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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쾰른, 폭격기 천 대의 불지옥에서 살아남다(1)

영국 공군의 밀레니엄 작전 (1942년)

by 이준호

“쾰른의 하늘을 가득 메운 수천 개의 불빛과 폭발은 방공 체계를 무력화시켰다. 천 대의 폭격기는 그 당시 우리의 어떤 방공 능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 요제프 캄후버(Josef Kammhuber), 쾰른 폭격 당시 독일 공군 야간방공사령관의 전후 증언 -


쾰른 대성당의 전경

처음에는 무작정 자전거를 타고 뒨발트(Dünnwald) 인근의 울창한 숲을 돌아보았다. 이후 좀 더 반경을 넓혀 주변의 회헨하우스(Höhenhaus) 일대까지 돌아다녔는데 그래도 전체 시간이라 해봐야 한 시간 이내의 짧은 코스였다. 어느 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좀 더 서쪽으로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오래지 않아 독일 어느 도시에나 있는 ‘베를리너 슈트라세(Berliner Strasse 베를린가街)’가 나왔다. 도로를 따라 계속 가다 보니 뮐하임(Mülheim)에 있는 튀르키예 이민자들의 되너 케밥(Döner kebab) 가게에서 풍기는 냄새가 후각을 상당히 자극했다. 마침 날도 좋았던 5월의 토요일인지라 아예 작정을 하고 계속 자전거를 밟았다. 계속 서쪽으로 가보니 쾰른의 주산업 중 하나인 ‘메세(Messe 독일어로 박람회)’로 먹고사는 여러 유명 호텔들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더 자전거를 밟자 드디어 천천히 흐르는 라인강과 평평한 바지선들이 보였다. 이왕 여기까지 온 이상 라인강을 건너가기로 했다. 자전거에서 내려 거대한 호헨촐레른 다리를 천천히 걸어가며 주변의 풍경을 감상했다. 저 조용히 흐르는 라인강이 로마 시대에는 북방의 사나운 야만족과의 경계였다. 또한 이 도시는 깨끗한 물로도 유명했는데 바로 모든 현대 향수 브랜드의 시초이자 향수의 대명사인 ‘오 드 콜로뉴(Eau de Cologne: 쾰른의 물이라는 뜻의 프랑스어)’가 시작된 곳이 바로 이곳 쾰른이었다. 다리를 건너가니 한쪽 끝에 오늘날 유럽의 모태인 ‘프랑크 왕국’을 건국한 카알(샤를마뉴) 대제(Karl der grosse)의 청동기마상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이 다리는 1936년 히틀러가 재무장을 선언하며 라인란트의 중심지인 쾰른에 군대를 진주시켰을 때 독일군 선봉부대들이 구스 스텝(Goose step 마치 거위가 걷듯이 다리를 쭉 펴고 행진하는 방식)으로 건너간 바로 그곳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에 많은 역사의 장면들이 눈앞을 교차하며 지나갔다. 다리를 건너서 다시 자전거를 타려다 보니 눈앞에 엄청난 규모의 시커먼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 도시의 주인공이자 상징인 ‘쾰른 대성당(Kölner Dom)’이었다! 길을 건너려는 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보였는데 대게 그 종착지는 이 성당 아니면 바로 옆의 중앙 기차역이었다. 성당 바로 밑에서 올려다보니 쌍둥이 첨탑이 도무지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더 미룰 이유가 없었다.

쾰른 대성당 전망대에서 바라본 라인강과 주변 풍경. 가운데 건물은 전쟁 중 파괴된 후 복원된 장크트 마르틴 교회 (St. Martin Kirche)

즉시 자전거를 맡기고 입장권을 사서 1248년부터 1880년까지 무려 600년 동안 지었다는 성당으로 들어갔다. 장엄하게 보이는 고딕식 실내와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를 거쳐 전망대를 목표로 500개 이상 되는 좁은 나선계단을 걸어서 올라가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숨을 헉헉대며 힘들게 올라갔는데 100m 이상의 전망대(첨탑을 포함한 성당의 전체 높이는 157m이다)에서 바라보는 라인강과 주변의 풍경은 아래에서 보았을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마침 날도 좋았는데 올라올 때 힘들었던 것은 순식간에 잊혀졌고 ‘와!’라는 감탄사 한 마디가 절로 튀어나왔다. 지난 몇 달 동안 보았던 낮은 건물만 있던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는 좀처럼 경험해 볼 수 없는 멋진 순간이었다.


