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폴리 공방전(1915~1916)
악전고투의 연속
갈리폴리에는 안작 군단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군과 인도계 병사들이 있었고 프랑스군 휘하에는 아프리카의 세네갈과 알제리에서 온 병사들도 있었다. 이들의 숫자는 총 7만 8천 명에 달했는데 안작 병사들이 반도의 남서쪽에서 전투 중이었고 영국군은 남쪽의 케이프 헬레스에 상륙하며 전투를 개시했다. 프랑스군은 최초에 오스만 군을 속이기 위해 아시아 쪽의 쿰칼레에 상륙했고 이후 프랑스군 주력은 영국군이 있던 케이프 헬레스에 합류했다. 문제는 오스만 군이 격렬하게 저항했다는 것인데 이들은 모든 곳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죽을 각오로 싸웠고 연합군을 고전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이들을 총괄 지휘했던 독일군 장교들의 우수함에 더하여 이들 못지않게 유능하며 작전을 조율했던 ‘무스타파 케말과 오스만 병사들의 애국심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5월 한 달 동안 양측의 치고받는 격전이 이어졌는데 특히 5월 19일에 오스만 군은 안작 코브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실시했다. 4만 2천 명으로 이루어진 오스만 군이 만 7천 명의 안작 군단을 바다로 쓸어버리고자 했다. 하지만 공수가 뒤바뀐 전투에서 오스만 군은 무려 만 명의 사상자를 내며 후퇴하게 된다. 물러설 곳이 없었던 안작 병사들이 결연한 각오로 적들을 막아냈던 것이다. 일련의 전투 이후 양 측의 무인지대에는 너무나도 많은 시체들이 뒹굴고 있었다. 양 측은 상호 합의 하에 5월 24일에 휴전을 했고 자국군의 시체를 옮기기도 했다. 잠시간의 휴전이 끝나자 다시 이전 같은 악몽이 계속되었다. 오스만 군은 거의 매일 밤 야간에 공격을 해왔는데 안작 병사들을 끊임없는 긴장과 공포 속에 몰아넣으며 전투 의지를 꺾으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불굴의 안작 병사들은 지독한 어려움 속에서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연합군 병사들에게 ‘알라후 아크바르(Allahu akbar: 신은 가장 위대하시다)’를 외치며 다가오는 오스만 군은 악몽 같은 존재였지만 사실 이들에게는 적군 못지않게 큰 또 다른 문제들이 있었다. 우선 지중해의 타는 듯한 태양과 더위였다. 많은 병사들이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일사병으로 쓰러졌고 극심한 탈수 증세를 보였다. 여름에는 시체 썩는 냄새가 훨씬 더 심했는데 파리떼가 사방에서 날라 들었고 심지어 병사들의 입속에까지 들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생을 찾는 것은 사치였다. 화장실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식수가 오염되어 이질과 콜레라 등이 만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물은 수송선을 통해 운반한 것만 먹을 수 있었는데 그나마도 개인별 배급 량이 있어 병사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이들이 있던 좁은 참호에는 쥐가 들끓었고 사방에 널린 전사자의 시체를 파먹어서 모두 살이 올랐다. 인간에 대해 겁이 없어진 쥐들은 심지어 부상병까지 공격할 정도였다. 또한 병사들은 휴식 시간에 옷 안에서 움직이는 벼룩을 잡는 것이 일상이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지독히도 딱딱했던 건조 비스킷(Hardtack: 우리의 건빵보다도 훨씬 더 단단한 거의 벽돌 같은 과자였다)이나 통조림 정도였는데 이것도 항상 부족했다. 이러한 자연 및 위생에 따른 문제에 더해 연합군 병사들을 괴롭히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오스만 군의 소리 없는 죽음과도 같았던 저격수였다. 오스만 군에는 어릴 때부터 사냥 등을 하며 저격을 체득한 병사들이 있었다. 오스만 군은 이들을 갈리폴리에 투입하여 집중적으로 운용했다. 많은 연합군 병사들이 동료들이 참호에서 머리를 들어 움직일 때마다 이마에 총알이 박히는 광경을 목격하며 심리적으로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된다. 총알이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좁은 참호 속에 갇혀 옴짝달싹 못했던 병사들의 사기는 극도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에 연합군도 저격수를 운용하여 오스만 군을 공격하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적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있어 그 효과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이렇게 갈리폴리는 안작 병사들을 비롯한 모든 연합군 병사들에게 현세에 있는 지옥이 되고 있었다.
