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8. 쾰른, 폭격기 천 대의 불지옥에서 살아남다(2)

영국 공군의 밀레니엄 작전(1942년)

by 이준호

‘폭격기의 강’을 만들다

밀레니엄 작전 출발 전 항공기 내 기기를 점검 중인 영국공군 폭격기 조종사

1942년 5월 30일 저녁 10시 전후로 영국 중부와 남부 일대의 53개 비행장에서 6천 명의 항공기 대원들이 출격 준비를 시작했다. 작전에 참여하는 조종사들에게 출발 직전 목표물에 대한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브리핑을 하는 장교들은 오늘 밤 대원들이 ‘대단히 특별한 작전’을 수행하게 될 것이며 모두 천 대 이상의 폭격기들이 동시에 동원된다고 운을 띄웠다. 동원된 항공기가 천 대라는 말에 브리핑을 받는 모든 승무원들이 일제히 터질듯한 환호성을 질렀다. 이것은 지금까지 독일 폭격을 위해 동원된 최고의 숫자였다! 전례가 없는 ‘천 대’라는 짧은 숫자 하나만으로도 대원들에게는 마치 독일군의 대공포화나 요격기 등 모든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마법의 방패’를 지닌 것 같은 느낌을 부여했다. 이후 목표물과 현지의 기상, 항로, 고도 및 편대의 대형 등에 대한 브리핑이 이어졌다. 특히 많은 수의 항공기가 동시에 작전을 하는 과정에서 상호 충돌하지 않도록 편대별 고도에 대한 세심한 고려가 이루어졌다. 엄격한 계산에 따른 확률을 보자면 작전 중 충돌할 가능성은 천 대 중 두 대였다(물론 어느 두 대가 충돌할지는 알 수 없었다). 참전 대원들은 총 6천 명에 달했는데 영국은 물론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또는 남아공 같은 대영제국 각지에서 참전한 용사들이었다. 더불어 조국과 가족을 나치에 잃고 복수심에 차 있던 폴란드 출신 대원들도 참여했는데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출격을 갈망하고 있었다. 최초에 작전은 5월 27일로 잡혀 있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해안방어사령부에서 해상수송로 보호를 위한 자신들의 對유보트 작전상 항공기를 내어 줄 수 없다고 지원 약속을 번복한 것이다. 마침 그날 오전부터 쾰른 상공에 덮인 심한 구름층 역시 작전일을 변경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변덕스러운 날씨야 그렇다고 쳐도 해안방어사령부의 거부는 엄밀히 말해서 영국군 내 조직 간 알력의 결과였다. 당장 급한 것은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해리스를 비롯한 폭격기 사령부였고 이들의 집요한 설득이 이어졌다. 결국 처칠까지 개입하며 해안방어사령부는 항공기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고 다시 항공기 대수가 원복 되었다. 이제 ‘천 대 작전’의 실행 만이 남았다.


이후 작전일은 5월 30일로 최종 결정되었는데 이 날 점검해 본 참여 항공기의 숫자는 천 대를 훌쩍 넘어선 1,047대였고 실제로 각 비행장에서 출격한 호위기까지 포함한 최종 숫자는 무려 1,103대였다(하지만 기체 이상이나 대공포화 등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해 실제 쾰른 상공까지 도착해서 작전을 수행한 것은 868대였다)! 참여 항공기의 절반 이상이 쌍발의 웰링턴 폭격기였다. 각 폭격기들은 기존의 일반적인 항공용 폭탄은 물론 다수의 소이탄을 실었는데 이것은 도시 전체에 대한 강한 화재를 통해 민간인 피해까지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영국의 목적은 명확했다. 영국공군은 아군 폭격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프랑스와 네덜란드 일대의 적 항공기지를 사전에 공격했다. 당시 독일군은 그들의 공군 장성 이름을 딴 ‘캄후버 라인(Kammhuber-Linie)’이라는 야간 요격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북해에서 프랑스와 네덜란드, 벨기에 및 독일 본토까지 레이더와 탐조등 및 요격기를 촘촘히 배치해 놓은 잘 짜인 방공망이었다. 초기 캄후버 라인은 영국군의 소규모 폭격을 사전에 예방하는데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했다. 문제는 이날 출동한 독일군 요격기들에게 나타난 것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규모의 영국군 폭격기들이었다는 것이었다. 마치 ‘거대한 강물’과 같은 이들의 흐름을 몇 대의 야간전투기로는 도저히 막을 길이 없었다. 전체 폭격기 부대를 인도하는 선발기들이 11시 이후에 영국 해협을 넘어 대륙으로 진입했고 총 3차로 이어지는 폭격대를 인도했다. 각 차수의 폭격대는 300대 이상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거대한 ‘폭격기의 강’을 이루었고 마치 성난 강물이 도시를 쓸어버리는 것처럼 웅장한 엔진 소리와 함께 연쇄적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쾰른 폭격을 묘사한 영국군의 기록화

