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의자하나 샀을 뿐인데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351

by 태화강고래

1년이 넘게 팔걸이가 부러지고, 등받이 반쪽이 돌아가는 의자에 앉았다. 하루 종일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게 아니라 그럭저럭 쓸 만해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돈도 돈이지만 결혼 후 "내 방"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사용했던 의자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듀오백 핑크색 의자. 아이 둘을 낳고 나만의 방이 사라진 이후에도, 책상을 버린 이후에도 의자는 곁에 남았다. 거실에 공용 책상을 놓고 나서 짝꿍으로 다시 복귀했다. 무리 없이 잘 썼다. 점차 망가지며 온전하지 않아 미관상 별로였지만 그래도 쓸 만했다. 언젠가 새 의자를 들여놓겠지라며.


몇 주전 중간고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거실로 나온 남편은 옆에서 유심히 의자를 살펴보았다.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있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의자를 사겠다며, 망설이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갑자기 아이들의 아빠가 우리 아빠로 변신한 된 듯했다. 아이들을 향한 관심의 절반 혹은 그 절반이라도 배우자나 부모님께로 나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한다며 남편은 뜬금없지만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혹여 부족한 게 있을까, 말하기도 전에 자식을 챙기느라 정작 우리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지 받는 기쁨이 꽤 컸다. 헤드레스트는 기본에, 틸팅이 되는 의자로 샀다. 핑크색이 아닌 옅은 회색으로. 내 몸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이전 의자에 비해 크고 폭신했다. 사장님처럼 몸과 머리를 뒤로 젖힌 뒤 잠시 눈을 감고 쉴 수 있게 되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얼굴을 따스하게 비춰주었다.


의자를 새로 구입하기 몇 달 전에는 냉장고를 바꿨다. 2010년,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집에는 꽃무늬가 그려진 냉장고가 하나씩 있었다. 나도 그때 혼수로 샀다. 세 번 이사하며 금방이라도 멈출 것 같은 순간을 몇 번이나 잘 넘기고도 불편 없이 썼다. 올해나 내년쯤 바꿔볼까를 고려할 때쯤, 구매가격의 10프로를 환급해 주는 '으뜸 효율 가전제품 환급사업'을 알게 되었다. 이왕 바꿀 거니 환급이라도 받자며 기분 좋게 샀다. 헌 냉장고가 비켜준 자리에 새 냉장고가 들어서니 주방 분위기가 달라졌다. 세련된 디자인과 큰 용량에 감탄하는 동시에 우리 집 역사를 지켜본 큰 어른 같은 묵직한 냉장고를 보내면서 미안한 마음에 기념사진도 찍고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출발 시점에 산 물건들이 하나둘씩 우리를 떠났다. 집안을 한 번 쓱 둘러보니 이제 남은 건 안방 침대뿐이었다. 이사할 때마다 조금씩 바꾸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몸에 쌓아가는 우리처럼, 함께 숨 쉬는 물건들도 그런 흐름을 비켜갈 수 없었다. 때가 되면 물건들은 자연스레 교체된다. 손때 묻은 추억과 정으로 쌓인 아쉬움을 뒤로하고 기능과 디자인이 향상된 제품을 두 팔 벌려 반갑게 맞이한다. 우리는 신세계를 경험하며 나이를 먹어간다. 하루하루를 산다. 마치 가족처럼 함께하나 소중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와 한 몸이 되어 일상을 지켜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엄마의 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