안작 군단의 상황이 너무나도 어려웠지만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8월 초 안작 병사들은 전황을 타개하고 내륙으로 진격하기 위한 최대 규모의 공세를 준비한다. 8월 6일 영연방군이 안작 코브 북쪽의 수블라만에 상륙하며 남쪽의 안작 군단에 대한 압박을 덜고자 했다. 동시에 호주군이 ‘론 파인(Lone Pine) 전투’로 불린 공격을 통해 오스만 군의 일부 참호를 뚫고 나가기는 했지만 더 이상의 진격을 하지 못하며 공격이 중단됐다. 다음 날 호주 제3경기병연단 소속 2개 연대 병사들이 인근에서 공격 중인 뉴질랜드 병사들의 지원을 위해 ‘네크(Nek” 산길이라는 아프리칸스어에서 이름 지어졌다)’라 불리는 좁은 길목을 향해 돌격했다. 평소 같으면 말을 타고 돌격했을 호주의 경기병들은 이날 총검을 장착한 후 오스만 군 참호를 향해 함성을 지르며 뛰어갔다. 하지만 오스만 군은 이 좁은 산길에 기관총을 배치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장교의 날카로운 호각 소리에 따라 호주군이 참호 속에서 머리를 드는 순간부터 수십 명이 적의 기관총에 쓰러졌다. 전방의 무인지대를 가로질러 적진에 가기도 전에 대부분의 병사들이 기관총의 제물이 되었다. 돌격에 참여한 600명의 병력 중 370명 이상이 사상자가 되면서 이날 호주군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다음 날인 8월 8일부터 뉴질랜드군이 싸웠던 추눅 바이르(Chunuk Bair)에서는 양 쪽 병사들 간에 서로 뒤엉킨 채 백병전을 벌였다. 이들은 대검, 야전삽은 물론 맨 주먹을 사용한 지극히 원초적이고 잔인한 전투를 벌였다. 삶과 죽음을 오락가락하던 혈투를 통해 뉴질랜드군은 일시적으로 고지를 점령했다. 하지만 곧 잔뜩 독기에 오른 오스만 군의 반격을 받고 퇴각하게 된다. 사흘 간의 전투에서 뉴질랜드군 800명 이상이 전사했다. 8월 21일부터 안작 군단은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60 고지(Hill 60: 고지 높이가 60m였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이곳은 안작 코브와 북쪽에 상륙한 수블라만의 부대를 연결할 수 있는 중간 지점이었다. 영국군과 인도 및 용맹한 구르카 병사들까지 보충된 공격에서 연합군은 두 차례에 걸친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고 일부 성과도 있었지만 오스만 군은 여전히 고지를 내주지 않았다. 일주일간 지속된 전투에서 1,100명의 영연방군 희생자가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영국과 안작 병사들은 8월에 벌어진 일련의 공격에서 수블라만과 안작 코브 사이의 일부 해변을 장악한 것 외에는 어떠한 목표도 이루지 못했다. 모든 것이 공세 이전 상황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 와중에 엄청난 수의 사상자만 추가되었는데 한 달 동안 무려 4천 명이 죽고 8천 명이 부상을 당했다. 상륙 이후 최대의 희생이었다.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던 9월을 지나 10월이 되자 기온이 내려가며 티푸스 등의 전염병이 맹위를 떨쳤다. 11월에는 쏟아진 폭우로 참호가 침수되며 참호족염과 동상 등 비전투 피해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고 고위 장군들은 물론 런던에 계신 고관들도 ‘갈리폴리’라는 단어만 들어도 진절머리를 쳤다. 그리고 지금까지 철저히 금기시되어 그 누구도 감히 내뱉지 못했던 말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철수’라는 두 글자였다.
