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 포격전(1816)
- 다니엘 데포(Daniel Defoe) 영국 작가이자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
어쩔 수 없이 라마단 기간 중 현지에 간 것이 생각보다 많은 불편으로 다가왔다. 그나마 이동하는 차량에 음료수는 충분히 비치를 했기에 목은 축일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밀려오는 허기는 어찌할 수 없었다. 호텔에서 가져온 사과 몇 개와 미리 준비한 에너지바가 유일한 점심이었고 그 마저도 상황을 봐서 차 안에서 조용히 먹었다. 그렇게 3시간 이상을 달려서 내륙의 목적지로 이동했다. 현지인들 중 독실한 이들은 라마단 기간 중 침조차도 안 삼킨다고 하니 이방인인 나로서는 이 정도라도 감지덕지해야 했다. 시내에서 조금 벗어나자 유정(油井) 같이 보이는 시설에서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조금 더 내륙으로 들어가자 이동하는 도로 양 편은 끝없이 펼쳐진 황갈색의 평지와 모래, 자갈이 섞인 풍경이 이어졌고 간간히 맞은편에 차들이 다닐 뿐이었다. 내 눈에는 상당히 이국적인 풍경이었는데 중간중간 지나치던 마을에는 거의 인기척이 보이지 않았고 특유의 고깔모자 외투를 입은 이곳 남자들 만이 드문드문 보였다. 잠시 차가 정차하는 동안 이들의 눈에도 내륙까지 온 동양인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연신 쳐다본다. 돌아오는 길에는 얼른 알제로 이동해서 식사하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알제의 시내 도로는 오래된 고도답게 상당히 좁았고 혼잡했다. 사방에서 수도 없이 클락션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름 강단과 터프한(?) 운전 실력이 필요해 보였다. 주변에 보이는 건물들은 대체로 낡았는데 이슬람 식의 양식은 물론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화려한 유럽풍 외관을 가진 곳도 많았다. 양쪽 문화가 묘하게 상호 조화를 이루며 섞여 있었다. 곳곳에 있는 아파트에는 개방된 베란다에 걸려 있는 빨래들이 다수 볼 수 있었는데 매우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하기야 이 세상에 ‘지중해의 태양’만큼 빨래 말리기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서구나 한국 같았으면 주택의 품격(정확히는 가격)이 떨어진다며 이웃이나 관리하는 곳에서 난리가 났을 것이다. 드라이버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쪽에 그 유명한 ‘카스바(Casbah)’가 있다고 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 역사지구이다.
곳곳의 표지판은 아랍어, 프랑스어 그리고 베르베르어(알제리, 모로코 등지에 거주하는 베르베르족이 사용하는 언어)까지 3개 문자로 병기되었다. 베르베르 문자는 기하학적인 모양이 특징이었는데 한편으로 한글과 비슷하게 보이기도 했다. 시내를 관통하여 목적지인 레스토랑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알제 항구를 내려다보는 언덕의 거의 꼭대기에 위치했다. 사방이 탁 트인 전망에서 북아프리카 쪽 지중해의 파노라마 같은 일몰 전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전에 보았던 남 프랑스의 바다색이 파스텔 톤으로 푸르스름한 느낌이었다면 이곳의 바다는 파랗다 못해 마치 원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이 보였다. 마침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까지 어우러져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느 곳의 바다보다 인상적이었다.
