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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뮌헨, 악의 모든 시작을 지켜본 도시(2)

나치의 비어홀 폭동(1923년)

by 이준호

비어홀 폭동

비어홀 폭동의 무대였던 뷔르거브로이켈러의 1920년대 모습

1차 대전 후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비록 승전국이었지만 이탈리아는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얻은 것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나라 곳곳에는 러시아식의 혁명을 노리는 급진 좌파와 이들을 견제하려는 우익의 대결이 노골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공업시설이 많은 북부 이탈리아와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남부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파업과 데모가 이어졌다. 자신들의 지위에 위기를 느낀 산업자본가들은 외부의 정치 세력을 통해 위기를 벗어나려 했다. 이때 소위 ‘파시즘(Fascism 고대로마에서 집정관의 호위병들이 들고 다니던 ‘파세스’라는 자작나무 다발에 도끼를 낀 상징적 무기에서 따왔다. 자작나무 다발은 조직의 단결과 결속을 뜻한다)’을 신봉하는 제대군인 중심의 무리가 있었는데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라는 자를 그 리더로 했다. 이들은 집단의 단결을 중시했고 집단의 최고 레벨인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인의 이익도 얼마든지 침해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었다. 무솔리니는 ‘검은 셔츠단’이라는 파시스트 돌격대를 조직하여 반대파를 위협하거나 제거했다. 1922년 8월부터 이탈리아에서는 전국적인 반 파시스트 파업이 발생했는데 무솔리니는 정부가 파업을 방관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주요 도시별로 반사회주의 테러를 일으킨다. 급기야 일부 도시에서는 파시스트들이 자치 정부를 해산시키기도 했다. 일련의 상황에 경악한 로마의 정부는 반파시스트 진압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10월 말 무솔리니가 검은 셔츠단을 이끌고 한 발 빠르게 로마로 진군하며 쿠데타를 성공시킨다. 아무런 유혈 충돌 없이 완성된 쿠데타를 통해 무솔리니는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이 과정을 히틀러와 나치가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1923년 중반 시점에서 바이에른은 여러 독일 주 중에서도 가장 많은 혼란을 겪고 있었다. 좌익과 우익의 충돌이 계속되었고 8월에는 비상사태가 선포된다. 이후 주의 통치는 주정부 장관인 구스타프 폰 카르(Gustav von Kahr)와 경찰국장 한스 폰 자이서(Hans von Seisser) 그리고 육군 장군인 오토 폰 로소프(Otto von Lossow)에 의한 사실상 삼두정치가 행해지고 있었다. 이 당시 주장관인 카르는 히틀러 집회의 위험성과 개인적 야심을 인식했고 그와 나치의 회합이나 연설을 일체 금지시켰다. 나치 내부에서 불만이 고조되었고 바이에른 주정부를 뒤집고 베를린까지 진군하자는 과격한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행동을 하기에는 나치는 아직 전국적인 지명도가 약했고 자신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 히틀러는 1차 대전의 명장인 에리히 폰 루덴도르프(Erich von Ludendorf) 장군을 포섭할 궁리를 하게 되었다. 1923년 11월 8일 저녁 뮌헨의 대규모 비어홀인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는 바이에른 주정부와 우익단체들의 행사가 열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여러 연사들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이날 연사 중 가장 고위직은 주정부 장관인 카르였고 자이서와 로소프 등 바이에른의 고위급 인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히틀러가 노린 것이 바로 이때였다. 저녁 8시 30분경 비어홀 출입문이 열리더니 일단의 사람들이 내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히틀러와 괴링, 헤스 로젠베르크 등을 위시한 20여 명 정도의 나치 핵심 무리였다. 히틀러가 갑자기 권총을 들더니 한 발을 발사했고 “국민 혁명이 시작되었다”라고 외쳤다. 그렇게 비어홀 폭동이 시작되었다. 비어홀 바깥에는 미리 대기하던 600명의 나치 돌격대원들이 집합해 있었고 이들은 기관총까지 준비하며 건물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비어홀의 사람들은 사실상의 인질이 되었다. 히틀러는 카르, 자이서와 로소프 3인을 조그만 대기실로 집어넣었고 이들에게 권총을 든 채 쿠데타에 협조하라고 윽박질렀다. 주정부 장관인 카르는 처음부터 히틀러에게 협조할 생각이 없었고 그 생각을 그대로 전달했다. 카르 일행은 삼엄한 경비 속에 감시받고 있었다. 이후 히틀러는 부하들을 시켜 여전히 군부에 권위를 가지고 있던 루덴도르프 장군을 모셔오라고 급히 보내게 된다. 루덴도르프를 통해 군대나 여러 고위급들의 마음을 돌리려는 심산이었다. 그는 연단에 올라가서 자신의 적은 주정부나 군대가 아니라 베를린의 유대인 정부와 11월의 배신자들이라며 간교한 말로 선동을 했다. 히틀러의 연설은 효과가 있었는데 청중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동감을 표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어홀에 도착한 루덴도르프와 연단에 같이 올라가 연설도 하고 악수도 하며 마치 강한 사전 교감이 있었던 것 같은 모습을 연출하였다. 이후 밤이 깊어졌고 루덴도르프 장군은 카르를 비롯한 주요 인질들을 비어홀 밖으로 석방하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엄청난 판단 미스였는데 쿠데타 세력은 바이에른 권력자들을 인질로 잡고 있으면서 이들이 어떠한 반쿠데타적 대응도 못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권력자들은 밖으로 나갔고 이들이 어떤 명령을 내릴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치밀하지 못했고 급조된 상황 임이 하나, 둘 드러나고 있었다. 쿠데타 세력의 일부는 육군 공병들이 사용하는 병영을 점령하고 여러 폭발물이나 무기를 빼앗고자 했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히틀러는 이곳을 대포를 동원해 파괴할까 고민도 했지만 결국 아무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이후 새벽까지 시내 곳곳에서 군인, 경찰과 나치 돌격대 사이의 소규모 충돌이 이어졌고 희생자도 나오기 시작했다.