영국군의 선도기들이 정확히 12시 47분에 쾰른 상공에 도착했는데 이 날은 보름달이 떠서 상대적으로 상공에서 지상의 식별이 용이했다. 심지어 시내의 전차 트램 라인이 보일 정도였다. 이후 1차 폭격대가 쾰른에 진입했는데 이들은 15분 동안 상공에 머물며 시내 중심부 주요 건물과 관공서 등에 본격적으로 폭탄과 소이탄을 퍼부었다. 시내 곳곳에 불길이 치솟으며 도시가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내에 강력한 폭격을 완료한 1차 폭격대는 즉시 영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막을 수 없는 폭격기의 거대한 흐름이 시작되었다. 이후 불길에 휩싸인 쾰른의 불길이 강해짐에 따라 2차 폭격대는 좀 더 수월하게 목표물에 폭격을 수행할 수 있었다. 멀리서 불길 속에 대성당의 윤곽이 보이는 가운데 2차 폭격대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고 1차 폭격에 의해 이루어진 화재가 서로 연결되어 급속도로 확장하게 만들었다. 이후 3차 폭격대가 들이닥쳤고 도시의 주요 인프라 시설인 철도역과 주요 전술 목표에 적재한 폭탄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이때 즈음에는 정신을 차린 독일 방공망이 강화되었고 수십 대의 항공기가 쾰른 도착 전에 임무를 포기해야 했다. 폭격은 총 90분 이상 이어졌는데 폭격기 대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거의 도시 전체가 불바다인 상황에서 밑에 있는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영국군은 총 1,478톤의 폭탄과 소이탄을 투하했고(이 중 3분의 2가 소이탄이었다) 이로 인해 쾰른 전역에 2,500건 이상의 크고 작은 화재를 발생시켰다. 한편 일련의 폭격 과정에서 영국군은 43대의 항공기를 상실했는데 전체 참여한 폭격기의 숫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미미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대부분의 손실은 독일군의 대공포화에 피격된 것이었다. 비록 손실이 있었지만 기존 예상보다는 훨씬 적은 비율이었고 작전은 대단히 성공적인 것으로 판단되었다.


다음 날 아침 영국인들이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영국 전역의 신문들은 ‘사상 최대 천 대의 공습, 쾰른을 때리다!’라는 호외를 배포했다. 폭격기 사령부의 해리스는 자신의 주장이 옳았다고 의기양양했고 드디어 영국군 내 폭격기 사령부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이들을 침묵시킬 수 있었다. 밀레니엄 작전의 후견인인 처칠 역시 크게 기뻐하며 쾰른 폭격을 영국 공군의 위력과 실력을 증명한 사건으로 평가했다. BBC는 뉴스 시간에 쾰른 폭격을 반복적으로 보도하며 영국군이 드디어 본격적인 복수에 나섰고 반격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것은 또한 독일군에 의해 패배를 거듭하던 소련군에도 희망적인 소식으로 전파되었다. 게다가 당장 유럽 제2전선을 열라는 스탈린의 강력한 요구에 대한 영국의 ‘전략적인 답변’이 되었다. 이후 2번의 ‘천 대 작전’이 항구도시인 브레멘과 철강의 도시 에센에 대해 추가로 실시되었고 대규모 ‘전략 폭격’이 독일이라는 전쟁 기계를 쳐부수는데 분명 효과적인 수단임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한편 영국군 내에도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폭격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것은 소수였고 곧 묻히고 말았다. 민간인에 대한 폭격은 과거 바르샤바, 로테르담 및 영국의 각 도시에 대해 독일 측이 먼저 시작한 것이었다. 비록 영국군이 같은 방식으로 폭격한다고 해도 지금은 그런 것의 정당성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우선은 나치를 물리치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독일에 대한 전략 폭격은 계속되었다.