다시 계단을 내려와서 밖에서 성당을 살펴보았는데 사실 건물이 오래되어서인지 감탄했던 전망대의 풍경과는 다르게 그 외관 상태가 그다지 깨끗해 보이지 않았다. 성당은 60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거의 검은색에 가깝게 보일 정도로 어두운 색을 띠고 있었다. 또한 한쪽 벽면에는 일부 허물어진 것 같은 부분도 보였는데 부분적으로 보수 중이었다. 비록 일부가 허물어졌지만 이 정도 규모의 오래된 건물이 전쟁 중 그 엄청난 폭격을 겪고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전쟁 중 쾰른이 겪은 수많은 폭격 중에서도 가장 심각했던 것은 1942년 5월의 마지막 날 벌어진 것이었다. 엄청난 수의 폭격기들이 쾰른 상공을 뒤덮었는데 이 날은 폭격을 당하는 독일인들은 물론 하늘에서 공격하는 영국군 모두에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두 남자의 고민

영국공군(RAF) 폭격기 사령부의 수장이었던 아서 ‘폭격기(Bomber)’ 해리스(Arthur ‘Bomber’ Harris)

1942년 봄, 2차 대전의 양상은 전년과 비교할 때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고 파죽지세로 진공 하며 그 정권을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히틀러의 야망은 모스크바 코 앞에서 좌절되었다. 소련군의 투지와 때마침 도착한 러시아 겨울 고유의 가혹한 날씨인 동장군(冬將軍) 덕분이었다. 소련군은 여세를 몰아 적을 계속 밀어냈지만 당시 소련군의 능력으로는 독일군을 완전히 끝장 내기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했다. 한편 극동에서는 일본군이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서구 식민지들을 공략하면서 진격하고 있었다. 미국, 영국 등 서방 연합국들은 유럽과 태평양의 양쪽 전선을 신경 써야 했는데 미국은 이제 막 전쟁에 뛰어들었고 본격적인 공략을 위해서는 아직도 준비가 필요했다. 영국은 1940년 여름 이후 나치의 하늘로부터의 침공을 간신히 막아내며 겨우 한숨을 돌린 상황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스탈린은 소련에 대한 독일의 압력을 덜기 위해 영국의 처칠에게 유럽 내 ‘제2 전선’을 열 것을 강하게 요청한다. 문제는 독일이 비록 일시적으로 밀리기는 했지만 당시 독일군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고 영국이 당장 유럽 대륙에 상륙하거나 공세를 취할 상황은 아니었다. 사실 영국군은 공세는커녕 사방에서 밀리고 있었다. 멀리 극동에서는 얕잡아보던 작은 체구의 눈이 찢어진 일본군에 의해 홍콩, 말라야(말레이시아)와 ‘대영제국의 보석’인 싱가포르가 차례로 넘어갔다. 또한 유럽과 가까운 북아프리카에서는 ‘사막의 여우’ 롬멜(Erwin Rommel)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했고 이집트 쪽으로 끝없이 후퇴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장들이 비록 영국 본토는 아니었지만 동남아의 식민지 상실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이 부족해짐을 의미했고 북아프리카. 특히 이집트를 상실할 경우 영국의 보급 생명선인 수에즈 운하가 위험했다. 더불어 대서양의 바다에서는 카를 되니츠(Karl Dönitz) 제독의 독일 유보트 잠수함전대가 미친듯한 속도로 연합군 함선들을 격침시켰다. 특히 1942년 3~4월에는 무려 600여 척 이상의 연합국 상선이 격침되면서 영국에 대한 보급을 거의 한계상황으로 몰아갔다. 무엇보다도 심각했던 것은 일련의 패배가 국민들의 전반적인 전시 사기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1942년의 봄은 영국에게 총체적인 위기 상황이었다. 마치 불독같이 근성 있고 낙천적인 기질의 처칠이었지만 그 조차도 이때만큼은 드러나는 근심을 숨길 수 없었다.