비어홀 폭동 시 트럭을 타고 출동 준비 중인 나치의 히틀러 호위대(Stoßtrupp-Hitler)

다음 날 해가 밝았고 히틀러는 상황을 점검해 보았는데 사실 나치 입장에서는 무엇 하나 달성한 것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치밀하지 못한 엉터리 쿠데타의 당연한 귀결이기도 했다. 자신들에게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게 된 히틀러와 나치는 최후의 행동으로 루덴도르프를 앞세워 뮌헨 시내 중심부를 향해 행진하려 했다. 약 2천 명의 나치당원들이 함께 움직였는데 이들의 목표는 오데온 광장 옆의 펠트헤른할레(Feldherrnhalle 1841년에 지어진 바이에른 군대의 명예를 기리는 추모의 사원)를 거쳐 최종적으로 바이에른 국방부로 가고자 했다. 하지만 진군은 쉽지 않았는데 주정부의 명령을 받는 군대와 경찰이 본격적으로 동원되면서 나치의 이동은 저지당했다. 펠트헤른할레의 사자상 앞에서 벌어진 총격전 끝에 15명의 나치와 4명의 경찰이 숨지게 되었고 더 이상의 진군은 불가했다(이때 사망한 15명은 훗날 나치 집권 이후 투쟁의 영웅으로 등극한다. 더불어 이들의 피가 묻은 나치 깃발인 ‘블루트파네 Blutfahne’는 나치의 성물聖物이 되었고 이들은 순교자로 추앙받았다). 이제 돌격대와 나치 추종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하나, 둘 체포되기 시작했다.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히틀러와 루덴도르프마저 도망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사타구니와 다리에 총상을 입은 괴링은 무려 다섯 차례나 수술을 해야 했고 이후 죽을 때까지 모르핀에 중독된 채 살아야 했다. 이렇게 해서 졸속으로 추진된 ‘코미디 쿠데타’는 불과 이틀 만에 그 어떤 목표도 이루지 못하고 끝장이 났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히틀러가 예상치 못했던 상당한 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실패한 쿠데타의 아이러니한 결과

비어홀 폭동 실패 후 란츠베르크 감옥에 수감된 히틀러(좌측 첫번째)와 헤스(우측에서 두번째). 히틀러는 바이에른 전통 스타일의 복장을 하고 있다.

