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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파리, 광인의 파괴에 맞서 승리한 빛의 도시(2)

파리 해방(1944년)

by 이준호

고뇌하는 장군

파리의 마지막 독일군 군정사령관이었던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

파리에서 최후의 독일 군정사령관이 된 운명의 사나이 콜티츠 장군은 대대로 군인이었던 프로이센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당시의 다른 모든 독일 장군들이 그랬듯이 1차 대전에 참전했고 프랑스의 이프르나 솜므와 같은 가장 지옥과 같았던 전투에서 싸웠다. 종전 후 비록 조국 독일은 패배했지만 콜티츠는 유능함을 인정받아 군에 남을 수 있었고 독일군 재건에 힘썼다. 다시 2차 대전이 발발했고 그는 폴란드, 네덜란드 등에서 싸웠다. 네덜란드에서는 적의 중요한 교량을 점령하는 등의 공적을 통해 ‘기사십자 철십자훈장’이라는 높은 등급의 훈장을 수훈받았다. 또한 소련 침공 당시에는 남부집단군 소속으로 만슈타인 장군 휘하에서 세바스토폴의 격렬한 포위 전에도 참가했는데 그의 연대원들이 거의 괴멸할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한마디로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역전의 군인이었다. 콜티츠는 이후 1944년 3월부터 이탈리아에 배치되어 안지오와 몬테-카시노를 돌파하려는 연합군과 사투를 벌였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할 시점부터는 프랑스로 자리를 옮겼고 84 전투군단을 지휘하며 연합군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이제 파리가 해방되려는 중차대한 시점에 최후의 독일군 군정사령관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임무를 명 받고 파리로 이동하는 그의 마음은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더욱더 무거워졌다. 1944년 8월 시점에서 이미 대세는 기운 것이 분명했다. 파리의 화려한 뫼리스 호텔(Le Meurice)에 사령부를 둔 콜티츠의 휘하에는 사령부 건물의 화려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기가 저하된 소수의 병사들만 있을 뿐이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비전투병과 출신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더불어 독일군에게는 80대 정도의 프랑스제 구형 노획 전차나 대포가 있을 뿐이었는데 이것 역시 전력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존재였다. 심지어 8월 19일 프랑스 저항군 총봉기가 일어났을 때 독일군은 사실상 민간인들인 이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콜티츠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던 것이 있었는데 사실 그는 베를린의 ‘최고 군통수권자’로부터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히틀러는 인류의 문화유산인 파리를 잿더미로 만들기로 작정을 했고 주요 다리, 철도와 기념물은 물론 주요 건물들을 모조리 파괴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 문화와 파리라는 도시 자체를 사랑했던 ‘프로이센 귀족 출신 장군’의 마음을 미친 듯이 흔들어 놓았다. 당시 히틀러는 한 달 전인 7월 20일에 발생한 암살기도 및 반란사건(발키리 작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등 반히틀러파 장교들이 기획한 반란으로 히틀러가 폭발에서 극적으로 생존하며 반란은 당일 진압되었다)의 여파로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이후 그는 복수에 눈이 멀었고 수많은 반대파들을 사형시켰다. 동시에 광기 어린 명령들을 남발한다. 히틀러는 8월에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벌어진 ‘바르샤바 봉기’를 진압하면서 도시 자체를 파괴해 버릴 것을 명령했는데 독일군은 이것을 문자 그대로 실행해 버렸다(이때 바르샤바의 80% 이상이 파괴당한다). 