 없는 상황이라 미리 미안했으니까.


아빠는 아무런 내색 없이 내가 하고 싶은데로 다 시켜줬잖아. 외고에, 재수에, 연수에, 유학까지. 그래서 참 부끄러워. 요새는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가성비를 따져. 인풋대비 금전적 보상이 얼마가 되는지 데이터를 통해 시뮬레이션해 보고 직업을 선택하는 것 같아. 현실적이며 결과 중심적이야. 살기가 팍팍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도 같아. 철없이, 흔히 말하는 가성비 없이 살아서 미안해. 아빠의 전폭적인 지지로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았지만 가시적인 결과물이 없으니. 뭐라도 됐으면 죄스럽지 않을 텐데. 아빠가 힘들 때도, 지금 엄마가 힘들어도 경제적 도움이 못 되는 딸이라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 학원수강 없이도 4년제 대학 나와 밥벌이하는 남편과 공부는 못해 속을 썩였어도 직장 다니는 시누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시댁식구들을 볼 때마다 아빠 얼굴이 떠올랐어. 그들보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를 잘해 기쁨을 주었어도 한때일 뿐 현재는 의미 없다고 느껴질 때도 많거든. 당시에는 나름대로 과정을 즐기며 다채로운 경험에 스스로는 성장했다고 자부했지만 눈에 보이는 건 앙상한 가지뿐이라 처량해지기도 해. 결과만 놓고 보면 그래. 아이들이 크고 내가 늙어갈수록 아빠가 대단했고, 고마웠다고, 미안했다고 여기에 남기고 싶었어. 부모 속을 대놓고 썩이지는 않았어도 사회적 성공으로 측정한다면 좋은 점수는 못 받는 딸이 돼서 미안해. 아직은 살아있으니 죽는 날까지 아빠를 부끄럽게 만드는 딸로는 살지 않을게. 그리고 노력할게. 



부모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고, 부모가 돼서야 그 마음을, 그 무게를 조금씩 알아가며 사는 게 인생인가 봅니다.

고마웠어요. 사랑합니다. 



깊어가는 가을에 아빠에게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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