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hotograph 51 의 주인공 로잘린드 프랭클린 -
1953년 미국의 분자생물학자인 데이비드 왓슨과 영국의 생리학자 프랜시스 크릭이 생명 현상의 근원 이라할 수 있는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한 것은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획기적인 발견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과정에 결정적 기여를 하고도 잊힌 과학자가 있었으니, 그가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라는 여성이다.
생명현상이라 함은 동식물을 막론하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부모의 형질을 이어받아 부모와 비슷한 생명으로 잉태되어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식물에서 동물이 태어나지 않으며, 원숭이는 원숭이를 낳고 호랑이는 호랑이를 낳는 것이다. 생명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귀결이며 자연의 질서지만 신비롭고 경이로우며 미스터리하다. 생명현상은 인간이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며 다룰 수 없는 신의 영역이었다. 왓슨과 크릭에 의해 DNA 이중나선 구조가 규명되면서 인류는 드디어 생명현상이라는 미지영역, 그것도 인간이 침범해서는 안 되는 금기의 영역에 할 걸음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으로 대단하였다. 수없이 많은 종류의 유전자변형 식품이 만들어졌고, 땀, 타액, 피 한 방울만 있어도 친자 감별을 하거나 범인을 찾아낼 수 있게 되었고, 복제 양, 복제 개, 복제 원숭이뿐 아니라 유전자를 편집한 아기까지 태어나게 되었다.
유전자에 대한 이해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해서는 DNA에 유전정보가 저장되어 있음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역사는 대략 다음과 같다. 고대의 만물박사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식이 부모의 형질을 물려받는 통로를 혈액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로부터 2000년 후 멘델(1822년 7월 20일~1884년 1월 6일)의 유전법칙이 확립되면서 생명체에는 혈액이 아닌 어떤 유전 물질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유전 물질이 염색체 속에 있다고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미국의 과학자 윌터 서턴(1877년 4월 5일 ~ 1916년 11월 10일)이었다. 그는 메뚜기의 세포를 연구해 염색체에 유전물질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염색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염색이 되는 물질을 말하는데, 현미경으로 관찰하기 용이하도록 세포를 염색할 때 세포핵 속의 염색되는 물질을 염색체로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염색체라 이름을 붙인 것은 그것이 유전물질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유전자 GENE이라는 용어는 1909년 덴마크의 식물학자 빌헬름 요한센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유전형질을 결정하는 물질을 gene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하였다.
미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모건은 초파리의 염색체 연구를 하다가 염색체에 따라 초파리의 눈 색깔이 바뀜을 발견하여 gene이 염색체에 들어있음을 증명하였다. 염색체는 단백질과 DNA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에 무엇이 진짜 유전자인지는 미국 록펠러 연구소의 오즈월드 에이버리(1877년 10월 21일 - 1955년 2월 2일)에 의해 판명되었다. 그는 폐렴구균을 연구하는 중에 염색체 속의 단백질을 제거하고 DNA만 주입하여 세균의 형질이 바뀜을 알아내어 드디어 DNA에 유전자가 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렇게 약 3000년 동안에 걸쳐 유전에 대한 수수께끼가 조금씩 풀려 나갔다. 남은 것은 DNA가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지 규명하는 것이었다. DNA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있다는 놀라운 발견의 발단은 미국 중서부 출신의 당돌하고 야심만만한 24살 청년 제임스 왓슨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번디시 연구소에 유학 온 것에서 출발한다. 왓슨은 그곳에서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을 만났다. 둘은 DNA 구조를 밝히기 위한 작업으로 X선 결정학이란 기술을 도입했다. X선이 분자와 부딪혀 튀어나올 때 형성되는 패턴을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분자 생물학과 생리학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가였으나 X선 결정학은 물리 분야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런던 킹스 칼리지의 모리스 윌킨스와 로절린드 프랭클린에게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1922년 8월 22일 - 1958년 8월 22일)은 영국 런던 노팅힐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노팅힐은 줄리아 로버츠와 휴그랜츠가 출연한 영화 『노팅힐』로 많이 알려진 고급 쇼핑가와 첨단 유행이 시작되는 영국의 부촌이다. 세인트 폴 여학교를 나와 1938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뉴넘 컬리지에 진학해 화학을 공부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결정학의 대가인 윌리암 브래그스를 만나게 된다. 