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 포격전 (1816년)
알제 운명의 날
알제가 미국과 조약을 맺은 시점에 대륙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이 워털루 전투를 통해 종결되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 영국은 바르바리 해적 국가들과 협력했는데 이들은 지브롤터의 자국 요새 및 함대에 보급을 지원해 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전쟁은 끝났고 더 이상 이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침 종료된 비인 회의에서는 바르바리 해적의 ‘백인 노예제도’ 행위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하지만 당장 이행을 강제할 방법은 없었다). 이제 영국도 미국이 했던 것처럼 바르바리 해적 국가들의 납치행위 및 노예제를 근절하고 이들에게 더 이상의 금전적인 보상을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1816년 3월 영국 해군은 에드워드 펠류(Edward Pellew) 제독 휘하에 소규모 함대와 외교 사절을 편성하여 바르바리 3국으로 출항시켰다. 영국 함대의 위용을 본 튀니스와 트리폴리는 즉시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고 이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3국 중 가장 강경했던 알제는 상황이 좀 달랐는데 통치자인 오마르 아가는 해적 행위가 없다면 휘하 병사들의 급료를 줄 수 없다고 강하게 버티었다. 손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 사이에 양 측은 지쳐갔고 펠류 제독은 상황이 해결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함대를 돌려 다시 영국으로 귀환하였다. 펠류 제독은 알제 역시 영국의 제안에 동의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문제는 펠류 제독의 함대가 영국으로 귀환한 사이 벌어졌는데 영국 영사관의 보호에 있던 200명에 이르는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시칠리아 출신의 어부들이 알제 내부의 커뮤니케이션 오해로 인해 무참히 학살당한 것이다. 이 와중에 영국 영사 및 가족마저 억류되는 등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았다. 모든 일이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졌고 영국 정부 및 펠류 제독은 알제 측이 배신했다며 분노했다. 이제 양 측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은 듯 보였다. 펠류 제독은 네덜란드까지 가세한 연합 함대를 이끌고 알제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준비한다. 사실 이러한 방식의 유럽 국가들의 공격은 15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십여 차례 이상 있어왔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모두 그때뿐인 단기 미봉책에 불과했고 해적들은 다시 기회를 본 후 지중해와 대서양 일대에서 활개 치기 시작했다. 이제야 말로 바르바리/오스만 해적의 본진을 쓸어버리고 이들의 행위를 영구히 끝내 버릴 시간이 도래하고 있었다.
1816년 8월 26일 새벽 시간에 펠류 제독 휘하의 함대 26척은 알제 앞바다에 도착해 있었다. 전투함은 영국 해군이 20척이었고 네덜란드 해군이 6척이었다. 이들의 기함은 대포 100문을 보유한 퀸 샬럿호(HMS Queen Charlotte)이었고 5척의 전열함과 십여 척의 프리깃함 등이 주력이었다. 오전 8시경이 되자 펠류 제독은 백기를 게양한 소형 보트를 보내어 알제 측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조건에는 모든 기독교인 노예들을 즉시 석방하고 향후 유럽인들에 대한 납치 및 노예 제도를 중단할 것 등이 포함되었다. 알제 측은 영국이 잔뜩 독이 올랐다고 생각하고 다음 날 답을 주겠다며 의도적으로 답변을 미뤘다. 펠류 제독 입장에서 이것은 전형적인 시간 끌기에 지나지 않았고 적들이 공격 태세를 강화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이 유리해 보였다. 제독은 휘하 함선들에게 즉시 전투 배치 명령을 내렸다. 연합 함대는 항구를 포위한 채 닻을 내렸고 함 내에서는 선원들이 전투 전 최후의 예배를 드렸다. 저녁 시간이 되자 포수들은 항구의 각 목표를 재차 확인했고 포대를 방열하여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러는 사이 일자가 바뀌어 27일이 되었고 펠류 제독은 적의 발포 이전까지는 공격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11시 15분경 마침내 알제 측에서 퀸 샬럿호를 향해 발포를 개시했다. 