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네 신고식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자리를 잡은 못된 육지 것이다. 이사오자마자 아이가 태어나고 집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 바빴다는 이유가 변명이라면 변명일 것이다. 이사 오고 일 년이 지나서야 아이 돌 겸, 수수팥떡을 조금씩 돌린 게 작은 성의 표시의 신고식이었다. 그것도 여덟 집만 겨우 말이다.(우리 집은 골목집 중의 골목집이지만 동네의 센터에 자리하고 있어 여덟 집과 접해있다.)
그 여덟 집 가운데 10시 방향에는 '브로콜리 할머니'가 사신다. 우리 집이 137-1이고, 브로콜리 할머니 댁이 137-11이니 1, 3, 5, 7, 9, 11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 다섯 집을 지나야 브로콜리 할머니댁이 있다는 뜻인데, 실제로는 옆집이다. 하지만 정식으로 대문과 대문으로 가려면 다섯 집을 지나야 하는 건 맞는 얘기다. 어쨌거나, 수수팥떡 이후로 할머니는 매해 손수 농사지으신 브로콜리를 한 아름 들고 오셨다. 수수팥떡 몇 개의 대가 치고는 감사하게도 너무 후하다. 그 이후로 우리는 10시 방향의 옆집 할머니를 '브로콜리 할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브로콜리 할머니는 올해로 졸수(卒壽)가 되셨다. 제주에서 태어난 제주 토박이다. 그래서 할머니와 이야기하면 반은 못 알아듣는다. 우리 동네에서 십리정도 떨어진 곳에서 이곳으로 22살에 시집오셨다고 한다. 그 당시 우리 동네에 할머니의 고모가 살고 계셨는데, 고모의 중매로 시집오게 되었고, 현재는 그 고모님 덕(?)에 나의 이웃이 되어 주셨다.
우리 집은 남편이 제주를 좋아하고 은행빚이 한가득이지만 제주에 땅도 사고 집도 지어서 이변이 없는 한 이 터에서 노년을 보내다 하늘나라로 갈 것이 예정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 마을의 옛이야기가 궁금해 가끔씩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놀러 오시면 이것저것 여쭈어 보곤 했다. 먼저 1. 우리 동네 골목길을 브로콜리 할머니 남편되시는 분이 힘을 써 길을 넓혔다는 것과, 2. 할머니 댁 앞에 있는 자태 좋은 퐁낭도 여전히 있었다는 것과, 3. 지금은 길 하나로 마을 이름이 다르지만 예전엔 같은 동네였던 곳으로 물허벅에 물을 길어 다녔다는 것, 4. 우리 골목길 입구에 있는 천평 가까운 넓은 밭이 있는데, 그 밭 이름이 '구실앗디' 라는 것. 5. 그래서 옆 마을에서는 아직도 우리 동네를 구실 앗디라고 부르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 구실앗디의 뜻을 알고 싶어 여쭤 봤지만, 할머니도 그 단어의 의미는 알지 못하셨다. 우리 집 터의 역사도 궁금해 여쭤보니, 초가집이 두 채 있었다고 한다. 초가집에 마지막으로 살던 사람들이 일찍 병으로 돌아가셨다면서 이 집 터가 그리 좋은 집터는 아니라는 말씀도 해 주셨다. 그리고 초가집을 없애면서 나온 쓰레기를 현재 우리 집 마당,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왕벚꽃 나무를 심어 놓은 그 자리에 한가득 묻었다고 한다. 어쩐지 처음에 심었던 벚나무가 몇 달 만에 죽더라니. 지금 심은 왕벚나무는 무려 7만 원이나 주고 오일장에서 사 와 다시 심은 것이다. 죽진 않았지만 심은지 5년이 넘었는데, 자라는 속도가 영 시원찮다. 다 그 쓰레기 더미 때문인 것 같다. 초가집 이후로 우리 집 터는 펜션을 지으려고 했던 분도 계셨다고 하고, 뒷집이 이 땅을 사려고 했다고도 했다. 한 동안 풀이 가득한 버려진 땅이었는데, 우리가 이사 오기 직전에는 137-4에 사시는 부지런한 삼춘이 아무도 가꾸지 않은 이 땅을 일구어 쪽파 농사를 짓고 계셨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을 6살, 3살에 잃었지만, 그 후로 2남 4녀를 두신 브로콜리 할머니는, 겨울에 쪽파 작업도 하시고, 매주 마을회관에도 가시며 건강한 생활을 하고 계신다. 우리 집에 오시는 횟수가 예전만 못하시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