배를 채우기 위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바로 스테이크로 주문을 했다. 이국적인 땅에서 잘 모르는 음식을 애매하게 주문하기보다는 이름이라도 아는 음식을 시키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의 결과였다. 얼마 후 서빙된 스테이크는 양도 많고 상당히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즉시 난도질을 한 후 입으로 털어 넣었다. 행복한 느낌을 갖는 것도 잠시, 순간 이곳이 ‘이슬람 국가’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었다. 아마도 사전에 고기의 피를 제거했는지 먹기에 상당히 퍽퍽했다. 그래도 배고픔에 연신 물을 들이켜며 스테이크를 먹었지만 무엇인가 부족한 이 느낌은 채울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많은 현지인들이 레스토랑의 자리를 채우며 라마단의 허기진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왔다. 지인들 설명에 의하면 라마단 기간에는 평소보다 먹는 양이 훨씬 많아진다고 한다. 또한 알제리를 비롯한 북아프리카나 중동 지역 사람들이 단 디저트를 좋아하는 것도 이런 영향이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경험하다 보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하기야 다음날 해 뜬 이후 하루 온종일을 버텨야 하는 현지인들에게 이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일정이 시작되기에 식사 후 바로 숙소로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보는 바다는 이미 해가 다 떨어진 후였지만 해변을 따라 이 도시의 야경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역시 알제가 항구도시라 그런지 부두, 방파제 및 많은 선박들이 보였다. 밤이 되자 모든 것이 낮보다는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이 도시가 늘 이렇게 평온했던 것은 아니었다. 과거 1950~60년 대에 알제는 알제리 독립 전쟁의 중심에서 지배자인 프랑스군에 맞선 오랜 투쟁의 중심지였다. 그 보다 더 오래 전인 19세기 초에, 바로 이곳 알제 항구에서 또 다른 대결이 벌어졌다. 바로 서구 열강들과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방 정권이던 알제가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맞붙었던 것이었다. 그 대결은 알제리는 물론 이후 150년 이상 지속되는 지중해 일대 역사의 큰 흐름을 결정지었다.
지중해의 무법자
서기 476년 용병대장 오도아케르(Flavius Odoacer)에 의해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 ‘로마 제국의 호수’였던 지중해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비록 동로마 제국이 존재하긴 했지만 ‘통일된 로마’라는 강력한 주인이 사라진 상황에서 온갖 이민족들이 등장했고 사라져 갔다. 이 와중에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일어나며 유럽은 물론 스페인을 거쳐 북아프리카 일대까지 진출하였다. 이중 반달족은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해적함대를 구성하여 일대의 많은 상선들을 약탈했다. 이들의 해적질은 6세기에 반달 왕국이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7세기 이후부터는 이슬람의 세력이 커지면서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하게 되었다. 711년에 이들은 드디어 유럽 대륙의 스페인까지 진출하며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다. 바다에서는 알제리, 튀니지 및 리비아 등의 북아프리카 기반의 이슬람 해적들이 선단을 구성해 유럽의 상선을 공격했다. 동시에 이들은 남부 프랑스, 코르시카, 시실리, 이탈리아, 그리스를 비롯한 지중해 일대의 모든 유럽 해안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랍 해적들은 신속하게 상륙하여 치고 빠지는 공격을 선호했다. 일단 목표한 마을을 점령한 후 거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했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들을 노예로 데리고 왔다. 이들의 해적질은 통치자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기독교에 대항하여 해상에서 진행되는 일종의 지하드(성전 聖戰)로 간주되었다. 물론 노예 거래를 통한 경제적인 이익도 상당하였다. 