순간 영국 함대가 마치 적의 포격을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대포에서 불을 뿜었다. 영국 함선들에 있던 수백 문의 대포들이 일제히 발사되며 알제의 항구와 성벽을 때렸고 이후 9시간에 걸친 양 측의 본격적인 난타전이 시작되었다. 기함인 퀸 샬럿호가 바다로 돌출한 성벽을 집중적으로 포격하자 이곳에 있던 대포들이 파괴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근처에 있던 탄약고에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방벽이 무너졌고 항구 내에 정박 중이던 알제의 함선 대부분이 폭발하거나 이미 침몰하였다. 알제 항구는 불길에 쌓여 있었고 대부분의 포대가 파괴되며 점차 저항이 줄어들고 있었다. 네덜란드 함대 역시 포격에 힘을 더하며 방어군의 잔여 포대를 제압하였다. 퀸 샬롯호 등 일부 영국 함선의 탄약고에 적탄이 명중하여 폭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 함대는 강했고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저녁 7시가 넘고 일몰 시간이 되자 항구 일대의 화재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펠류 제독은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고 알제 측에 다시 보트를 보내 즉시 협상할 것을 종용하였다. 오마르 아가가 사절을 보낸 것은 다음 날 새벽이었는데 모든 방어 수단이 무너진 상황에서 그에게는 더 이상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오마르 아가는 영국의 요청을 수락한다고 통보했으며 그렇게 장시간의 포격전은 마무리되었다.
비록 영국 및 연합 함대가 승리했지만 이들의 피해도 상당했다. 영국 해군 128명, 네덜란드 해군 13명이 전사하고 690명이 부상당하는 등 총사상자가 880명에 달했다. 훗날 밝혀진 알제 측 사상자는 무려 5,000명에 달했는데 병사들보다 민간인 희생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더불어 알제 측 함선 중 28척이 침몰하였고 10척가량이 대파되어 기능을 할 수 없었다. 항구 전체에 파괴된 전함의 파편과 알제 측 병사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포격을 위해 연합 함대는 무려 118톤의 화약을 사용했는데 사실 포격이 중단된 시점에서 남은 포탄이 그리 많지 않았다. 펠류 제독은 적절한 시점에 오마르 아가에게 속임수를 썼고 폭발과 화재 속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알제 측은 이에 말려 들어갔다. 양측은 영국 측의 요구를 문서로 작성하였고 펠류 제독은 영국 영사 및 가족과 총 3,000명에 이르는 백인 노예들을 해방시키며 귀환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지중해와 대서양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세력’은 이렇게 해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된 것이다.
한 시대의 종말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한대에 의해 결정타를 입은 알제는 함대가 무너진 상황에서 이전과 같은 대대적인 해적 행위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물론 소수 인원에 의해서 일부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하긴 했지만 이들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해적에 의한 약탈과 납치가 급격히 감소하자 알제의 경제 역시 극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한다. 주수입원을 잃은 통치자는 휘하 병사의 수를 줄여야 했다. 대외 무역도 더 이상 포로 배상금이 아닌 밀이나 기타 곡물 같은 정상적인 상품 교역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알제리는 특히 나폴레옹 전쟁 전 후 프랑스군을 위한 밀을 대량으로 공급했는데 문제는 이 대금을 프랑스가 장기간 제대로 지불하지 않게 되며 불거지게 된다. 알제의 통치자인 후세인(Hussein)은 700만 프랑에 달하는 곡물 판매 대금에 대해 프랑스에 지속적으로 상환 요구를 한다. 양 측은 이에 대해 해결책을 논의하지만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1827년 4월 후세인은 알제에 근무하던 프랑스 영사 피에르 드발(Pierre Deval)과 알제의 카스바에서 대금 상환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누게 된다. 