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같은 크리스마스가 지났다. '뭐 대단한 날이라고, 별 탈 없이 하루 잘 쉬었으면 됐지.' 하면서도 여전히 마음속 크리스마스 감성은 꺼질 듯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미약하게 남아 있었다. 결혼 전 캐럴을 들으며 거리를 걷던 그 설렘만은 여전하기에 익숙해질 법도 한 혼자 꿈꾸는 겨울 낭만은 올해도 변함없이 나를 슬프게 했다. 같이 사는 두 남자들은 감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지만 그나마 딸이 있어 천만다행이다. 이럴 때 또 딸에게 감사하는 엄마의 몸짓이 나온다.
외식도 귀찮다고 해서 케이크와 딸기로 "오늘이 크리스마스야."라고 분위기만 살짝 띄웠다. 관심 없이 먹기만 하는 두 남자를 향해 눈치 없다 핀잔주던 딸이 한마디 던졌다.
"올해도 솔크네!"
"솔크?"
"솔로 크리스마스요!"
케이크만 보던 두 남자의 눈이 딸을 동시에 쳐다보자 불씨가 확 타오른 듯, 고요한 식탁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그럼, 사귀는 친구들이 많아?"
나도 모르게 하나하나 묻기 시작했다. 초등학생들도 많이들 사귄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얘기를 안 해 그동안 관심 없는 줄로 착각했다. 같은 반이나 다른 반 친구와 사귀는 친구들이 꽤 있다는 이야기에 신기했다. 며칠 전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고백하다 차였다는 다른 반 남자아이의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니 재밌게 들었다.
"너도 좋아하는 애 있어? 고백해 봤어?"
"아뇨, 아뇨. 마음속에만 있는데 자주 바뀌어요. 요새는 사랑이야기가 재미있어요."
"그럴 때지. 커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나도 예전에 드라마 많이 보고 소설책 많이 읽었어."
내 앞에 앉은 작기만 한 딸아이가 어느덧 커서 솔로네, 어쩌네 하는 얘기를 하니 나도 모르게 히죽히죽 웃음이 났다. 옆에서 남편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넌 좋아하는 친구 없어? 예쁜 친구들도 있을 텐데."
"없어요."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들에게 물어본 우리가 잘못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누가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남녀칠세부동석을 실천하고 있는 아들이다. 같은 반 여자친구들과는 학급활동 때를 제외하고는 좀처럼 이야기도 하지 않고 지내고 있다.
딸의 남자친구가 궁금하다. 아직은 오지 않은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구나, 거스를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에 벌써부터 살짝 설레었다. 솔직히 걱정도 앞섰다. 건전하게 학업에 방해되지 않게 사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엄마니까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귀는 자녀 때문에 골치 아프다는 하소연, 남들은 다 사귀는데 모태솔로라 안타깝다는 얘기, 일찍 사귀는 경험을 해야 좋다는 얘기 등등 청소년 자녀를 키우는 엄마들은 학업만큼이나 이성교제에 꽤나 신경을 곤두세운다. 분명한 건, 우리 세대에 비해 요즘 아이들은 이성교제에 개방적이다. 숨어서 만나지 않고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학교에서도 거리낌이 없이 손잡고 허리에 손을 두르고 다닌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로 끝이 났지만 겨울이면 특히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주제로 한 이야기가 역시 최고다. 기억에 남는 첫사랑이든 마지막 사랑이든 "사랑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진다. 딸의 "솔크"라는 그 단어에 모두가 집중하며 잠시라도 함께 이성교제에 대해 입을 뗐다. 앞으로도 자주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부탁으로 마무리지었다.
나처럼 연애세포를 활성화시키지 못한 사람으로 살지 않기를 바란다. 마음속으로만 혼자 좋아하고 누군가 나를 좋아해도 몰랐던 그런 나처럼 살지 않길 바란다. 어디선가 잘 자라고 있을 딸의 남자 친구가 궁금하다. 물론, 아들의 여자 친구는 더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