따라서 콜티츠에게 내린 파리에 대한 폭파 명령은 단순한 엄포나 과장된 지시가 아니었다. 히틀러는 여차하면 파리를 ‘서부전선의 스탈린그라드’로 만들어 버릴 심산이었다. 이 시점에서 콜티츠는 히틀러가 분명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군인으로서 상관의 명령도 중요했고 자신의 병사들 생명도 소중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파리라는 ‘유럽 최대의 문화 도시’를 무참히 파괴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만약에 자신의 손으로 그럴 일을 벌인다면 그의 이름은 인류 역사에 엄청난 오명을 남길 것임이 너무나도 분명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군인이었고 명령은 명령이었다.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 및 노트르담 성당 등에 공병들에 의해 폭약이 설치되었고 이제 폭파 명령만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연합군이 다가옴에 따라 결정을 내릴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라울 노르들링(Raoul Nordling)은 1944년 8월 당시 파리에 주재한 중립국 스웨덴의 영사였다. 그는 파리에서 사업을 하던 아버지로 인해 이곳에서 태어났고 인생의 대부분을 파리에서 보냈다. 그에게는 프랑스어가 사실상의 모국어였는데 훗날 군복무를 위해 스웨덴에 귀국했을 때 오히려 스웨덴어를 배워야 했다. 노르들링은 프랑스에서의 배경을 통해 20대인 1905년부터 파리 주재 스웨덴 영사관에서 일했고 1917년부터는 영사로서 근무하게 된다. 비록 스웨덴인이었지만 파리는 그에게 있어 고향이자 인생 그 자체였다. 이제 그의 고향에서 독일군과 프랑스 저항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고 독일군이 도시를 파괴하려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립국의 외교관인 노르들링은 자신이 할 일을 인식했고 즉시 행동에 옮겼다. 노르들링은 양 측의 협상을 중재하려 했는데 총봉기가 일어나던 8월 19일에 콜티츠 장군과 접촉한다. 그는 콜티츠에게 파리에서의 무의미한 죽음과 파괴를 막자는 취지의 말을 전달했지만 처음에 콜티츠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얘기를 이어가는 중 ‘파리의 파괴’가 인류 역사에 오명을 남기는 범죄가 될 수 있고 이것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말을 통해 콜티츠의 마음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이것은 ‘도시의 파괴’가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콜티츠의 마음을 흔들게 된다. 게다가 현실적인 문제로서 당시 독일군 병력으로는 하루하루 증대하는 저항군도 제대로 막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콜티츠의 ‘마음의 무게 추’가 파리를 살리는 쪽으로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에도 여러 차례 베를린에서 걸려오는 히틀러의 전화는 다시 그의 결심을 무너지게 했다. 이렇게 여러 당사자들이 깊은 고뇌와 갈등의 시간이 흘러가는 가운데 피로와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노르들링이 8월 22일에 심장 발작으로 쓰러지는 일이 벌어진다. 그는 이후의 협상을 위해 자신의 동생 롤프를 스웨덴 영사 대리로서 내보냈다. 마침내 8월 23일 저녁 롤프 노르들링과 콜티츠가 뫼리스 호텔에서 만나 도시의 운명에 대해 담판을 벌이게 된다. 콜티츠 역시 쓰러진 노르들링과 비슷하게 심신이 지쳐 있었다. 그는 다가오는 연합군과 강도가 점점 세지는 저항군의 공격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롤프는 콜티츠를 재차 설득하며 파리를 파괴하지 않고 대신 항복하는 독일군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결국 콜티츠는 제안을 전격 수용하였다. 지난 며칠 동안 ‘천국과 지옥’을 수차례 오고 갔던 ‘한 도시’의 운명이 마침내 결정되었다. 더불어 콜티츠와 그 휘하에 있던 독일군 만 7천 명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마침내 도착한 구원의 손길