하지만 도무지 답이 없는 대화가 오고 가던 중 양 측간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참다못한 후세인이 들고 있던 파리채로 영사인 드발의 뺨을 때려 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프랑스의 샤를 10세는 외교 사절에 대한 심각한 모욕을 ‘프랑스 국가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했고 즉시 알제 항구를 봉쇄하는 조치를 취한다(사실 이것은 당시 국내에서 인기가 없던 샤를 10세가 국민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알제 항구는 3년 간 봉쇄되는데 그 효과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고 오히려 이 기간 동안 바르바리 해적들이 봉쇄망을 뚫고 다시 해적질을 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결국 일련의 과정을 통해 프랑스는 알제를 직접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1830년 5월 중순 프랑스 남부 툴롱 항에서 560척 이상의 군함과 지원함 및 3만 7천 명에 이르는 프랑스군이 집결했는데 이들은 알제를 공격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선발대는 이미 5월 말에 알제에서 서쪽으로 25km 떨어진 ‘시디 페루슈((Sidi Ferruch)’에 도착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상륙한 프랑스군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없이 알제를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사실 알제 측도 이미 상황 파악을 하고 군대를 동원했지만 그 수는 많게 잡아도 3만 명 수준이었다. 그중 오스만 제국의 정예 부대인 예니체리는 7천 명에 불과했다. 프랑스군은 전 병력을 상륙시키고 천천히 진군했다. 6월 말 프랑스군은 알제 남쪽의 보르즈 물레이 하산(Bordj Moulay Hassan) 요새에 도착했다. 불과 2천 명 정도 되는 수비대의 이전에 없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압도적인 포병 화력을 바탕으로 7월 4일에는 요새를 점령하였다. 동시에 해상에서 봉쇄를 유지하던 프랑스 해군도 알제 시내에 다시 포격을 퍼부어 협공을 펼쳤다. 결국 알제의 통치자인 후세인은 프랑스군에 무조건 항복하였고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떠나도록 허락을 받은 후 나폴리로 초라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도시 함락 이후 프랑스군은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약탈을 자행했고 도서관 및 각종 공문서를 불태웠다. 또한 이때 알제에 보관되어있던 막대한 금과 은이 프랑스군에 탈취당했고 바로 프랑스로 옮겨졌다. 이렇게 해서 세기를 넘어 1962년까지 지속되는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통치가 시작되었다(프랑스의 ‘1848년 혁명’ 이후에는 알제리를 프랑스 본토의 일부로서 간주하여 3개 주로 나누어 다스린다. 많은 프랑스인들이 알제리에 이주했고 그곳에서 태어났다. 이런 이유로 전쟁까지 치르며 막을 정도로 여러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도 유독 알제리의 독립에 프랑스인들이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제 알제리인들은 프랑스인의 지배를 받으며 살기 위해 그들의 지시에 절대복종해야 했다.
알제의 함락은 도시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의미와 함께 한 시대의 종말을 뜻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이어지며 유럽인들에게는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던 바르바리 해적의 활동이 완전히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지중해를 누비던 이들 해적들은 이후 주아브(Zouaves) 병으로 알려지며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에 편입되었다. 주아브 병사들은 크림 전쟁, 1, 2차 세계대전 등 프랑스의 수많은 전쟁에 참여하며 역전의 용사들로서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아마 이들에게도 바르바리 해적 시대에 전승된 용감하고 뜨거운 피가 흘렀기 때문이리라.
오늘날 알제 앞바다는 지중해의 그 어느 곳 보다 평화롭고 파랗게 보인다. 이제 알제리는 과거의 수많은 굴곡을 뒤로하고 21세기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 해적이란 단어는 어감상 보통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때 ‘바다의 몽골 전사’ 같았던 바르바리 해적들의 강인한 DNA가 21세기 무한경쟁의 시대에 알제리인들에게 어떻게 긍정적으로 발현될지 한 번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