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히든 피겨스 3

-스트렙토마이신을 발견한 샤츠와 버기-

by 오순영


피아노의 시인 쇼팽, 《절규》를 그린 뭉크, 《동물농장》과 《1984》를 쓴 조지 오웰, 《페스트》와 《이방인》을 쓴 알베르 카뮈, 《변신》을 쓴 프란츠 카프카,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 리, 《제인 에어》를 쓴 에밀리 브론테, 《죄와 벌》의 도스토예프스키, 양자물리학의 대가 에르빈 슈뢰딩거,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 계몽사상가인 루소, 독일의 시인 쉴러, 독일의 철학자 스피노자, 칸트, 영국 시인 키츠, 미국의 소설가 에드가 알렌 포우, 그리고 한국으로 넘어와서 《뽕 》 《 물레방아 》를 쓴 나도향, 천재 시인 이상, 《 메밀꽃 필 무렵 》 의 이효석 등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나고 자란 곳, 시대와 환경이 달랐지만 모두 똑같은 병으로 사망한 것인데, 그 병이 바로 결핵이다.


결핵은 중세 유럽에 창궐하여 인구의 1/3을 사망케 한 페스트처럼 사망률이 높은 무서운 질환이라 ‘백색 페스트’라 불렸다. 그런데 결핵은 페스트와 달리 갑자기 죽지 않고 서서히 죽어갔다. 식욕이 떨어지고, 점점 마르고 창백해지며, 피로를 쉽게 느낀다. 몸의 여러 곳을 침범하지만 특히 폐를 잘 침범하기 때문에 기침, 가래, 호흡곤란이 많고 심하면 객혈을 하기도 한다. 천재적인 문인, 작곡가, 철학자, 그리고 귀족에게 많이 걸렸기 때문에 부유하고 똑똑한 사람들에게 걸리는 유전병이라고 과거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심지어 여성들은 결핵에 걸린 사람처럼 화장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80년대 말 독일의 미생물학자 로베르트 코흐에 의해 결핵균(Mycobacterium tuberculosis)에 의한 감염병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결핵에 대한 낭만적인 인식은 사라지게 되었다.


결핵은 필자가 처음 의사가 되었던 30년 전에는 우리나라에 흔한 질환이라서 대학 병원에 결핵병동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특히 결핵성늑막염 환자가 많았는데 환자를 책상에 약간 엎드리게 앉히고 그 뒤에서 주삿바늘을 늑막에 찌른 후 흉수를 천자하는 것이 내과 인턴의 주된 일과 중 하나였다. 결핵환자 중에는 식욕 좋고 살찐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결핵에 걸린 것이 아닌가 걱정하던 결핵병동의 동료 인턴에게 ‘너는 잘 먹고 뚱뚱하기 때문에 절대 그럴 일 없다.’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결핵약은 수가 많아서 아침 빈속에 한 움큼씩 적어도 6개월 이상을 복용해야 한다. 간혹 간기능이상과 피부 질환을 일으키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에 그럴 경우 부작용을 일으키는 약을 선별해서 처방해야 했다. 결핵균은 아주 천천히 증식하는 세균이기 때문에 감염되어도 증상이 없는 수가 많다. 증상이 발현되지 않는 결핵을 잠복결핵이라고 하는데 전염력이 없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면역이 떨어지는 경우에 활동성 결핵으로 가는 수가 드물게 있다. 폐결핵을 앓고 나면 폐에 흉터가 남는데 이것이 사라지지 않고 평생 가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정기 검진 시 촬영한 폐사진에서 이 흉터가 발견되는 사람이 흔하게 있다.


최초의 항생물질인 페니실린이 푸른곰팡이에서 분리되고 난 후부터 결핵균을 죽이는 물질을 찾기 위한 노력이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미생물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 길항 작용을 하기 때문에 결핵균도 어디엔가는 천적인 미생물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였다. 미국 뉴저지주의 럿거스 대학교의 토양 미생물학 교수 왁스만(Selman A. Waksman, 1888년 7월 22일 ~ 1973년 8월 16일)은 흙에서 결핵균과 길항작용을 하는 미생물을 찾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우크라이나 태생의 유대인으로 1916 년 미국에 건너와 귀화하였으며 머크사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항생제를 개발하는 연구실 책임자가 되었다. 그의 연구실에는 14명의 연구원이 있었는데 그중 박사과정의 대학원생 알버트 샤츠와 석사과정의 엘리자베스 버기는 뛰어난 인재였다.

특히 샤츠 (Albert Israel Schatz 1920년 2월 2일~2005년 1월 17일)는 수많은 토양 샘플에서 항생물질을 갖고 있는 방선균을 찾는데 몰두하였는데 스트렙토미세스 속의 방선균에서 드디어 항생물질을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찾은 항생물질을 스승 왁스만에게 알렸다.