아서 해리스는 1892년 영국 남부의 첼트넘에서 태어났다. 그의 일생은 전 세계에 뻗쳐 있던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그대로 반영했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에 주재한 공무원이었고 아들인 해리스를 영국에 있는 기숙학교에서 공부시켰다. 소년기부터 모험적인 삶을 추구했던 해리스는 18세가 되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남아프리카의 로디지아(오늘날의 짐바브웨)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농장을 관리하며 생활했다. 아프리카에서의 삶은 1914년 8월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바뀌었는데 해리스는 애국심의 발로로 현지의 로디지아 연대에 입대하게 된다. 그는 부대의 나팔수로서 남서아프리카 내 독일군과의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이곳의 전쟁이 종료된 1915년 7월 이후에는 유럽에서의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영국으로 귀국하기로 결심했다. 해리스는 영국에서 기병대나 포병대 등의 병과를 원했지만 해당 자리는 쉽게 결원이 생기지 않았다. 이렇게 병과를 찾으며 기다리던 중 운명과도 같이 왕립 비행단(Royal Flying Corps: 영국 공군의 전신)에 소위로 입대할 수 있었다. 당시 전투기 조종은 미지의 영역으로서 마치 스포츠와도 같이 인식되곤 했지만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전쟁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모험심이 강했던 해리스에게 전투기 조종은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프랑스 전선에서 카멜 복엽기를 몰며 공중전에 참가했고 적기를 5대 격추시키며 명실상부한 에이스로 등극했다. 하늘 아래 전선에서는 수많은 병사들이 무인지대에서 기관총의 재물로 쓰러지고 있었다. 반면 조종사로 복무했던 해리스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공중에서의 공격이 지상에서의 살육전 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자신만의 이론을 굳히게 되었다. 1918년에 해리스는 새로 창설된 영국공군(RAF, Royal Air Force)의 비행 중대장이 되었고 아예 영국에 정착했다. 이후 20년 동안 그는 인도와 이라크, 페르시아(오늘날의 이란) 등에서 복무하였는데 때때로 항공기를 이용해 지역 주민들의 반란이나 분쟁 등에 개입하였다. 그의 역할은 항공기에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도록 장치하여 폭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중동의 부족민들에게 하늘을 나르며 이동하는 항공기와 여기에서 떨어지는 폭탄은 놀랄만한 것이었고 상당한 진압 효과를 보였다. 해리스는 자신의 방식으로 대영제국의 군인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다하고 있었다.


1939년 7월에 해리스는 팔레스타인에 근무하며 공군 소장으로 진급하였는데 전쟁이 발발하던 9월에 영국 본토로 전출되어 제5 폭격대를 지휘하게 된다. 폭격대를 통해 독일에 대한 전략 폭격을 주도하던 중 1940년 11월에는 공군 참모차장에 임명되어 하늘에서의 반격을 총괄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42년 2월에는 폭격기 사령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독일에 대한 폭격을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해리스가 취임하였을 당시 영국 폭격기 부대가 숱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는 것이었다. 우선 전반적인 폭격 작전의 성과가 너무나도 저조했는데 주간 공습으로 폭격기가 대량 손실되고 있었고 야간 공습은 성공 여부가 매우 부정확하다는 것이 영국 공군의 근본적인 문제였다. 사실 귀환한 폭격기 승무원들의 주관적 진술 외에는 폭격의 성과를 제대로 측정할 기준이나 방법조차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 공군은 1941년 8월에 폭격기 부대의 문제점을 집대성한 ‘버트 보고서(Butt Report)’를 발간한다. 보고서가 지적한 내용은 폭격기 사령부 모두에게 경각심을 가지게 하기 충분했는데 출동한 폭격기의 1/3만이 목표물에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투하 폭탄의 1/4 정도만 목표물의 8km 이내에 떨어졌다는 것이었는데 특히 독일 산업과 공업의 핵심인 루르 지역의 경우 강력한 대공포화로 인해 목표물 8km 이내 명중 확률이 1/10으로 줄어들었다. 더구나 보고서는 자신들이 명중했다고 주장한 승무원들 진술 중 1/3이 틀렸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점차 강화되는 독일의 촘촘한 방공망도 한 몫하고 있어서 많은 폭격기들이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폭탄을 투하해 버리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들에 더불어 폭격기 사령부는 기체 노후화에 따른 폭장량(폭탄의 장착량), 항속거리 및 방어력 부족 등의 문제에 직면했다. 이제 막 4발 엔진을 갖춘 핼리팩스(Halifax)나 랭커스터(Lancaster) 같은 신형 중형 폭격기들이 배치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수적으로는 미비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 전시 내각에서는 폭격을 통해 적의 산업 생산을 마비시키고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폭격기 사령부의 ‘전략 폭격’ 주장에 상당한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게다가 독일 공군의 집중적인 폭격을 받은 영국 대중들로부터 “우리도 보복하라”는 강한 여론이 형성되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신임 사령관인 해리스로서는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었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폭격기를 통해 전시 내각의 고관대작들은 물론 일반 대중 국민들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무엇인가 강력한 방안을 찾아야 했다. 처칠과 마찬가지로 해리스의 고민도 깊어만 갔다.