조국을 수호하다
1915년 10월부터 영국 전시내각에서는 갈리폴리에서의 철수에 관한 얘기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11월 초에 옴두르만 전투(1898년 9월에 수단의 옴두르만에서 마흐디스트 저항군과 영국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영국이 수단을 지배하는 결정적 승리가 됨. 처칠이 기병대 소위로 참전했다)의 영웅이었던 영국군 키치너 원수(Herbert Kitchener)가 갈리폴리의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현지를 방문했다. 현장을 둘러본 그는 절망적인 상황을 직접 보았고 철수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현지 지휘관 찰스 먼로(Charles Monro) 중장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렇게 해서 본격적인 철수 작전이 계획되기 시작했다. 1915년 11월 시점에서 연합군은 제일 북쪽의 수블라만과 그 남쪽의 안작 코브, 그리고 갈리폴리 반도 남단의 케이프 헬레스 세 곳에 분산되어 있었다. 철수해야 할 총병력은 무려 14만 명에 달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오스만 군의 공격이 예상되는 가운데 이 많은 병력을 무사히 철수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기적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했다. 안작 군단의 지휘관이자 신규 편성된 ‘다르다넬스군’의 사령관이 된 윌리엄 버드우드(William Riddell Birdwood) 장군은 오스만 군이 되도록 오랬 동안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작전 성공의 열쇠라고 생각했다. 철수의 기본 계획은 1차로 중간에 위치한 안작 코브의 안작 군단과 북쪽 수블라만의 병력을 철수시키는 것이었다. 이후 2단계로 남단 케이프 헬레스의 병력이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적을 철저히 속이기 위해 정기적으로 오는 보급선들이 변함없이 오고 갔다. 물론 그 와중에 병사들은 하나, 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전방에 있는 병사들은 오스만 군에게 먼저 공격을 하지 않고 이들이 공격해 올 시는 동시에 최대한의 화력을 퍼부을 것을 명령받았다. 각 전선에서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오스만 군은 연합군 진지에 쉽게 접근하지 못했고 이들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것이 이후의 대규모 반격을 위한 대기 상태라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여러 기발한 기만 도구들이 등장하는데 우선 각종 부비트랩을 설치하였다. 호주군 병사인 윌리엄 스커리(William Scurry)는 빈 깡통에 물을 담아 방아쇠와 끈으로 연결하고 일정 무게가 넘으면 자동 발사되도록 고안하였다(그는 이 발명의 공로로 진급하게 된다). 이를 통해 오스만 군은 갑자기 울리는 총성에 함부로 적 진지에 접근할 수 없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연합군은 서서히 본대가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수블라와 안작 코브에서 12월 20일 마지막 병력이 성공적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헬레스의 경우 오스만 군은 철수의 징후를 포착하였고 공격하려 했으나 연합군 해군 함포에 의해 진격이 저지되었다. 이 사이에 연합군은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연합군의 최후미 부대로 영국군 29사단의 제1하이랜드 경보병연대 1개 대대가 1916년 1월 9일 새벽 4시경 철수하였다. 이로서 9개월 15일 동안 지속된 갈리폴리에서의 혈투가 모두 종료되었다. 연합군에게는 기적이었던 것이 철수 과정 중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온전한 철수야 말로 수많은 실패로 점철된 이곳 갈리폴리에서의 연합군 작전 중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었다.
