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해방(1944년)
- 파리 주둔 독일 군정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에게 도시의 파괴 명령을 내린 히틀러가 던진 질문 -
저녁의 비행기 출발 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야 말로 파리 시내를 제대로 한번 돌아보기로 한 다짐을 지킬 때였다. 우선 숙소가 있던 개선문 근처의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했고 간단히 물과 간식거리 등을 챙긴 후 가벼운 복장으로 출발했다. 이동 루트는 개선문에서 걸어서 노트르담까지 간 후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우선 남동쪽의 센강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개선문을 지나 샹젤리제에 들어가니 한 무리의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왔는지 신나게 웃고 떠들면서 사진을 찍느라 난리가 났다. 그 모습들이 귀여워서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더니 예상치 못하게 ‘폴란드’라는 대답을 들었다. 당시 폴란드는 불과 몇 달 전에 유럽연합(EU)에 가입했는데 그렇게 동유럽 국가들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상황을 파리에서 직접 체감할 수 있었다. 샹젤리제를 따라 조금 걷다 보니 ‘레스토랑 푸케(Restaurant Fouquet’s)’의 시그니처 같은 붉은 차양막이 보인다. 1930년대 후반 독일 망명자 신분이었던 작가 에리히 레마르크(Erich M. Remarque)가 개선문을 바라보며 소설 ‘개선문(Arc de Triomphe)’을 집필했던 곳이다. 더불어 당시 유럽의 수많은 반나치 망명자들이 이곳에 모여 시국을 논하고 자신들의 앞날과 생존을 걱정했던 곳이다. 레스토랑 푸케 건너편에는 ‘킹조지 5세(現 찰스 2세의 증조부이다)’역이 나왔고 계속 대로를 따라 걷다 보니 ‘프랭클린 루스벨트’ 역이 보였다. 도대체 이 국제적인 도시에는 곳곳에 유명인들의 이름이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아래로 계속 걸어가자 멀리서 에펠탑의 뾰족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에펠탑을 먼발치에서라도 보았으니 일단 파리에 온 목적 중 하나는 달성한 셈이었다. 센강에 도착한 후 엥발리드 다리(Pont des Invalides)에 서서 잠시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멀리서 높이가 낮은 평저 유람선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고 다리 위의 사람들은 사방을 둘러보며 연신 디지털카메라를 눌러댔다(아직은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의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TV에서 보던 전형적인 파리의 풍경이 펼쳐졌다. 다리를 건너 계속 직진하면 나폴레옹이 묻혀 있는 엥발리드가 나오지만 목적지를 향해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9월 중순의 파란 하늘과 청명한 날씨 속에 보는 파리 풍경은 너무나도 쾌적하고 아름다웠다. 계속 이동하여 오르세 미술관 앞을 지나갔고 프랑스 외교부가 있는 케도르세(Quai d’Orsay) 거리를 따라 한 골목 들어가니 여러 나라들의 국기와 대사관이 보였다. 잠시 후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Les Amants du Pont-Neuf)’로 유명했던 퐁네프 다리를 지나 마침내 시떼섬(Ile de la Cite: 시떼섬은 마치 한강의 여의도와 비슷하다. 이곳이 바로 기원전 3세기에 파리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에 들어섰고 눈앞에 익숙한 모습의 쌍둥이 건물이 보인다. 바로 목적지였던 노트르담 대성당이었다! 당시 성당 주변에는 온통 콰지모도(Quasimodo)란 이름으로 도배되었고 이와 관련된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콰지모도는 바로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의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의 주인공 이름이다. 과거의 명배우 앤서니 퀸(Anthony Quinn)이 등장했던 영화가 더욱 유명했는지 그의 모습이 담긴 포스터가 많이 보였다. 개선문과 샹젤리제를 지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마치 지난 수세기 동안의 프랑스와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관통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런 것이 바로 유럽의 몇몇 도시, 그중에서도 <파리>만의 고유한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카페에서 커피와 함께 식사도 하며 마음껏 파리를 즐겼다. 돌아가기 위해 다시 센강을 건넜고 개선문 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이번에는 좀 더 거리 안쪽을 돌아보려 했고 방돔 광장(Place Vendôme)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러는 동안 한 가지 느꼈던 것이 있었는데 길거리 곳곳에 많은 사진들이 보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거대한 흑백 사진이었는데 지나가며 다시 보니 마치 주변의 파리 시내 곳곳이 흑백 사진으로 도배된 것처럼 많이 보였다. 사진의 내용은 주로 전투 중이거나 이를 도와주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길에 걸린 사진의 내막은 1944년에 일어났던 ‘파리 해방 60주년’을 맞아 시 당국에서 그 당시 찍은 여러 흑백 사진을 전시했던 것이다. 촬영 장소들은 언뜻 보면 파리의 보통 거리나 다리이지만 많은 곳들이 60년 전 바로 그곳에서 벌어졌던 실제 사건이나 봉기에 대한 다양한 사연을 품고 있었다.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영문 설명을 읽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보니 돌아가는 길은 한결 수월하게 올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반나절 파리 일주’가 마무리됐다.
