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전투 중인 국민돌격대원들. 좌측 두번째 인물은 프랑스제 아드리앙 헬멧을 쓰고 있다.
1945년이 넘어 가면서 독일 동부는 소련군에 의해 유린되고 있었고 미국과 영국군도 봄부터 라인 강을 도하하여 내륙으로 진군 중이었다. 북부와 남부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많은 곳이 연합군들에게 점령당했고 4월이 되자 이제 동부전선에서는 수도인 베를린, 요새로 선포된 브레슬라우(Breslau)와 발트해의 쿠를란트(Kurland) 정도가 남게 되었다. 서방연합군과 소련 측의 사전 합의에 의해 수도 베를린은 소련군이 공격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미군은 엘베강 서쪽에서 진군을 멈추었다. 드디어 4월 16일에 소련군은 제3 제국의 심장인 베를린 공격을 시작한다.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 이반 코네프(Ivan Konev)와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Konstantin Rokossovsky) 등이 지휘하는 3개 전선군 230만 명이 전의를 불태우며 나치를 끝장내려 하고 있었다. 베를린 시내에서는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자살용 약물을 사려는 사람들과 유언 및 관련 공증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급증하여 의도치 않게 약사와 변호사들이 바빠졌다. 온 도시의 관청에서는 문서 태우는 연기가 가득했고 이 와중에 극단에 몰린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술이란 술은 모조리 약탈하고 마시며 현실을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현실도피를 하려해도 소용없었다. 소련군은 엄청난 포격과 함께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는데 77만 명의 독일군이 이들을 막기 위해 동원되었고 그 중에는 정규군에 섞여 함께 전투 중인 국민돌격대도 있었다. 남성들이 국민돌격대에 소집되어 가자 집안에 남은 여성들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배급을 타거나 식량 및 생필품을 구해야만 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폭격과 포탄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때의 베를린은 실제로 현실에 발현한 지옥과 같았다.
소련군은 순식간에 베를린을 포위했고 시내의 전투는 건물 하나하나를 두고 싸워야 하는 참혹한 시가전이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양측의 희생은 늘어 가기만 했는데 전투에 능숙하지 않은 국민돌격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베를린의 국민돌격대는 92개 대대 약 6만 명으로 추산되었는데 그 중 어느 정도 무장을 하였던 30개 대대는 최전방에 투입되었다. 대게 이들은 진격해 오는 소련군 전차를 기다리며 건물의 폐허나 포탄 구덩이에 숨어 있다가 판처파우스트를 발사하여 적 전차를 파괴했다(베를린 공방전 당시 소련군 전차 2천대가 파괴되었는데 상당수가 판처파우스트에 의한 피해였다). 많은 경우에 있어 적 전차를 파괴했을지라도 이후 소련군 보병이 때를 지어 공격하면 국민돌격대는 주변에 정규군이 없는 이상 별다른 저항을 할 수 없었고 간단히 분쇄되었다. 판처파우스트의 발사 시 나오는 후폭풍을 무시하고 뒤에서 멍하니 있다가 화상을 입거나 죽어가는 안타까운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더 이상의 전투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고연령자들은 하나, 둘 부대를 떠나 숨기 시작했다. 이것도 민간복을 입고 전투 중인 국민돌격대원의 경우에나 가능했고 군복을 입고 있던 대원이나 히틀러유겐트가 탈영하다 걸리기라도 하면 즉결처형 대상이었다. 실제로 탈영병으로 간주된 많은 이들이 교수형 당했고 나치는 본보기로 시내 대로 변에 그 시체를 무자비하게 걸어 놓았다. 이런 활동은 전투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모든 국민돌격대원들이 전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약 770명으로 구성된 베를린 서부의 ‘지멘스슈타트(Siemensstadt) 출신 대대’였다. 대대 구성원들 다수가 50대의 장년으로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대부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로서 무기를 다룰 줄 알았고 심지어 박격포 등 중화기 중대까지 보유했다. 또한 이들 중 많은 수가 같은 지멘스 공장에서 근무하는 동료들로서 서로 인간적으로 끈끈했고 이들을 지휘하는 장교들도 나름 경험도 있고 유능한 이들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다른 부대들보다 확실한 장점으로 작용을 했는데 실제로 그들은 전투에서 정규군 못지않은 활약을 했다. 부대는 4월 21일에 시 동부의 프리드리히스펠데(Friedrichsfelde)에서 소련군과 처음 교전했는데 무려 10일 동안을 소련군과 싸우면서 위치를 고수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다가 대부분의 부대원들이 전사나 부상을 입으며 쓰러져 갔다. 비록 대전 말기에 철십자훈장이 마구 뿌려지며 그 의미가 퇴색되기도 했지만 이 대대 출신 중 무려 26명이 훈장을 받는 등 나름 전과를 인정받기도 했다.