샤츠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럿거스 대학에서 토양학을 전공하였다. 스승이었던 왁스만의 연구실에서 일을 하다가 2차 대전에 징집되어 군복무를 하였는데 그곳에서 병사들이 상처의 감염으로 죽거나 불구가 되는 것을 보았으며 페니실린을 써도 낫지 않는 케이스를 경험하였다. 허리 부상으로 제대를 한 후 왁스만의 연구소에 다시 합류하였는데 그는 스스로 페니실린 내성 그람 음성균에 효과가 있는 항생제 연구를 제안하여 그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는 감염의 위험성 때문에 지하 실험실을 배정받았다. 그는 몇 개월에 걸쳐 약 1000개의 방선균을 테스트하였다. 그는 새로운 항생물질을 찾아낸 시점을 1942년 10월 19일 오후 2시라고 명확하게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이 물질을 스트렙토마이신이라고 명명하였으며 자신의 연구결과를 꾸준히 왁스만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왁스만은 지하 실험실에 한 번도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샤츠가 실험실 구석에서 쪽잠을 자며 연구하다가 폐렴에 걸렸지만, 다른 연구원들은 모두 병문안을 왔는데 왁스만만 오지 않았다고 한다. 샤츠와 왁스만은 스트렙토마이신을 메이요클리닉으로 보내 결핵균에 감염시킨 기니피그에 효과가 있는지 입증하는 실험을 의뢰하였는데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곧바로 사람에 대한 테스트를 하였는데 두 살된 아기를 살려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 당시에는 지금처럼 임상 1상에서 3상까지 지루하고 엄격한 검증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스트렙토마이신은 곧바로 미군에 투입되어 2차 대전 말부터 치료제로 사용되었다.


샤츠와 왁스먼이 스트렙토마이신을 보고한 첫 논문은, 1944년 《실험 및 생물의학 학회 회보 Proceedings of the Society for Experimental and Biological Medicine》에 실렸다. 그 논문의 저자는 3명이었다. 앨버트 샤츠가 제1 저자, 셀먼 왁스먼이 제3 저자이자 교신 저자, 그리고 둘 사이 중간에 들어가 있는 제2 저자가 엘리자베스 버기였다. 버기는 샤츠의 실험 결과를 확인한 대학원생이자 연구원이었다.


1900년대 초반 여성이 대학원에 다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버기(Elizabeth Bugie Gregory, 1920년 10월 5일 ~ 2001년 4월 10일)는 최초의 여성 생물학자라 할 수 있다. 생물학 분야는 공학, 물리학에 비해 그나마 여성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녀는 왁스만의 연구실에서 샤츠가 스트렙토마이신을 분리하는데 왁스만 보다 더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녀의 석사학위 논문은 아스페르길루스 플라부스와 차에토미움 고콜리오데스이라는 곰팡이에서 분리한 플라비신 flavicin과 채토민 chaetomin의 생산 최적화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녀는 곰팡이나 토양세균에서 항생물질을 분리하는 일에는 전문가였다.

스트렙토마이신 개발은 논문 저자 순서대로 샤츠가 가장 많이 기여를 했고 그다음이 버기, 그다음이 왁스만이었지만, 1952년 노벨 생리학상은 왁스만에게 만 돌아갔다. 노벨상 선정위원회는 세 사람 모두 후보로 올랐다고 밝히고 있지만, 스웨덴과 미국은 거리상으로도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스트렙토마이신이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정확한 내막을 몰랐을 가능성이 있다. 왁스만은 단독수상으로 노벨상의 명예와 상금을 독차지하였다.

스트렙토마이신에 대한 로열티도 왁스만과 럿거스 대학 재단이 차지하였다. 샤츠는 당연히 소송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샤츠는 특허의 권리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로열티의 3%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버기에게는 권리 포기를 묻지도 않았다. 여성이었고 학사학위를 하던 중이어서 특허권은 당연히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녀는 로열티의 0.5%만 받고서 스트렙토마이신의 어떤 권리도 인정받지 못하였다.


샤츠는 금전적인 문제로 스승과 소송 전을 벌인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 꽤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왁스만은 승승장구하여 두 번째 아미노글리코사이드 계열의 항생제인 네오마이신을 발견했다. 샤츠는 남미 칠레 대학까지 가서 교수로 학생을 가르치다가 워싱턴 대학, 템플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활동했으며 1994년 럿거스 대학교의 최고 영예인 럿거스 메달을 받았다. 스트렙토마이신의 발견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샤츠는 2005년 87세에 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엘리자베스 버기는 럿거스 대학을 떠나 인근의 머크 연구소에서 결핵균에 대한 항생제 효과를 평가하는 일을 계속하다가 1950년 30세에 결혼하면서 연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버기의 딸 아일린 그레고리는 어머니를 뒤이어 미생물학을 전공하여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녀는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당시 남성의 분야에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압박을 받았어요. 그건 대학원생에게는 정말 힘든 일이에요. 학점은 누가 주고, 학위는 또 누가 주나요? 하지만 엄마는 그 일 자체를 즐겼어요. 그게 전부이긴 하지만요.”라고.

keyword
이전 16화히든 피겨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