천 대의 폭격기를 동원하라!

독일군에 폭격 당한 버킹검 궁전을 살펴보고 있는 국왕 조지 6세 내외

1940년 여름과 가을에 벌어진 영국 본토의 항공전에서 조종사들의 악전고투를 통해 영국은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록 영국이란 국가 자체는 히틀러의 침략으로부터 잠시 벗어났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고통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41년 6월의 소련 침공 전까지 독일군은 하인켈 He-111이나 융커스 Ju-88 등의 주력 폭격기를 동원해 영국 전역의 도시들을 수시로 공습했다. 영국인들이 블리츠(Blitz 독일어로 ‘번개’라는 뜻)로 불렀던 폭격을 통해 시민들은 밤에 불도 못 켰고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수많은 아이들이 시골로 대피하여 부모와 생이별을 한가운데 성인들은 방공호나 지하철의 비좁은 터널 속에서 무작정 밤을 지새야 했다. 공습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시련이 지나간 것은 아니었는데 사방에 건물들이 무너지고 화염에 휩싸여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런던의 경우 특히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이스트앤드(Eastend)의 피해가 심했고 이곳 주민들은 왕족이나 상류층 사람들은 피해가 없다며 분노했고 거의 폭동 직전이었다. 그러던 1940년 9월 13일에 국왕인 조지 6세가 거주하던 버킹검궁 한 구석에도 폭탄이 떨어졌다. 폭격의 피해는 미미했지만 이것은 왕도 국민들과 함께 고통을 견디고 있다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왕비는 “이제야 이스트앤드 사람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생겼다”며 그동안의 괴로웠던 심경을 토로했다. 처칠의 전시 내각은 이것을 대내외에 알리고 국왕도 국민들과 똑같은 고통을 감내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왕궁이 한 번 폭격을 맞았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고 독일군의 폭격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모두들 그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암울한 시절이었다. 그런 동시에 많은 영국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강한 분노의 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바로 독일을 폭격해서 자신들이 당하는 것만큼 적국의 국민들도 고통받게 하라는 목소리였다! 물론 영국 폭격기 부대는 지난 1년 반 동안 나름의 임무를 꿋꿋하게 수행하고 있었지만 상부와 대중에 충분한 전과와 존재감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영국공군 폭격기 부대의 어깨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쌍발 엔진을 장착한 빅커스 웰링턴(Wellington Mark I) 폭격기. 전쟁 초기 영국 폭격기 사령부의 주력기였다.

