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희 Jan 03. 2025

한강의  『흰』을 읽고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난 후 한동안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지 않았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의 열풍 속에서도 기뻤지만,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연말에 지인이 『흰』을 읽고 있는데 너무 좋다고 하기에 큰 기대 없이 책을 사고 읽었는데 진작 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울림이 있는 책이었다.     

이 작품 역시 『채식주의자』만큼이나 독특한 감성과 깊이를 지닌 작품이다. 책의 구성도 전통적인 소설 형식과는 다르다. 마치 단편 에세이와 시를 엮은 듯한 형식이다. 책을 읽는 내내 한강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문처럼, 시처럼 짧지만 가볍지 않은 내용의 소설이다. 하나의 소재를 읽고 나면 한참을 생각하게 만든다. 작가가 쓴 글의 여백에 독자의 생각이 들어가야 비로소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는 소설이다. 언니의 죽음에서 시작된 흰색에 대한 감정들이 시린 느낌으로 전해져 더 이상 읽을 수 없어 덮어 두었다가 다음 날 다시 펼쳐 읽었다.     


작가는 『흰』을 쓰기 위해 12개의 흰색에 대한 목록을 만들었다고 소설 앞부분에서 밝힌다. 강보, 배내옷, 눈, 소금, 얼음 등 익숙한 소재들에 대해 익숙하지 않게 전개된다. 이 소재들은 태어나지 못한 언니의 존재를 기리며, 동시에 살아 있는 사람이 느껴야 할 상실의 흔적이기도 하다. 작가는 흰색을 순수하거나 결백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슬픔, 공허, 희망이 미묘하게 뒤섞인 경계가 희미한 색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어머니가 낳은 첫아기의 배내옷을 흰 천으로 만들어 입혔는데, 아이가 두 시간 만에 죽어 그 배내옷이 수의가 되고 강보가 관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얼굴도 보지 못한 언니의 존재를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산다. 122페이지에서 작가는 '만약 언니가 있었다면'이라는 가정을 통해 일상적 순간들을 상상하며,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자매 간의 소소한 일상을 그리움으로 그려낸다. 이 상상 속 장면들은 현실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기에 더욱 애틋하게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언니가 있었다면, 생각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난 보따리 한 뭉치를 든 언니. 보풀 약간 일어난 스웨터와 아주 조금 상처가 난 에나멜 단화를 끌어주는 언니. 엄마가 아플 때면 코트를 걸치고 약국에 다녀오는 언니. 뭔, 조용조용히 걸어야지. 자신의 신음소리에 집 전체가 흔들려 나무라는 언니. 이건 아주 간단한 거야, 쉽게 생각해 봐, 내 수학공책 옆에 방정식을 적어주는 언니. 얼굴을 만지며 학교에서 돌아와. 밤바람에 나래에 앉아보고 참는 언니. 스웨터를 가슴에 댄 사람은 언니였어. 가슴이 아프면 핏빛이 고운 내 손목 위를 조심조심 가슴에 새겼던 언니.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은 나에게 다가오는 언니. 그만 울래, 네가 오해한 거라니까. 짧고 어색한 포옹. 제발 일어나. 밥부터 먹자. 내 얼굴을 스치는 차가운 손. 빠르게 내 어깨에서 빠져나가는 그녀의 어깨."     

『채식주의자』가 인간 본성과 사회적 억압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흰』은 작가 자신과 가족, 그리고 상실의 감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이 점에서 『흰』은 독자의 내면에 직접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흰색은 전통적으로 상복의 색이자 아이가 태어나면 처음 입히는 배냇저고리에서도 흰색이 사용된다. 죽음과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흰』은 이러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상실과 치유, 부재와 존재, 슬픔과 희망이라는 대비되는 감정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흰색은 텅 빈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색을 품을 수 있는 색이다. 깨끗하지만 쉽게 오염될 수도 있는 색이기도 하다. 그래서 흰 것에 대해서 하나로 정의하기 힘든 복합적인 감정을 갖게 되고 작가 한강을 뛰어난 문체로 그것을 독자에게 상상하게 만든다.     

이 책은 단순한 감상을 넘어 독자 자신의 삶 속 '흰색'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든다. 상실과 치유, 그리고 삶의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하고 싶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여운을 남길 작품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