특히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시실리나 남부 이탈리아의 해안이 주요 표적이 되었다. 해안에 사는 이탈리아인들은 이들 아랍 해적들을 무서워하여 마을 곳곳에 파수대를 세웠고 많은 사람들이 아예 내륙으로 이주했다(이탈리아 해안 마을 중 많은 수가 수직 절벽에 집을 지은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지중해 지역 유럽의 해안에는 점차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온 유럽을 정복할 것 같던 이슬람의 기세는 스페인에서부터 멈추기 시작했다. 1492년에 레콩키스타(Reconquista 스페인의 기독교 세력에 의한 이베리아 반도 재정복)를 완료한 스페인은 1509년부터 1510년에 걸쳐 북아프리카의 오랑(Oran)과 베자이아(Bejaia) 및 알제 인근의 엘 페뇽(El Peñón)섬에 요새를 세우고 수비대를 배치하여 알제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알제의 통치자인 ‘살림 알 투미(Salim Al Tumi)’는 증대하는 스페인의 위협에 맞서 복종 서약을 했고 조공을 바쳤다. 한편 또 다른 살 길을 모색하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가 찾은 고민 끝에 나온 ‘살 길’은 바로 당대의 강대국이자 같은 이슬람을 믿는 ‘오스만 튀르키예 제국’의 후원을 받는 것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는 알제를 돕기 위해 지중해 일대에서 해적으로 엄청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아루즈 바바로사(Aruj Barbarossa 바바로사는 이탈리아어로 붉은 수염이란 뜻이다)’와 그의 동생 키즈르(Khizr)를 보낸다. 원래 그리스 레스보스(Lesvos 고대 그리스의 여성 시인 사포가 여성들과 함께 이 섬에서 거주하며 사랑에 대한 시를 썼다. 이런 이유로 여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레즈비언’의 어원이 바로 이 섬에서 나왔다) 섬 출신이었던 형제는 해적이 되어 오스만 제국을 위해 유럽 국가들의 항구를 습격하고 이들의 배들을 약탈했다. 그는 마치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프란시스 드레이크 경(Sir Francis Drake) 같은 영국인처럼 국가로부터 약탈을 허용받고 일정 부분을 상납하는 ‘공인된 해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활동 시기로 보면 아루즈가 조금 더 빨랐다). 아루즈는 1516년에 동생인 키즈르와 함께 알제에 도착했고 페뇽 섬을 비롯한 스페인의 요새 및 정착지들을 몰아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알제의 실권자이자 자신을 불러들였던 ‘살림 알 투미’를 제거했는데 그의 아들은 간신히 도망쳐 스페인군에 지원을 요청한다. 1516년 9월 말, 무려 25,000명에 이르는 스페인군과 현지인의 연합 부대가 아루즈를 제거하기 위해 알제에 상륙했다. 아루즈는 이들을 상륙하게 놓아둔 뒤 기회를 노렸다. 스페인군은 좁은 해안에 무작정 한꺼번에 상륙해서 밀집 상태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아루즈는 성안의 정예 부대들을 출동시켰고 스페인 연합군에게 8,000명에 달하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하였다. 이후 자신만의 확고한 영역을 구축한 아루즈는 알제를 오스만의 술탄에게 바친다. 술탄인 셀림 1세는 아루즈를 알제의 총독 및 서부 지중해의 최고 해군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알제는 본격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는데 사실상 상당한 자치권이 보장되는 하나의 독자적인 왕국이었다. 비록 아루즈가 1518년에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창검에 찔려 사망했지만 역시 해적이었던 그의 동생 키즈르에 의해 권력이 승계된다. 이때부터 키즈르 또한 형에 이어 ‘바바로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는 휘하에 있는 배들을 동원해 ‘오스만 제국의 해군’으로서 유럽 국가와 함선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1529년에는 알제 앞의 눈엣가시 같던 페뇽 섬의 스페인 요새를 점령하였고 1534년에는 튀니스를, 1538년에는 그리스의 프레베자에서 스페인과 베네치아의 연합함대를 격파하였다. 이후 지중해는 바바로사 휘하 해적들의 놀이터였고 본격적인 ‘바르바리(Barbary 유럽인들이 북아프리카의 해안 지역을 부르던 지명이며 베르베르와 어원이 같다) 해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알제는 그 중심에 있었다.