결정학(結晶学, crystallography)은 어떤 물질이든지 결정화되면 원자의 배열이 공간적으로 반복된 패턴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의 기하학적인 특징과 광학적인 성격, 물리적 성질, 화학적 성질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프랭클린은 결정에 X선을 투과시켜 물질의 구조와 물리적 특성을 알아보는 연구에 집중하였는데 그 분야에서는 독보적이었다. 그리고 런던의 킹스 칼리지 연구소에서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DNA의 X선 회절기법으로 구조를 파악하는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DNA 이중나선구조를 밝히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51번째 DNA 사진을 촬영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DNA 구조 모델을 만들고자 노력 중이던 왓슨과 크릭은 단백질과 DNA에 관련한 여러 차례의 세미나를 통해 프랭클린과 알게 되었다. 서로 토론과정에서 충돌이 자주 있었다고 하지만 왓슨은 그녀로부터 DNA 구조에 관한 여러 가지 힌트를 얻게 된다. 그런데 이런 만남의 과정에서 킹스칼리지 모리스 윌킨스가 프랭클린의 허락 없이 사진 51을 왓슨에게 보여 주게 되었는데 왓슨은 이를 보고 단박에 DNA 구조가 나선형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크릭과 함께 사다리가 꼬여 있는 형태의 이중나선 모형을 만들어내었다. 이때가 한국 전쟁 휴전협정이 맺어졌던 1953년이다.
이들이 완성한 DNA 모형은 훗날 20세기 최고의 발견이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두 사람은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작성해 영국에서 발행되는 과학 학술지 <네이처>에 보냈다. 『DNA(Deoxyribonucleic Acid 데옥시리보핵산)의 구조』라는 제목으로 실린 논문은 왓슨과 크릭을 하루아침에 유명 과학자들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논문에 프랭클린의 데이터가 사용되었음을 밝히지 않았다. 프랭클린은 이 논문에 자신의 데이터가 사용됐음을 분명히 알았지만 항의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주는 명예에 대해 남성 과학자들만큼 집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논문 발표 후 1년이 지나서야 왓슨과 크릭은 프랭클린의 데이터가 없었다면 자신들이 DNA 모형을 구축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1962년 왓슨, 크릭 그리고 윌킨스는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프랭클린도 당연히 받아야 하지만 그녀는 난소암에 걸려 사망한 후였다.
프랭클린은 1956년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아랫배에 주먹만 한 혹이 생겨 치마를 입을 때마다 걸려 불편하였다. 진단 결과 난소암이었다. 난소암은 초기에는 증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발견되면 상당히 진행되었을 때다. 현재도 여성 암중에서 가장 예후가 나빠서 5년 생존율이 4기인 경우에는 5%도 안 된다.
프랭클린이 난소암에 걸린 것은 방사선 보호복을 입지 않고 많은 X선 촬영을 하여 방사능에 노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항암 치료 중에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56년에 7개의 논문, 57년에 6개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투병 중에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친구의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갖고자 했지만 어머니와의 만남은 피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무엇보다도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57년 겨울에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더 이상 어떤 연구도 하기 어렵게 되자 암치료로 명성이 있던 로열 마르스덴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4월 16일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마리 퀴리도 방사능에 피폭되어 사망하였는데 그래도 그녀는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과 물리학상 두 개를 연이어 수상하였다. 프랑스에서 수여하는 국가훈장, 프랑스 의학 아카데미 종신회원 등 여러 가지 명예를 얻었지만, 말년에는 재생불량성 빈혈 및 여러 장기 부전으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프랭클린과 다르게 66세까지 살았고,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국가 유공자만 안장되는 팡테옹에 묻혔으며, 세계 각국의 위인전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여성이 되었다. 그에 비해 프랭클린은 너무나 일찍 사망했고, 후손도 남기지 못했으며, 이름도 잊혔으니 불행한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는 훌륭한 조연으로 살았다. 남성이 주연으로 활약하던 과학의 무대에서 인기, 명예를 좇지 않고 고독하지만 순수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자신의 역할에 매진하였다. 그녀의 출생과 죽음까지 삶의 여정을 살펴보면 그녀에 대한 존경심과 연민이 생긴다. 우리나라에도 프랭클린 같은 여성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며, 어디엔가 그분들이 있다면 감사와 함께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