해방된 파리의 개선문에 들어서는 드골 장군

팔레즈 포위전이 벌어지던 8월 초만 해도 연합군 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와 그의 참모들은 파리 점령 시 250만 명에 이르는 시민들을 부양하기 위해 막대한 식량 조달이 필요함을 예측하고 있었다. 당장 전투를 위한 병참이 최우선이었던 연합군은 일단 ‘이 거대한 도시’를 우회하고자 했다. 파리 자체보다는 동쪽으로 진격을 하여 잔존 독일군을 쓸어버리고 군수산업의 핵심인 루르 공업지대를 점령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합군이 파리 근처까지 왔다는 소식에 프랑스 국내군이 일제히 봉기를 시작했다. 8월 19일 이후 지속된 봉기는 독일군의 허를 찔렀고 도시의 일부를 해방시키기도 했다. 문제는 당시 저항군에게 충분한 무기와 탄약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파리와 주변 지역을 관할하는 저항군 지휘관이었던 공산당 출신의 앙리 롤-탕기(Henri Rol-Tanguy) 대령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고 즉시 연합군 측에 전령을 보내어 즉각적인 지원을 요청한다. 패튼(George S. Patton) 장군 휘하의 미군 측과 접촉한 저항군 전령은 파리 시내의 심각한 상황을 전달하였다. 자유 프랑스군의 드골은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함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현재 연합군이 당장 파리로 진격할 계획이 없는 상황에서 공산당 주도의 해방이 이루어질 경우 임시정부 수반인 드골은 전후 정치 역학구도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드골의 생각에 파리의 해방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지휘하는 자유 프랑스군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이렇게 해야만 파리가 프랑스인들에 의해 해방되었다는 정당한 명분을 가질 수 있으며 이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도 강화될 터였다. 드골은 아이젠하워에게 파리 진격을 강력하게 요청한다. 하지만 아이젠하워의 관점에서 이미 파리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목표가 아니었고 굳이 소중한 병사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점령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명백한 거부 입장이었지만 이에 물러설 드골이 아니었다. 그는 즉시 프랑스 임시정부 차원에서 연합국 정치권에 압력을 넣었고 파리 해방에 대한 당위성과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연합국 차원의 이익을 설명한다. 결국 끈질긴 드골의 주장에 연합국 지도자들이 설득되었고 아이젠하워도 파리 진공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8월 22일 저녁이었다.


이렇게 파리 진격이 결정된 가운데 드골은 휘하 부대 중 가장 정예 부대인 자유 프랑스군 제2기갑사단을 진공 부대로 결정했다. 이 부대의 사단장인 필리프 르클레르(Philippe Leclerc de Hauteclocque 현재 프랑스군 주력 전차인 ‘르클레르’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940년 6월 조국이 독일에 항복한 이후 드골을 따라 자유 프랑스군을 이끌었고 북아프리카, 노르망디의 사선을 넘어 전투 중이었다. 진공 명령 시점에 그의 부대는 파리에서 서쪽으로 200km 떨어진 아르정탕(Argentan)에 주둔 중이었는데 즉시 부대를 출동시킨다. 부대는 다음 날 드뢰나 랑부이예 등의 도시를 거치며 진격을 이어 가는데 독일군의 소규모 저항을 격퇴하면서도 신속히 이동하였다. 르클레르는 적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한 프랑스 대위의 지휘 하에 주로 스페인 공화파(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스트인 프랑코에 반대한 세력)로 이루어진 소규모 정찰대를 보내게 된다. 이들은 장갑차에 나누어 타고 독일군과의 소규모 교전을 치르면서도 빠르게 파리로 진격했다. 마침내 8월 24일 저녁 8시경 정찰대는 파리 남쪽의 ‘포르트 도를레앙(Port d’Orleans)’에 도착했다. 다시 소규모 교전이 이어졌지만 그날 밤 9시 반에 정찰대는 마침내 파리 시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들은 즉시 시청 앞에서 가지고 온 프랑스의 삼색기를 게양했다. 4년 2개월 만에 드디어 파리가 프랑스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독일군과의 산발적인 전투가 연이어 벌어지긴 했지만 최후 순간의 의미 없는 저항일 뿐이었다. 아직 르클레르의 본대가 오지 않았지만 시청에 삼색기가 걸렸다는 소식은 사람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시민들이 동요하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해방의 날’이 온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인 체 르클레르 장군의 장갑차에 실려 포로수용소로 향하는 콜티츠 장군