강력한 바르바리 해적들의 출현을 통해 지중해의 해상로는 엄청난 위협을 받게 되었고 유럽 각 국은 매년 이들에 의해 사로잡힌 수천 명의 포로들 처리 문제로 골치를 썩기 시작했다. 알제의 통치자에게 이들 포로들은 짭짤한 수익이 남는 비즈니스 수단이었다. 사로잡힌 이들을 석방하기 위해서는 ‘합의금’이 필요했는데 이 돈이 만만한 금액이 아니었다(당시 장교나 선장 등의 몸값이 현재 달러 기준으로 인 당 $10만 이상으로 추정된다. 선원들은 그 이하였다. 외교관이나 고위 관료들은 그 몇 배였다고 한다). 이를 위해 교회, 상인 길드, 지방 정부 또는 국가(특히 덴마크, 노르웨이 같은 해양 상업이 활발했던 국가들)가 별도로 예산을 책정하기도 했다. 16세기에서 18세기 중반까지 알제의 통치자들은 유럽 여러 나라들과 조공 협정을 맺었고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였다. 대개의 경우 교회에서 파견된 이들이 포로 교환 협상의 주축이었다. 당시 알제에는 유럽인 포로들이 기거하던 수용소가 있었는데 전성기 때는 그 수가 무려 3만 명에 이르렀다. 포로들은 각 국가별 섹터로 구분되어 수용되었다. 대부분 사슬에 묶여 있던 이들의 생활은 극도로 비참했으며 남자들 중 많은 수가 포로 기간 동안 쇠사슬을 찬 채 중노동에 투입되었다. 이후 노예로 팔려간 이들도 있었는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것이었다. 노를 젓는 일에 투입되면 사슬에 묶인 채 화장실도 앉아서 해결해야 했으며 꼼짝없이 채찍을 휘두르는 감시자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젊은 여자들은 유력자의 첩이나 성적인 목적을 위해 아랍 세계 여기저기로 팔려 나갔다. 일부는 술탄이 있던 콘스탄티니예(이스탄불)의 하렘으로 보내졌다. 노예 시장 및 무역은 알제의 경제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다. 알제는 포로수용소는 물론 이들의 몸값을 석방하기 위한 협상소와 유럽 각 국의 외교 사무소가 공존하는 기이한 도시였다. 위대한 소설가인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도 한때 바르바리 해적에 의해 납치되어 알제의 포로수용소에 5년 동안 갇혀 있었다. 그의 이러한 경험은 작품 속에 공포스럽게 투영되기도 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16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 유럽인 백만 명 이상이 바르바리 해적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항해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바르바리 해적들의 영역이 확대되었는데 과거 지중해 일대에서 활약하던 것에서 벗어나 대서양을 넘어 영국과 심지어는 극한 북방의 아이슬란드까지 진출하였다. 1631년 아일랜드의 볼티모어가 바르바리 해적에 의해 습격당했는데 마을 주민 전체인 237명이 납치되었다. 텅 빈 마을 일대는 오랜 기간 동안 완전한 무인 지대로 버려졌다. 훗날 온갖 고난을 뚫고 고향에 다시 돌아온 사람은 단 2명뿐이었다. 1776년에 미국이 독립한 이후 더 이상 대영제국의 보호를 받지 않는 이들의 선박들도 예외 없이 해적의 먹잇감이 되었다. 18세기말 상황은 상당히 심각했는데 신생국인 미국은 무려 세입의 20% 이상을 바르바리 해적에 납치된 선원들의 몸값으로 지출해야 했다. 당시 해군이 없었던 미국으로서는 이것이 현실적인 타협안으로 1795년부터는 알제에 매년 조공 아닌 조공을 바쳐야 했다(1797년부터는 트리폴리와 튀니스에도 조공을 바쳐야 했다). 일련의 상황에 미국 정부와 국민들은 대단히 분노했다. 그리고 그 분노가 축적되어 본격적인 반격으로 이어지려 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반격의 서막, 바르바리 전쟁
1785년 7월 미국의 상선인 마리아호와 도핀호가 포르투갈 연안에서 일주일 간격으로 바르바리 해적에 납치된다. 배와 선원들의 석방을 위해 미국 정부는 알제 측과 협상에 나서지만 해적들은 당시 기준 66만 달러(현재 가치로 약 1,600만 달러) 이상을 요구했던 반면 미국이 가용한 협상금은 4만 달러(현재 가치로 약 96만 달러)에 불과했다. 양 측의 입장 차가 크다 보니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두 배의 선원들은 근 10년 이상을 알제에 반노예 상태로 잡혀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또 다른 미국 배와 선원들이 해적에게 납치되는 일이 지속되었다. 1786년 당시 프랑스 주재 미국 공사였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일련의 납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의 런던에 있던 트리폴리(오늘날의 리비아로 알제, 튀니스와 함께 바르바리 해적의 3대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의 대사와 면담하였다. 제퍼슨은 트리폴리의 대사에게 “왜 바르바리 국가들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미국의 배를 납치하는가?”에 대해 물었다. 이때 대사의 답변에 따르면 ‘이슬람의 예언자(마호메트)’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죄인이며 이슬람교도는 이들을 노예로 삼는 것이 권리이자 의무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미국이 아무리 공물을 바치고 협상금을 주어도 바르바리 해적에 의한 납치는 끝나지 않을 것이란 의미였다. 