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전학의 시작
우리는 유전자가 우리의 실존을 구성하는 중요한 본질 중 하나라는 관념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관념은 19세기말 유전학이 등장하고서부터다. 19세기 이전 만해도 인류는 유전자가 인간 실존의 주요한 본질임을 모르고도 잘 살고 있었다.
유전학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작은 마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멘델로부터 비롯되었다. 멘델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기 때문에 부모는 멘델이 교사가 되기를 바랐다. 당시 교사라는 직업은 누대에 걸친 소작농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멘델은 필기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구술시험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다. 가족의 기대와 응원, 합격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는지 그는 구술시험 도중 불안 발작을 일으켰다. 시험에 대한 공포와 두 번의 낙방 그리고 수치심은 그가 속세와 단절하고 가톨릭 수도사 되기를 결심하는 강력한 동기로 작용하였다.
그는 체코 브르노에 위치한 성 토마스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은 그에게 전화위복이었고, 인류 역사에는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평범한 소작농 아들이라면 누구나 걸어야 했을 노동과 가족 부양의 길을 걷는 대신 그는 수도원에서 책을 읽고 연구하고 완두콩을 재배하였다. 여자를 사랑하는 대신 완두콩을 교배했으며, 자식을 부양하는 대신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완두를 재배하였다. “무엇이 자식이 부모를 닮게 만드는가?”라는 화두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정진하였으며, 수도원은 그것을 위한 최적의 장소가 돼 주었다.
멘델은 나비와 벌이 무작위로 완두꽃을 수정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 만 번 붓으로 수술에서 화분을 채취해 암술에 묻히는 방법으로 완두콩을 수정 재배하였는데 그것은 끈질기고 반복적이며 강박적이어서 금욕의 고행과 자식을 키우지 못하는 것에 대한 훌륭한 보상이었다.
멘델은 8년 동안 2만 그루 완두콩을 재배하였다. 완두를 다음의 일곱 가지 특징에 따라 구분했다. 종자의 모양(주름진 콩, 둥근 콩), 꽃이 달리는 위치(줄기 끝, 줄기 중간), 종자 색깔(녹색, 노란색), 종자 껍질(흰색, 회색), 익은 콩깍지의 모양(통통한 것, 납작한 것), 덜 익은 콩깍지의 색(녹색, 노란색), 키(큰 키, 작은 키). 멘델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완두를 교배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알고 싶었다. 녹색 콩깍지 완두와 노란색 콩깍지 완두를 서로 교배하면 두 색깔이 섞여 황록색 같은 중간색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지만, 그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녹색 완두와 노란 완두를 교배해서 나온 2세대 완두는 모두 노란색이었다. 멘델은 더 나아가 2세대 완두를 다른 2세대 노란 완두와 교배하였다. 이 교배에서 얻은 자손의 개수를 신중히 센 멘델은 다음 세대인 3세대에서 노란색과 녹색 완두가 둘 다 얻어지며 노란 완두 3개당 녹색 완두 3개라는 무척 일정한 비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멘델은 일곱 가지 특징에 대한 실험에서 모두 같은 비를 얻었는데 이는 유전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바꿔놓을 무언가 엄청난 것이 있음을 암시하는 결과였다.
멘델은 또한 자식이 부모로부터 ‘형질’을 하나씩 물려받는다는 것을 알아냈으며 나아가 그 형질에는 우성과 열성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형질’은 나중에 유전자로 명명되었다. 멘델은 우성 형질을 대문자 ‘A’로 표시하고 열성 형질은 소문자 ‘a’로 표시했다. 이 기호를 활용하면 3세대 자손은 AA, Aa, aA, aa라는 네 가지 조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 부모의 피가 섞였다는 말과는 다르게 유전자들은 오히려 서로 분리되어 자식이 각 부모로부터 유전자 하나씩을 물려받는다. 세대를 거듭해도 유전자는 언제나 온전히 보존된다.
지금은 멘델이 유전학의 창시자임을 누구나 인정하지만 당시에는 그의 연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결과가 과학사에 지대한 공헌을 할 것임을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이 유명해질 것임을 불행히도 자신만 알고 있었다. 멘델은 연구 결과를 찰스 다윈을 포함한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에게 보냈지만 대부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그를 요새말로 오타쿠 정도로 치부하였던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학계에 이름이 알려진 인물도 아니고, 수도원에서 은둔고행을 하는 무명의 수사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그가 사망한 후 20년이 지난 1900년 초반이었다. 여러 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표절을 여부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자신들보다 먼저 유전법칙 논문을 쓴 멘델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후발주자들에 의해 역으로 존재가 알려진 선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