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며 한낮인데도 차디찬 바람에 얼굴이 시렸다. 장갑을 낀 손이 찰 만큼 매서웠다. 아이들에게 내복을 사줄까 싶어 근처 대형마트에 들렀다. 내복코너라고 하기에는 초라할 정도로 성인용과 아동용 내복상하세트가 진열대에 놓여 있었다. 이것뿐인가 싶었다. 잠시 쳐다보고 있는데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가 들렸다.
"요새 누가 내복을 입어요?"
"난 항상 입는데. 내복을 입어야 따뜻하지."
뒤돌아보니 모녀로 보이는 할머니와 딸이었다. 나처럼 지나가는 아줌마도 내복을 안 입기는 마찬가지인가 싶었다. 그런데 강추위가 온다는 예보만 들리면 내복? 조건반사처럼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만큼 월동준비 필수품으로 비중 있는 물건이었다. 추운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는 마법슈트처럼 입어야 하는 옷임에는 틀림없었다.
겨울이면 내복을 입어야 하는 줄 알았다. 주택에 살면서 단열이 잘 안 되어 웃풍이 심했던 시절, 엄마는 해마다 내복을 준비해 주셨고, 잘 입었다. 건설업 특성상 외부 활동이 많았던 아빠도 다른 건 몰라도 내복은 꼭 챙겨 입으셨다. 퇴근 후 내복바람으로 집안을 돌아다니시던 아빠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다 큰 어른이 내복을 입으면 은근히 피식 웃음이 나게 귀여웠다. 지금은 남편만 내복을 입는다. 아빠를 자주 떠올리게 할 정도로 겨울이면 내복을 챙겨 입는다. 에너지 절약을 실천하는 공공기관에서 근무한 특성이 몸에 밴 탓인지 내복 사랑이 유별나다. 유치원 때까지는 아이들도 내복 겸 실내복을 입었지만 더 이상 안 입는다.
집안과 건물 안이 난방이 잘 되니 내복을 굳이 안 챙겨 입는다. 외출할 때만, 그것도 꼭 필요하다 싶을 때 내복 대체품으로 몸을 따뜻하게 한다. 기모바지를 입고 그래도 추우면 레깅스를 입는다. 아이들도 기모 바지를 입고 옷을 겹쳐 입으면서 크게 추위를 안 탄다. 춥다는 말에 아이들 내복을 사러 나왔지만 손에 든 건 발열 내의라고 쓰인 단품 하의였다. 얇고 검은색 레깅스 같아서 내복처럼 보이지 않았다. 중학생 아들 것은 물론이고, 초등 고학년인 딸아이도 이제는 캐릭터가 그려진 내복을 거절하니 똑같은 것으로 하나 샀다.
따지고 보니 우리 집 아이들도, 젊은 층도 내복을 입긴 한다. 히트텍이라는 이름의 발열내의. 무채색이라 예전 알록달록한 엄마 내복의 이미지는 없지만 얇은 실내복 같은 웜세트는 유니클로나 다이소 같은 곳에서 잘 팔린다고 한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옷을 겹쳐 입게 되었고 가장 안쪽에 입었던 옷이 내복이었다는데 60년대 이후부터 내복이라는 방한용품을 따로 애정하게 되었다. 내복을 입으면 찬바람을 막아주고 밖으로 나가는 체온의 열을 보존시켜 면역력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두꺼운 겉옷보다 얇지만 든든한 내복을 입는 게 건강에는 좋다며 겨울철 내복 착용 효과를 강조한다. "내복"의 존재 이유는 변함없지만 디자인과 재질은 세대에 따라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빨간 내복과 두툼한 보온메리는 이제 추억 속에서나 존재하는 내복처럼 느껴졌다. 또 한 가지, 이 짧은 글을 쓰면서 알게 된 사실. 옷을 입고 산책 다니는 반려견을 보긴 했지만 반려견 내복이 있으며 인기라는 기사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알고 보면, 다들 자기 방식대로 내복을 챙겨 입으며 추운 겨울을 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