제퍼슨은 해당 내용을 본국에 보고하였고 해적에 대해 더 이상 공물이나 협상금을 통한 방식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주관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같은 납치 상황에서 영국이나 프랑스 등은 우월한 해군력을 통해 바르바리 해적에게 ‘응징과 협상’을 병행했지만 해군력이 없는 미국은 협상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미국은 바르바리 해적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1794년 3월에 독립전쟁 이후 처음으로 해군을 재창설하였다. 1797년에는 ‘컨스티튜션호(USS Constitution)’ 등 첫 세 척의 프리깃함들이 진수되면서 본격적으로 해군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동안에도 미국은 바르바리 3국(알제, 튀니스, 트리폴리)에 대해 매년 조공을 바쳐야 했다. 시간이 흘러 1801년 3월에 제퍼슨이 미국의 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제퍼슨은 이제야 말로 바르바리 해적에 대한 그의 신념을 펼쳐 보일 때라고 생각했다. 그는 취임 직후 트리폴리의 파샤가 요구한 공물 지급을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미국이 과거의 약속을 어겼다고 판단한 파샤는 일체의 공식 문서 없이 미국 영사관의 깃대를 베어버리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이제 외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끝났고 바르바리 해적과의 무력 대결이 펼쳐질 차례였다.
제퍼슨 대통령은 1801년 6월에 4척의 소규모 함대를 파견할 것을 명령했다. 지휘관인 에드워드 프레블(Edward Preble) 제독은 나폴리와 시실리에 기항하여 보급 및 항구 사용에 대해 이들의 지원을 약속받는다. 미군이 목표로 하는 트리폴리는 150문 이상의 대포와 25,000명의 수비군에 의해 방어되고 있는 거대한 요새였다. 8월 1일에 미군은 소형 선박인 엔터프라이즈호가 트리폴리의 중무장선을 격침하면서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하였다. 이후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 이후 지중해의 겨울이 닥쳤고 작전은 해상 봉쇄를 유지하며 지속 전개되었다. 이후 장기적인 봉쇄가 1803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해 10월 말에 미국 프리깃함 필라델피아호(USS Philadelphia)가 임무 수행 중 암초에 걸리며 300명 이상의 승무원들이 트리폴리 측에 나포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미국 측으로서는 상당히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하지만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는 아군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고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조치가 필요했다. 1804년 2월 16일 밤, 트리폴리의 항구에는 작은 상선 하나가 항구로 진입하고 있었다. 사실 이 배는 미 해군이 나포한 트리폴리의 범선이었고 내부에는 60명의 미군 병력들이 타고 있었는데 말타의 상선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기존에 나포된 필라델피아호로 방향을 잡았고 순식간에 필라델피아호를 지키는 트리폴리 경비병을 급습했다. 경비병을 제압한 미군은 이후 필라델피아호를 조종하려 했지만 배는 출항할 상황이 아니었다. 디케이터는 곧 필라델피아호에 불을 질렀고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재빠르게 빠져나왔다. 이 대담한 작전은 적에게 나포된 자국의 배를 스스로 자침 시킨 것이었는데 디케이터는 미국에서 영웅이 되었다. 또한 영국의 넬슨 제독을 비롯한 각 국의 주요 인사들로부터 가장 대담하고 용감한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극찬을 받았다. 이후 해군에 의한 봉쇄가 지속되는 가운데 1805년 4월에는 동부 데르나(Derna)에서 미 해병대원 및 아랍 용병들이 상륙 후 낙타와 도보를 통한 사막 진군을 통해 트리폴리 측 육상 병력에 치명타를 입혔다(미 해병대가海兵隊歌 중 “To the shore of Tripoli”라는 구절은 바로 이 트리폴리 원정에서 나온 것이다). 해상과 육지에서 모두 상황이 이렇게 수세로 몰리자 트리폴리의 수비대는 결국 미군 측과 협상을 하게 되었고 1805년 6월에 트리폴리 조약을 통해 전쟁을 종결짓는다. 즉시 필라델피아호 소속의 미군 포로 307명이 석방되었고 조공은 폐지되었으며 미국 상선의 자유 항해가 보장되었다. 신생국 미국으로서는 첫 번째 해외 작전에서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전과와 의미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는데 이번에는 서쪽의 알제가 문제였다.