오스만 군은 헬레스의 연합군 진지를 조심스럽게 전진하며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며 긴장하고 있었다. 가끔 부비트램에서 폭발이 일어나거나 총소리가 나긴 했지만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예상대로 연합군 진지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진지 사방에는 도살한 말이나 노새 또는 파기된 포와 장비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오스만 군에게 남은 물자를 남겨주지 않기 위해 철저히 파괴한 결과였다. 이렇게 오스만 군은 불세출의 영웅인 무스타파 케말의 지휘 아래 당대 최강대국인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자랑스러운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은 단순한 전투에서의 승리가 아니었다. 수세기 동안 몰락하던 제국의 마지막이 될 뻔한 순간을 연장한 것이었고 케말이란 인물이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쟁 전체의 향방과 세계사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 위대한 승리였다. 비록 위대한 승리이긴 했지만 뼈아픈 희생이 수반되었다. 갈리폴리의 혈투 속에서 무려 25만 명의 오스만 병사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던 것이다. 이것은 연합군도 마찬가지였는데 총 25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그중 3만 5천 명의 병사들이 호주와 뉴질랜드의 안작 군단 소속이었다(사망자는 약 만 명이었다). 당시 이들 두 나라의 인구가 600만 명 수준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엄청난 희생이었다. 갈리폴리에 흘린 피를 통해 호주와 뉴질랜드 두 나라는 드디어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각성을 하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대영제국 아래 남반구의 자치령이었던 두 나라는 본격적으로 독립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호주는 2차 대전 중인 1942년, 뉴질랜드는 전후인 1947년에 사실상의 독립국이 된다. 갈리폴리는 이렇게 멀리 남반구에 있는 두 나라가 병사들의 피를 통해 국가로서의 의식을 고취하게 만든 신성한 장소이다.
과거의 적에서 영원한 친구로
현재 호주와 뉴질랜드는 매년 4월 25일을 안작 데이(ANZAC Day)로서 전몰장병들을 기리고 있다. 사실 이 날은 호주와 뉴질랜드의 병사들이 차디찬 에게해를 거쳐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한 날이다. 동시에 이날은 튀르키예에게도 중요한 날인데 자신들이 조국을 지켰던 승리를 기념하고 동시에 과거의 적이었던 호주, 뉴질랜드의 전몰 병사들을 함께 추념한다.
2015년 4월 25일 새벽 4시, 안작 코브에는 이른 새벽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이들은 갈리폴리 전투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행사장에는 영국의 찰스 황태자(Prince of Wales)와 해리 왕자, 호주의 토니 애벗(Tony Abbott) 수상 그리고 튀르키예의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ğan) 대통령 등의 귀빈과 참전국 대표, 참전병들의 후손 등 만여 명 이상이 참석하였다. 행사는 어둑한 새벽의 예배로 시작되었고 마침 안작 군단이 해안에 상륙한 시간에 열리게 되었다. 정확히 100년 전 같은 시간을 기념한 것이다. 각국 정상들의 헌화 및 경건한 묵념이 진행되었고 그렇게 다 함께 100년 전의 치열했던 전투와 사망자들을 기렸다. 영국, 프랑스 그리고 튀르키예는 당시 서로 물리쳐야 할 적국이었지만 이제는 같은 나토(NATO)의 회원국으로서 미래의 또 다른 적을 가상하며 공동의 보조를 맞추고 있다. 이날 호주의 토니 애벗 총리는 갈리폴리의 안작 병사들을 국가의 영웅으로 불렀고 다시 한번 이들의 강인한 정신을 기렸다. 행사는 튀르키예뿐만 아니라 런던, 파리, 시드니와 웰링턴 등 전 세계에 걸쳐 진행되었다.
과거 1934년에 대통령이었던 케말 아타튀르크(무스타파 케말)가 이곳에 묻힌 영연방 병사들을 추모하며 남겼다는 글이 있다. 이 추모사야 말로 갈리폴리 전투를 통해 희생된 양국의 병사들에 대한 튀르키예인들의 입장과 생각을 분명히 보여준다.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친 영웅들이여.
여러분들은 이제 친구의 땅에 묻혀 있습니다.
그러니 편안히 잠드시기를!
우리 땅에 어깨를 나란히 하며 영면한 자니와 메흐메트는 우리에게 차이가 없습니다.
머나먼 이국으로부터 아들을 보낸 어머니들이여, 눈물을 닦으시기를
여러분의 아들들은 우리의 가슴에 안겨 편안한 안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목숨을 잃은 그들은 이제 우리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니(Johnny)와 메흐메트(Mehmet)는 친구가 되었다. 갈리폴리/차날칼레의 이야기는 한때 전쟁터의 적이 어떻게 새로운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동반자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세계사 속의 흔치 않은 사례로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