지상에 있던 사람들 그리고 불거진 윤리적 논란

밀레니엄 작전 이후 쾰른 대성당 주변의 파괴된 건물들 모습

영국 공군 대원들이 상공에서 지켜보았던 쾰른은 분명 불의 지옥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그 아래 있던 사람들이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알지 못했는데 독일 시민들은 영국군이 상상하는 그 이상의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쾰른의 방공 당국은 대규모 영국군이 공격하는 것을 감지하고 적절하게 공습경보를 내렸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경보가 울린 이후 평소 훈련대로 신속히 각 건물의 지하 방공호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방공호로 들어갔다는 안도감도 잠시, 곧 밖에서 들리는 반복되는 폭격의 굉음에 폭탄이 언제 방공호를 뚫고 덮칠지 몰라 공포에 떨고 있었다. 폭격이 심해지는 가운데 방공호의 건물이 흔들리며 천장에서는 시멘트와 횟가루가 떨어졌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로 가득 찬 방공호는 숨쉬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염으로 가득 찬 밖에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쾰른의 소방대는 평소대로 화재 진압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날의 폭격 규모가 여느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소이탄은 화재를 급속도로 증폭시켰다. 불길이 합쳐지며 거대한 화염 폭풍을 만들고 있었다. 소방대는 불길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어느 순간부터 거의 망연자실한 상태로 겨우 소방호스만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대한 불길로 인해 도시 전체가 마치 대낮처럼 밝게 빛났다. 몇몇 생존자들은 그 와중에 굳건히 서있던 대성당의 검은 실루엣과 미쳐 방공호로 가지 못한 채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하기도 했다. 1942년 5월 31일 밤의 쾰른은 분명 20세기에 펼쳐진 지옥의 발현이었다.

공습 후 파괴된 쾰른 시내의 잔해를 치우는 독일인들

공습 다음 날 모습을 드러낸 쾰른은 분명 이전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도시 전반에 걸친 광범위하고 치명적인 파괴가 발생했다. 시 당국에 따르면 총 12,840채의 온갖 건물들이 화재와 폭풍의 피해를 입었다. 이 중 2,090 채 이상은 심각한 피해를 입으며 중파 되었다. 또한 2,560채의 각종 공공 및 상업 용도의 건물이 화재로 완전히 불타며 소실되었다. 여기에는 7개의 행정부 건물, 7개의 은행, 9개의 병원과 17개의 교회 및 16개의 학교가 포함되어 있었다. 기타 수십 개의 호텔, 백화점, 우체국 등도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것은 도시가 상당히 오랫동안 전반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함을 의미했다. 산업시설로는 시 북쪽에 있던 포드의 자동차 공장과 화학 회사 IG파르벤의 공장 등이 직격탄의 피해를 입었다. 훗날 내가 자전거를 타고 건넜던 호헨촐레른 다리도 이때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완전 붕괴는 1945년에 독일군이 후퇴 시 폭파시킬 때 발생했다). 이 와중에 쾰른의 상징이자 가장 거대한 건물이었던 대성당은 몇 발인가 폭탄의 직격탄을 맞는 피해를 입었지만 기적 같이 살아남았다(반면에 바로 근처에 있던 장크트 마르틴 St. Martin 교회는 대파되었다)! 수많은 건물의 파괴에 따라 무려 45,000명의 사람들이 거주지를 잃게 되었다. 이러한 재앙에 가까운 상황이 펼쳐졌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경찰 추산에 따르면 사망자는 469명, 부상자는 5,000명 수준으로 예상보다는 적은 수치였다. 결국 거대한 규모의 폭격에 대해 나치도 마냥 침묵할 수만은 없었다. 선전상 괴벨스는 쾰른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있었지만 도시는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설 것이며 이를 통해 독일 민족이 더욱 단결할 것임을 강조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물론 피해 규모는 애써 축소했다. 하지만 아무리 나치가 피해를 축소한다고 해도 도시의 기능이 마비된 곳에서 생활을 이어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생존 시민들은 하나, 둘 도시를 떠나기 시작했다. 폭격 다음날 아침부터 쾰른의 대성당 인근에 위치한 중앙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탈출하기 위해 몰리며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공습 후 최대 15만 명에 이르는 쾰른 시민들이 도시를 떠난 것으로 추산되었다. 쾰른을 떠난 시민들에 의해 지옥 같은 공습의 이야기가 독일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공습을 경험하지 못한 독일인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확산시켰다. 이것은 히틀러가 천년을 지속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제국에 대해 독일인들의 강한 의심을 불러왔고 자국의 최후 승리에 대한 확신을 급격히 희석시켰다.


