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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화강고래 Nov 28. 2024

눈폭탄 맞은 다음날 우리는.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252

어제 내린 눈으로 아침이 흔들렸다. 눈을 뜬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신경이 예민해졌다. 세상을 덮은 포근해 보이는 눈은 착각이었던가, 눈폭탄 맞은 듯 허둥지둥 정신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무력한 인간만 보였다. 톡과 알림으로 촘촘하게, 초침과 분침으로 연결된 세상에 살고 있음을 제대로 실감했다.


아파트 주차장을 벗어나는데도 힘들다, 집 앞 대로에 진입하기 위해 30분간 멈춰서 있는 중이다는 얘기로 단톡방 알람은 소리 없이, 끊임없이 울려댔다. 한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봐도 꽉 막힌 주차장이 따로 없었다. 이런 날은 결근하면 좋겠지만 가야 한다고 집을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에 내 걱정은 척 달붙었다.


7시가 넘자, 아이들 학교에서 안내문자가 하나둘씩 날아왔다. 초등학교 등교 간이 한 시간 늦춰졌다. 눈을 비비며 나온 딸은 포근 이불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들 학교는 지각처리를 하지 않겠다는 알림을 보내왔다. 시누는 남편의 출근여부를 묻고 걱정했다. 덤으로 근처 중고등학교 휴교처리 상황까지 알려줬다. 아들학교만 등교한다는 상황에서 잠시 생각 중이었다. 방에서 나온 아들은 톡으로 주변 학교 친구들이 휴교 사실을 자랑했다고 하면서 자기네 교만 간다고 투덜거렸다. 자기도 쉬겠다며 안 가겠다는 선언을 했다. 어찌해야 하나 싶었지만 다행히 뒤늦게나마 휴교안내 문자가 나를 살렸다. 안 가겠다던 투정이 물러가고 친절한 오빠의 걱정 가면을 쓴 듯 아들은 혼자 등교하게 된 딸아이 앞에서 너스레를 떨었다. 8시가 넘자 딸아이 학교의 휴교 문자까지 전달되었다. 눈 덕분에 둘은 꿀 같은 휴식을 맞이했다.


남편의 전화목소리에 안심하며 나도 모르게 걱정 섞인 잔소리가 찔끔 나왔다. 

"왜, 이런 날 나가서 고생해? 식구들 모두 걱정하잖아!"

가야 했다는 말에 가장의 무게 고스란히 전달되며 괜스레 울컥했다. 뉴스기사에서 본 출근길 고생 이야기에 마음이 짠했다. 시어머니, 시누 그리고 엄마에게 남편의 무사출근소식을 전했다. 남동생의 안부를 묻고 엄마도 안심시켰다.


눈이 온 건데.

전쟁이라도 나면 어떨까?

우리가 살 수 있을까? 난리다 난리!


아이들은 좋다고 각자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였어도 그랬을 것 같았다. 혼자 밖에 있는 남편이 저녁때 돌아올 길이 미리부터 길고 느리게 보이는 듯했다. 엄마이며 아내인 나는 중심을  잃고 아침부터 체력이 반은 소모되었다.



이때 천장에서는 드릴 소리가 머리를 울릴 정도로 윙윙거렸다. 어디선가 공사를 시작했나? 게시판에 붙은 걸 봤나? 정신이 산란하니 평소와 다르게 가만히 참지 않고 관리사무소에 물었다. 욕실 인테리어 공사 중이라는 말이 되돌아왔다. 하필 오늘이란 말인가, 그쪽도 사정이 있겠지. 어쩔 수 없는 날이었다.


점심은 무엇으로 주나? 그 순간, 밥솥에 손도 안된 8인분용 쌀밥이 생각났다. 딸아이네 반에서 초밥을 만든다고 7시 반에 해 놓은 밥이다.


김밥, 너로 정했다. 휘뚜루마뚜루 김밥을 싸기로 했다. 밥은 준비되어 있으니 돼지고기 앞다리로 제육볶음을 해서 제육김밥을 싸기로 마음먹고 집 앞 슈퍼로 나갔다. 눈 속에 배달 대신 슈퍼를 찾은 주민들이 꽤 있었다. 


간장, 마늘, 고추장, 고춧가루, 파, 신김치를 고기와 같이 볶았다. 설탕 없이도 김치양념 덕분인지 매콤한 제육이 완성되었다. 단무지대신 오이를 넣었다. 딸아이가 옆에서 돕겠다고 칼질을 하며 오이를 썰어줬다. 계란을 부치고 치즈 넣고 꾹꾹 넣어서 말았다. 딸아이도 자기가 먹을 김밥을 두줄 말고는 서로 입에 넣어주며 맛있네, 맛있어를 주고받았다. 매콤하게 코팅된 김밥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뒤늦게 나온 아들도 눈 감추듯 후딱 먹어치웠다. 여섯 줄이 금세 사라졌다. 



이렇게 힘이 되는 음식이라니, 이렇게 자주 일상의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음식이 될 줄이야. 무궁무진한 스토리를 풀어내는 마법 같은 엄마표 음식이 되어 내 솜씨 없는 음식 이야기의 대명사가 될 것 같았다.


덕분에 처리가 곤란하던 흰쌀밥을 거의 다 소진시켰다.

매콤한 단백질을 입에 넣은 덕분에 정신도 배도 채웠다. 점심을 먹이고 나니 할 일을 다 한 느낌이었다. 여전히 천장 위에서 소음은 울려대고 애들은 게임에 몰입 중이었지만 잠시라도 신경을 껐다. 날카롭던 내 마음 끝이 사그라들었다. 


눈오리를 만들고 싶다는 딸아이의 손에 이끌려 나갔다. 모처럼 학교가 아닌 집에 있는 아이들은 썰매 타느라 바빴고, 관리사무소직원분들은 제설기를 이용해 눈을 치우느라 바빴다. 바깥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바쁜 사람, 쉬는 사람 모두 제각기 자신의 몫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폭설 맞은 다음날은 알아서 또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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