이러한 파괴와 저항의 혼란이 당시 독일의 많은 지역에서 발생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어 나가게 했다. 하지만 4월 말이 되자 히틀러의 자살 소식이 전파되면서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 없음이 분명해졌다. 특히 서부에서는 유소년을 비롯한 남아있는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고 판단한 국민돌격대의 지휘관들이 부대원들과 함께 항복하려 하였다. 미군과 영국군은 노인과 아이들로 구성된 부대가 대량으로 항복하는 상황에 어처구니없어 했지만 비교적 이들을 부드럽게 대했다. 심지어는 독일 아이들과 연합군 군인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동식 즉결심판 처형대’나 같이 있던 나치 광신도들이 끝까지 투쟁을 강요할 경우에는 항복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동부에서는 국민돌격대원들이 오히려 이런 나치 광신도의 편을 들며 끝까지 저항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것은 대게 소련군의 포로에 대한 잔인한 학살 소문에 따른 것이었다. 4월 20일 독일 동부 작센의 니더카이나(Niederkaina) 마을을 격렬한 전투 끝에 일시 점령한 소련군은 200명의 국민돌격대원들을 포로로 잡게 된다. 포로들은 마을의 헛간 건물에 수용되어 이송 대기 중이었는데 이때 마침 전선을 방문한 소련군 장성이 독일군 저격수의 총에 맞아 전사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사건은 현장에 있던 소련군들에게 극도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는데 흥분한 병사들은 헛간에 있던 독일 포로들에게 휘발유를 뿌린 후 산채로 태워 죽였고 인근의 다른 포로들도 마구잡이로 총살했다. 문제는 이것이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었다는 점이었고 당시 소련군은 종종 독일군 포로들을 즉석에서 처형했다. 포로들을 죽이는 것은 독일군도 마찬가지여서 수많은 소련군 포로들이 상응하는 방식으로 학살당했다. 이러한 상호 간의 사건이 증폭되고 확대되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던 국민돌격대원과 잔존 독일군들로 하여금 맹렬히 저항하게 했다.
독일 영년(Stunde Null)
미군에 붙잡혀 이동 중인 독일 포로들의 행렬
1945년 5월 8일 (소련 측은 하루 늦은 5월 9일) 마침내 독일이 항복하며 유럽전이 종료되었다. 독일 전역에는 각각 동과 서쪽 방향으로 움직이는 수백만 명의 독일군 포로들이 끝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베를린에서만 48만 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소련에 잡힌 전체 포로 숫자는 무려 300만 명에 달했다. 이중 많은 숫자가 소련의 전후 재건에 동원되거나 각지의 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전후 통계에 따르면 소련군에 포로가 된 독일군 중 약 100만명이 학대 및 굶주림, 질병 등에 따라 사망한 것으로 파악된다. 미군과 영국군 측에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부터 1945년 4월까지 280만 명의 독일군이 포로가 되었다. 특히 1945년 3월 이후 갑작스러운 포로의 급증으로 인해 연합군은 이들에 대해 충분한 수용 및 급식을 제공하는 것이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독일 서부와 중부에는 위생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거대한 야외 수용 시설이 철조망만 두른 채 세워졌는데 많은 포로들이 질병과 영양실조에 시달리게 되었다. 포로를 부양할 능력이 한계치에 다다른 데다 이제 전쟁 후 피해를 복구하고 독일을 새롭게 개조해야 하는 승자 입장에서는 농부와 노동자 및 엔지니어 등의 인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전국들은 일부 독일 포로들을 석방하게 되는데 국민돌격대 출신들 같이 가장 최근에 징집된 노인과 청소년들이 우선권을 얻을 수 있었다.
각자 고향에 돌아온 국민돌격대 및 정규군 포로들 앞에 펼쳐진 것은 대부분의 경우 폭격으로 무너지고 폐허가 된 끔찍한 모습이었다. 가족들의 생사도 알 수 없었고 비록 살았다고 해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은 경우도 많았다. 특히 소련군 점령 지대의 여성들이 그러했다. 점령군이 앞으로 자신들을 어떻게 대우할지 알 수 없었고 날마다 온갖 유언비어들이 난무했다. 하지만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이들은 무너진 벽돌더미를 하나하나 치운 후 빵 몇 조각을 받으며 허기진 배를 겨우 채울 수 있었다. 힘겨운 나날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끔찍한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했다. 바로 이들이 전후 ‘라인 강의 기적’을 만든 주역들이다. 그들은 최악의 전쟁에서 ‘마지막 소모품’으로 적군에 던져졌지만 가장 먼저 일어서며 공동체의 부흥에 앞장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