밀레니엄 작전을 통해 폭격기 사령부의 수장으로서 확고한 위상을 구축한 아서 해리스는 이후 거칠 것이 없었다. 1943년부터 미군이 본격적으로 합류한 이후 낮에는 미군이, 밤에는 영국군이 독일을 폭격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이런 이유로 영국군 폭격기의 하부는 검은색으로 도장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독일의 산업 시설을 붕괴시키고 독일인들의 사기를 꺾으며 잠잘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해가 바뀌어 1945년이 되자 연합군의 승리는 확실했고 남은 것은 시간의 문제였다.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사흘 동안 미.영군의 폭격기 1,300대가 독일 동부의 고도인 드레스덴(Dresden)을 폭격했다. 이 도시는 전통적인 교통과 산업의 중심지로서 베를린과 프라하를 연결하는 축선에 있었고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인상적인 아름다운 곳이었다. 폭격기 사령부는 이곳을 공격하며 독일의 마지막 남은 저항 의지를 꺾고 소련군의 전진을 지원할 목적으로 작전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당시 도시에는 시민들뿐만 아니라 진격하는 소련군을 피해서 도망친 많은 독일 피난민들이 몰려 있었다. 사흘 간의 폭격 동안 드레스덴에는 쾰른에 쏟아진 폭탄의 두 배인 3,000톤의 폭탄과 소이탄이 쏟아졌다. 결국 도시 전체에 걸쳐 15만 채 이상의 건물이 부서졌고 25,000명의 시민들과 피난민들이 사망했다. 도시의 상징이었던 ‘프라우엔 교회(Frauen Kirche)’는 쾰른 성당과는 다르게 폭격을 맞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이후 20005년에 재건된다). 드레스덴의 폭격을 두고 수많은 비난이 쇄도했다. 이미 전쟁이 거의 끝난 상황에서 불필요한 폭격으로 엄청난 민간인 사망자를 초래한 것이 문제였는데 심지어 연합군 및 국제 사회에서도 ‘의도적 학살’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동시에 이에 대해 상당한 윤리적 논쟁이 불붙었다. 3년 전 쾰른 폭격 때와는 상당히 달라진 분위기였다. 폭격으로 인해 드레스덴이라는 도시는 지도상에서 문자 그대로 사라져 버렸고 남은 땅에는 불에 탄 수많은 시체와 건물의 잔해만 남아있었다. 이후 해리스의 별칭은 ‘폭격기(Bomber) 해리스’에서 불명예스러운 ‘도살자(Butcher) 해리스’가 되었다. 해리스는 이에 대해 드레스덴 폭격이 군사적 필요에 의해 행하여졌음을 거듭 주장하였고 (처칠과 같은) 정치가들이 자신들이 지시한 일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며 강한 불만을 피력했다.


봄날에 대성당을 오른 이후로도 난 여러 차례 쾰른을 방문하였다. 도시는 여전히 평화로웠고 독일의 여느 곳처럼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었다. 매년 11월 11일에는 도시 전체가 들썩이는 카니발이 열린다. 그 어느 곳에도 과거의 끔찍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것을 지켜본 대성당은 여전히 우뚝 서있다. 계속 성당을 보고 있으면 무엇인가 말이라도 할 것 같은데 아무 말도 없다. 마치 그 거대한 몸으로 모든 것을 다 포용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