쿠데타 실패 후 도망 다니던 히틀러는 이틀 후에 체포된다. 히틀러의 오른팔 헤스도 마찬가지였다. 괴링과 한프슈탱글(Ernst Hanfstaengl) 등 소수의 몇몇 만이 인근의 오스트리아로 탈출할 수 있었다. 폭동 사건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가 시작되었고 나치당과 관련 가담자들은 경찰의 수사를 받았다. 재판은 1924년 2월 말에 시작되어 한 달 이상 지속된다. 당의 지도자에서 국가 반역혐의의 피고가 된 히틀러는 사태파악을 했고 영악하게 행동했다. 그는 재판 중 자신의 행동이 국민들의 공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함을 강조하며 사람들과 재판관들의 동정을 샀고 이미지 개선에 힘썼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반유대적인 언동은 철저히 배제했다. 사실 이미 법원 내에도 친나치 성향의 사람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재판의 주임판사인 게오르크 나이트하르트(Georg Neithardt)가 상당한 우파 성향으로 나치에 우호적이었다. 이후 수많은 독일 언론에서 연일 그의 재판을 다루었고 히틀러의 재판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는 이제 전국적인 이슈의 중심인물이 되며 우익 사이에 인기를 더해갔다. 결국 히틀러는 국가 반역 혐의에 대해 5년 형의 ‘요새 금고형(Festungshaft)’을 선고받게 된다(우두머리 중 하나였던 루덴도르프 장군은 단순 가담으로 무죄 방면된다). 이것은 독일에서 군인 또는 고위급 정치범들을 성(城)과 같은 특수 감옥에 가두는 것이었는데 일반 잡범들과는 거리를 두는 것으로서 나름 편안한 형기를 보장해 주었다. 히틀러는 뮌헨 남서쪽 65km에 위치한 란츠베르크 감옥에 수감되었다. 단지 그는 몸만 갇혀 있을 뿐 이곳의 편안한 환경에서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고 일반 수감자들이 행하는 강제노동도 면제되었다. 더구나 란츠베르크 감옥에는 소시지, 햄 등의 육류와 과일과 같은 먹을 것도 풍부했고 심지어 와인이나 맥주 등도 얼마든지 마실 수 있었다. 간수들 중에서도 나치의 추종자가 많이 있었는데 일부는 히틀러를 존경하기까지 했다. 그는 더 이상 일개 죄수가 아니었고 마치 성의 주인처럼 생활할 수 있었다.


이런 안락하고 양호한 환경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는데 마침 그의 동료인 루돌프 헤스가 감옥에 같이 있었다. 히틀러는 나치의 핵심적인 주장과 사상을 집약하여 구술했고 이것을 헤스가 받아 적기 시작했다. 글의 내용은 순수한 아리아인으로서 금발에 푸른 눈(사실 갈색 머리에 청회색 눈을 가진 히틀러도 이 조건에 맞지 않았다)을 가진 독일 민족이 열등 민족으로부터 인종적 오염을 거부해야 하며 유대인과 공산주의를 쳐부수고 세계의 지배자로서 우뚝 설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또한 지배 민족으로서 동방(소련)에 있는 광활하고 기름진 땅들을 차지하여 독일인의 생활권(Lebensraum)으로 만들자는 황당한 주장을 강한 어조로 얘기하고 있었다. 9개월 후 히틀러가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석방되며 나왔을 때 이 장황한 글은 700페이지 이상의 두꺼운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그 제목은 ‘나의 투쟁(Mein Kampf)’이었다. 이후 ‘나의 투쟁’은 나치당의 바이블이 되었고 나치 집권 전후 독일 및 해외에서 천만 부 이상이 팔리며 히틀러에게 엄청난 인세를 안겨주었다. 이제 전 국민의 관심을 받으며 감옥에서 나온 히틀러는 자신의 좌충우돌 실수를 깨달았고 모든 것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하겠다는 지극히 냉철한 동시에 영악한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석방 9년 후인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합법적 투표를 통해 독일의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렇게 독일에서는 ‘민주주의 절차’인 선거에 의해 민주주의가 사망하게 되었고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될 ‘죽음의 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뮌헨 인근에 위치한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식사를 위해 줄 서 있는 수감자들

뮌헨은 이후 1938년 다시 한번 전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바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을 걸고 ‘뮌헨 협정’을 위해 독일,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의 대표들이 모였던 것이다. 히틀러의 협박과 우유부단한 영국 및 프랑스의 비겁한 양보로 인해 ‘동유럽의 가장 현대적인 민주 국가’였던 체코슬로바키아가 하루아침에 지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거칠 것이 없었던 나치는 1년 후 폴란드를 침공하며 본격적인 전쟁의 길로 나아갔다. 나치는 집권 이후 자신들의 정적들과 유대인, 집시 및 동성애자들을 조직적으로 박해하고 말살하기 위해 제국 내 여러 곳에 강제수용소를 세웠다. 그 최초의 장소가 1933년 3월에 뮌헨 북서쪽 16km 지점에 설치된 ‘다하우 강제수용소(KZ Konzentrationslager Dachau)’였다. 이곳은 이후 생겨날 모든 나치수용소들의 원형이었는데 친위대 소속의 잔인한 경비대원들은 줄무늬 죄수복을 입은 수용자들을 마구 구타하거나 고문했고 때로는 사소한 이유를 들어 살해했다. 1933년부터 1945년 나치 패망까지 4만 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다하우에서 죽거나 살해당했다. 다하우는 훗날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가는 나치의 첫 번째 징검다리였다.


독일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남쪽의 아름다운 파라다이스’는 역설적으로 거악의 모든 시작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뮌헨은 분명히 즐겁고 멋진 도시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 안에 감추어진 여러 비극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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