8월 25일 이른 아침 독일군 사령부에서는 콜티츠 장군이 전날 프랑스군 선발대가 시청에 들어온 내용을 보고 받았고 이후 독일군의 마지막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이때 히틀러로부터 파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이 다시 전달되었지만 콜티츠는 이미 명령 불복종을 결심했다. 그렇게 파리는 파괴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독일군은 사실상 항복을 대기 중인 상황이었다. 콜티츠에 반대하는 일부 광신적 인원들(주로 친위대였다)이 연합군과 전투를 벌이기는 했지만 마치 넓은 호수에 돌덩이 몇 개 던지는 격이었다. 11시가 넘어서자 르클레르 부대의 선발대가 호텔 뫼리스에 도착하여 독일군과 항복 조건을 협의하기 시작했다. 결국 콜티츠는 무조건적인 항복에 동의하며 공식적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한다. 포로가 된 콜티츠는 고개를 숙이고 프랑스 장교들의 호위 속에 장갑차에 실려 호송되었다. 이 과정에서 파리 시민들에게 그의 모습이 노출되었다. 콜티츠가 히틀러의 명령을 불복종한 상황을 알 리 없는 일반 시민들은 독일군 군정사령관에게 그동안의 분노를 표출하며 온갖 욕을 해댔다. 이후 독일군은 하나, 둘 무장해제 당했고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도 독일군은 저항군에 잡혀 신체적 보복을 당할까 봐 극도로 두려워하였고 어떻게든 연합군 정규군의 포로가 되고자 했다. 자신들이 그동안 프랑스에서 지은 ‘죄의 무게’를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날 밤 에펠탑에는 다시 야간 조명이 켜지게 되었다. 오랜 암흑을 거쳐 빛의 도시가 부활한 것이다.


다음 날인 8월 26일 드골은 자랑스럽게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르클레르 장군을 포함한 프랑스군의 승리 퍼레이드가 샹젤리제와 콩코르드 광장을 거쳐 노트르담 성당까지 진행되었다(서두에 밝힌 내가 시내에서 이동했던 경로와 유사하다). 파리 시민들은 진심으로 기뻐했고 열광적으로 병사들을 환영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환희와 눈물이 어우러졌다. 임시정부의 선전에 따르면 이때 무려 200만 명 정도의 파리 시민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되었다(1998년 프랑스가 월드컵에 우승하기 전까지 이만큼의 파리 시민들이 모인 적은 없었다). 사람들은 병사들에게 꽃을 던졌고 샴페인을 주었으며 닥치는 대로 키스를 퍼부었다. 드골은 퍼레이드가 끝난 후 파리 시청에서 자랑스러운 해방에 대한 연설을 진행했고 이후 노트르담 성당으로 이동했다. 수천 명의 군중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성당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갑자기 수 발의 총성이 울렸다. 갑자기 울린 총소리에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졌고 이후 총격전이 오고 갔다. 부하들은 드골에게 안전을 위해 즉시 자세를 낮추도록 얘기했지만 큰 키의 드골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가던 걸음을 계속 걸어갔다. 이 사건은 프랑스인들에게 드골이 ‘강인한 지도자’라는 인상을 깊이 각인시켰다. 이로써 ‘스스로 세운 망명 임시정부’의 잘 알려지지 않던 인물이었던 드골은 진정한 ‘파리의 해방자’로서 우뚝 섰고 순식간에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도시가 해방되었다고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독일군에 붙어서 온갖 이득을 취하거나 함께 저항군을 탄압했던 사람들은 대중의 분노를 직접 받아야 했다. 많은 여성들이 독일군과 교제했거나 단지 잠자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머리를 삭발당했고 이마에 나치의 갈고리십자가가 그려졌다. 영화 ‘천국의 아이들(Les Enfants du Paradies)’에 출연한 프랑스 여배우 아를레티(Arletty)는 독일 공군 장교와 관계를 맺은 혐의로 수감되었고 삭발의 굴욕을 당한다. 역시 독일군 장교와 연인 관계였던 디자이너 코코 샤넬(Coco Chanel)은 비록 삭발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스위스로 도피해야 했다. 독일군에게 군용 트럭과 장비를 공급한 르노 자동차의 대표 루이 르노는 1944년 말 투옥 중 사망했고 그의 유족들은 르노의 지분 95%를 정부에 내놓아야 했다. 르노 자동차는 이후 프랑스 정부에 의해 국유화된다. 모든 사람들이 나름의 이유나 사정을 들며 독일군에게 협력할 수밖에 없던 상항을 합리화하려 했다. 일부는 사람들의 동정을 사기도 하며 사면되기도 하였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국민군 밀리스(Milice française) 소속 대원들이었다. 이 부대는 1943년 1월 친독 비시 정권 하에서 레지스탕스 토벌 및 유대인 색출을 위해 조직되었다. 부대원 중 많은 이들이 전과자 출신이었고 폭력적이며 지극히 잔인한 고문이나 처형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들에 대한 프랑스 대중의 분노는 문자 그대로 하늘을 찔렀다. 해방 후 붙잡힌 밀리스 대원 중 7,000명 이상이 처형당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들 대부분이 즉결 처형당했다. 총 13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대독 협력 혐의로 처벌 대상이었는데 이 중 4만 명이 징역형을 받고 투옥되었으며 공식적으로 767명에게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후 1947년에 프랑스 대통령이 된 드골에 의해 ‘사회혼란 방지’를 명분으로 대규모 사면령이 발표되었고 투옥자 중 절반 이상이 석방된다. 그렇게 프랑스는 전후의 심판을 정리하였다.