아서 해리스는 부임 이후 연일 회의를 진행하며 다양한 부하들의 목소리를 경청했고 전략적인 대응책을 논의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눈에 띄는 액션을 통해 점차로 증대하는 폭격기 부대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거나 동시에 회의론에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폭격기들을 최대한 많이 모아서 적을 공격한다면 그만큼 타격도 커질 것임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즉, 손가락 하나로 툭툭 튀기는 것이 아니라 손을 모으고 거대한 주먹으로 만들어 적을 강하게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문제는 당시 영국군 폭격기 사령부의 가용한 폭격기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1942년 봄 기준으로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가의 모든 가용한 중.장거리 폭격기는 대략 500대 전 후의 숫자였다. 하지만 정비나 훈련 등에 따른 비가동 기체를 제외하면 실제 가용 대수는 400대 내외였다(해리스에게 최초로 보고된 정확한 숫자는 378대였다). 대부분의 폭격기들은 빅커스 웰링턴(Wellington)이나 핸들리페이지 햄프든(Hampden) 또는 암스트롱 위트워스의 화이틀리(Whitley) 같은 중형 쌍발 폭격기였다. 이들은 폭장량이나 항속 거리 면에서 분명히 한계가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최대한 많은 대수의 폭격기를 동원하자는 아이디어가 부상하자 해리스는 다시 한번 숫자를 점검해 보기 시작했다. 폭격기 사령부 소속 가용 대수만 계산해 볼 때 최대 500대 까지는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당시 영국 공군이 독일을 공습할 때 통상 150에서 200대, 최대 300대까지 동원했다는 점에서 500대라는 숫자는 분명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인가 획기적인 것을 내놓아야 하는 해리스에게 500대는 성에 차지 않았다. 1941년 5월에 독일공군이 런던을 폭격했을 때의 폭격기 숫자가 500대였는데 해리스에게는 그 이상의 숫자가 필요했다. 이를 통해 영국이나 독일 양국에 실질적으로 의미 있고 심리적인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폭격을 수행해야만 했다. 이제 해리스는 타 부대의 항공기까지 살피기 시작했다. 우선 영국 본토를 방어하는 해군 소속의 해안방어사령부가 떠올랐다. 이곳에 수소문해 보니 유보트 등을 공격하는 초계기 등 대략 150대가 전용 가능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렇게 되자 숫자는 순식간에 650대로 증가했다. 하지만 해리스는 아직도 만족하지 못했다. 이후 일부 수송용 또는 타 부대의 훈련용 또는 비전투용 기체를 닥치는 대로 계산에 넣었다. 대략 250대가 추가될 수 있었다. 이제 숫자는 가뿐히 900대를 넘기 시작했다. 이에 해리스는 아예 ‘천 대’를 만들기로 작정을 했다. 천 대는 그때까지 그 어떤 나라의 공군도 한 번의 폭격에 동원해 본 적이 없는 사상최대의 숫자였다! 해리스는 ‘천 대’라는 숫자로 마음을 먹은 이상 끝까지 밀어붙일 결심이었다. 숫자를 늘리기 위해 폭격기 사령부의 손실 기체들을 신속히 수리하여 복귀시켰고 마찬가지로 기타 부대에 있는 예비기들까지 총동원했다. 이렇게 되자 숫자는 어느새 거의 천 대에 근접했다. 그는 5월 중순에 해당 계획을 내각과 처칠에게 직접 보고하며 천 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독일에 강력한 영국공군의 힘을 보여주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당시 전 세계에서 영국군의 잇단 후퇴와 패배에 위축되어 있던 처칠은 처음에는 폭격기 천 대의 동시 동원 계획에 실제 가능한 것인지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해리스의 항공기 동원 계획과 설명을 들으며 이것이 엄청난 잠재적 정치적 선전 효과가 있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태생적인 모험가였던 처칠은 곧장 그 계획에 빠져들었고 이내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이제 해리스는 작전 수행에 있어 ‘처칠’이라는 가장 강력한 후원자를 얻게 되었다. 비록 숫자 상이지만 천 대는 확보가 되었고 이제 폭격기 사령부는 실질적인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작전 명은 ‘천(千)’이라는 숫자를 의미하는 ‘밀레니엄(Operation Millenium)’으로 명명되었다. 더불어 이것은 히틀러가 늘 공언하는 나치의 ‘천년 제국’을 천 대의 폭격기로 부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작전이 본격적으로 준비되는 가운데 목표물인 독일 도시에 대한 엄격한 심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목표물이 항공기들의 항속 거리 이내에 있어야 했고 항공에서의 식별이 용이해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엄청난 수의 폭격기들이 동시에 최대한의 타격을 입히려면 많은 인구와 산업 시설을 갖춘 대도시여야 했다. 여러 독일 도시들 가운데 몇 개의 도시가 마지막 후보지로 남았다. 북부의 독일 최대 항구 도시인 함부르크(Hamburg)와 군수산업체 크루프가 위치한 철강의 도시 에센(Essen) 그리고 서부의 산업 생산 중심지인 쾰른(Köln) 등이었다. 해리스는 개인적으로 독일의 수입 물자가 들어오는 함부르크를 공격하기 원했지만 변덕스러운 독일 날씨가 중요한 변수였다. 결국 몇 차례의 심의를 거친 후 5월 말일로 예정된 작전의 최종 목표는 ‘쾰른’으로 결정되었다. 쾰른은 독일 서부에 위치하여 상대적으로 영국에서 가까웠고 영국공군의 네비게이션 시스템 반경에 들어왔다. 라인강이 관통하고 있어 야간에 상공에서 식별이 상대적으로 용이했고 자동차 및 화학 공단이 있는 산업의 중심지였다. 더불어 당시 독일 내 4위인 70만에 이르는 많은 인구를 통해 공습의 효과가 크다고 판단되었다. 목표물은 결정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천 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쾰른을 폭격하는 것이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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