1812년 6월부터 미국과 영국은 독립전쟁 이후 다시 한번 전쟁을 치르게 된다. 수도인 워싱턴이 영국군에 의해 불태워질 정도로 피해를 입었던 미국은 대외적인 상황에는 거의 대응을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폴레옹 전쟁의 한가운데 휩쓸려 있던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을 틈타 바르바리 해적들은 다시 미국 및 유럽의 배들을 나포하기 시작했다. 특히 알제는 지중해에서 지원 세력을 필요로 하는 영국과 동맹을 맺었고 미국에 조공 재개를 요구하였다. 미국의 매디슨 대통령은 이런 알제의 태도에 강하게 분노했지만 영국과의 전쟁이 진행 중이라 당장 손쓸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1815년 2월 영국과의 전쟁이 종결되자마자 매디슨은 신속하게 알제에 함대 파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815년 5월에 미 해군은 10척 이상으로 구성된 대규모 함대를 편성하여 알제 출격을 개시했다. 주력 함대의 사령관은 십 년 전 1차 바르바리 전쟁의 영웅이자 이제 제독으로 진급한 스티븐 디케이터였다. 미국 함대는 20일 후 지중해의 관문인 지브롤터에 진입하였고 인근의 가타 곷(Cabo de Gata)에서 알제의 함대를 발견하였다. 미국 함대는 즉각 포격을 개시했고 격렬한 전투 끝에 알제의 기함인 1,800톤 급의 마쇼다(Mashouda)를 나포할 수 있었다. 며칠 후 스페인 인근 해상에서 또 다른 알제 함선을 나포했는데 이후 미국 함대는 나포선 두 척을 끌고 알제를 향해 전속력으로 진격했다. 마침내 6월 말에 도착한 디케이터의 함대는 알제의 통치자인 오마르 아가(Omar Agha)에게 간단한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내용은 당장 미국 선원을 석방하고 조약에 서명하지 않으면 알제 항을 포격하겠다는 것이었다! 오마르 아가는 미국 측의 요구에 분노했지만 상황은 상대적으로 전투 준비가 안된 알제 측에 극도로 불리하였다. 결국 며칠 동안 고민을 한 알제는 미국에 굴복했다. 1815년 7월 3일 디케이터의 기함인 게리에르호(USS Guerriere) 선상에서 양 측간의 조인식이 벌어졌다. 이 ‘알제 조약(treaty of Algiers)’을 통해 미국은 더 이상 알제에 조공을 바치지 않음을 분명히 하였으며 알제는 미국 포로들을 즉시 석방하고 향후 미국 국적의 선박을 나포하지 않음도 명문화했다. 이후 디케이터는 계속 항해를 이어갔고 동쪽의 튀니스와 트리폴리에도 같은 요구를 들이밀어 관철시켰다. 이것은 국제 정치가 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며 이제 그 힘의 축이 서구 쪽으로 옮겨지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짧았던 2차 바르바리 전쟁을 통해 미국은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통해 최대의 군사적, 외교적 성과를 이루어 냈다. 이제 다른 나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