‘빛의 도시’를 구하다

영국의 포로수용소에서 독일군 장군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콜티츠(좌측 첫번째). 영국군 군복을 입고 있다.

파리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한 뒤 콜티츠는 즉시 영국 런던의 트렌드 파크 포로수용소에 수감된다. 이곳에는 다른 장성급 포로들이 같이 있었는데 이후 미국의 미시시피로 이송되며 포로 생활을 이어간다. 콜티츠는 연합군의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특별한 죄과가 드러나지 않았고 오히려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고 파리를 구한 의인으로 평가되어 연합군 사이에 높은 평가를 받는다(사실 수용소시절 연합군의 도청에서 콜티츠가 소련에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는 대화가 녹음되기도 했지만 ‘파리의 구원자’로서 그의 명성이 컸기에 그대로 묻혀버렸다). 1947년에 석방된 이후 동부 독일의 고향이 폴란드에 편입되어 버린 콜티츠는 프랑스군 점령지역인 서부의 바덴바덴으로 이주하고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는 1950년에 자신의 전쟁 시 경험을 정리하여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Brennt Paris?)”라는 회고록으로 집필한다. 회고록의 주요 내용은 히틀러의 광기 어린 명령을 거부하고 노르들링과의 협상을 통해 파리를 구하는 일련의 과정이 담겨 있었다. 사뭇 감동적인 내용이었지만 당시 파리의 독일군이 이미 힘 없이 유명무실했다는 점에서 볼 때 ‘지나친 자기미화’라는 비판도 많았다.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의 포스터

1966년 11월 콜티츠는 바덴바덴의 시립 병원에서 소련의 전장에서부터 그를 괴롭혀온 폐질환으로 사망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마침 바덴바덴에 주둔하던 프랑스군 대표들이 참석하여 ‘파리를 구한 독일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마침 그의 사망 직후 프랑스 감독 르네 클레망(René Clément)이 제작한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가 개봉되었고 전 세계에 파리 해방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시 한번 알게 해 주었다.


2018년 말 나는 다시 파리에 있었다. 장시간 비행에 지친 어린 딸을 데리고 곧장 에펠탑으로 갔다. 키 큰 성인인 나는 이미 주황색 조명을 켠 에펠탑의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비몽사몽에 졸린 눈을 한 딸아이는 연신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이제 에펠탑이 보이기 직전의 건물 모퉁이 앞에 섰다. 일부러 딸의 눈을 가리고 모퉁이를 돈 후 셋을 세었다. 눈을 떴을 때 만화책에서나 보던 반짝이는 에펠탑 모습을 본 딸아이의 표정은 놀람과 흥분으로 가득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아이는 신이 나서 에펠탑 방향으로 마구 뛰어갔다. 그렇게 파리는 우리 가족에게도 추억이 되었다. 이 도시가 많은 이들에게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오랫동안 기억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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