내가 보았던 사진에 나왔듯이 60년 전 파리는 다가오는 연합군과 함께 도시를 해방시키기 위해 시민들이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편, 이것을 막으려는 독일군도 그들 나름대로의 끔찍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나치의 군홧발 아래에서
1940년 6월 14일 피난을 가지 않고 남아있던 파리 시민들은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경악하고 말았다. 도시의 심장인 개선문과 샹젤리제 앞을 그토록 증오하고 두려워하던 독일군이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행진을 보며 많은 파리 시민들이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프랑스 정부는 이미 파리를 ‘무방비 도시’로 선언했고 남서부의 보르도로 피난한 상황이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 만슈타인 장군의 ‘낫질 작전(Sichelschnitt: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 계획)’에 의해 불과 6주 만에 절단이 나고 말았다. 1차 대전 후 그토록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건설했던 방벽 ‘마지노선’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그저 단단한 콘크리트 덩어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한 6월 14일 오후, 파리 최고층 건물인 에펠탑에는 ‘하켄크로이츠(Hakenkreuz: 나치의 만자卍字기)’가 내걸렸다. 마침내 6월 22일에 프랑스가 공식적인 항복을 했고 이틀 후인 24일에는 파리에 조금 ‘특별한 손님’이 방문했다. 그 손님은 바로 그 인생의 절정기에 있던 유럽의 지배자 히틀러였다. 그가 전속 조각가인 아르노 브레커(Arno Breker)와 건축가이자 관료였던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 등을 데리고 파리 관광에 나선 것이다. 이날 파리 시민들은 독재자의 관광을 위해 집 밖에 나오지 말라는 기분 나쁜 명령을 받았다. 자신감과 기쁨으로 충만했던 히틀러는 그의 벤츠 오픈카에 앉아 자신이 좋아하는 고전 양식의 오페라 하우스부터, 트로카데르 광장과 에펠탑 등을 둘러보았다. 그는 마치 자신이 관광가이드인 양 파리의 명승지에 대해 동승자들에게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엥발리드에서는 그가 좋아하는 나폴레옹의 무덤을 방문했고 몽마르트르의 샤크레쾨르 성당을 둘러본 후 르부르제 공항으로 가서 파리를 떠났다(당시에 히틀러는 알지 못했지만 이것이 그가 파리를 본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었다). 독재자의 ‘반나절 여행’이 끝났고 파리 시민들에게는 이제 나치에 의한 4년 2개월 간의 본격적인 점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군의 점령과 함께 시내의 주요 도로에는 독일어 표지판이 설치되었다. 또한 마제스틱이나 리츠 호텔을 비롯한 최고급 호텔 및 건물들이 독일군을 위한 용도로 전용되었다. 그 당시에도 파리는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도시였는데 이것은 독일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주둔 독일군은 휴가를 위해 파리를 한 번씩 방문하도록 권장받았다. 거리에는 ‘독일어 가능’이라고 광고판을 붙인 가게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피갈의 매춘업소들은 회녹색 독일군복의 병사들로 득실거렸다. 독일의 점령 이후 피난을 갖던 많은 파리시민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영국에서 그때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드골(Charles de Gaulle)이 대독 항전의지를 불태우는 방송을 한 이후로 단파 라디오를 소지하는 자는 처벌받을 수 있었다. 독일군은 저녁 9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외부 통행을 금지했는데 이로써 ‘빛의 도시’라 불리던 파리는 멋진 야경의 명성을 잃게 되었다. 이것은 밤에 조명을 켰던 에펠탑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으로 일상생활에서 시민들에게 더욱 영향을 끼쳤던 것은 독일 당국에 의한 배급제였다. 1940년 8월부터, 식품과 담배 및 의복에 대한 배급제가 실시된 것인데 해당하는 품목은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만 갔다. 전시인 데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배급제는 시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자연스럽게 암시장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시민들은 신선한 채소나 육류를 위해 인근의 시골을 방문하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의류의 경우 가죽 제품은 사실상 독일군 전용이었으므로 아예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또한 시민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석탄이었다. 당시 석탄은 독일의 전쟁수행을 위한 공급이 최우선이었고 많은 파리 시민들이 추운 겨울에 옷을 껴입은 채 덜덜 떨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유류도 석탄 못지않게 통제가 심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유류의 부족에 따라 파리 시내의 자동차 대수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19세기에나 보던 마차가 다시 등장했고 자전거 택시(일종의 인력거)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부상했다. 이런 가운데 독일군은 많은 프랑스의 미술품들을 약탈했는데 루브르 박물관 같은 곳은 물론 로칠트(Rothschild) 같은 유대인 부호 가문의 컬렉션이 주요 약탈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는 렘브란트, 모네, 르느와르, 드가 등 최고의 화가들의 작품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많은 유대계 프랑스인들이 직장에서 해고되고 공공장소 출입이 금지되었다. 파리 시내의 주요 극장에서는 ‘영원한 유대인(Der ewige Jude)’과 같은 나치가 제작한 반유대주의 선전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프랑스인들에게 증오를 이식시키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유대인 상점이 공격당했고 몽마르트르의 시나고그(Synagogue: 유대교 회당)는 방화에 이은 조직적인 파괴와 약탈로 폐허가 되었다. 1942년 7월 16일에 프랑스 경찰은 나치의 요구에 따라 파리 및 인근에 거주하는 유대인 13,000명을 체포했고 이들을 파리의 실내 자전거 경기장에 임시 수용한다. 이후 체포된 유대인들은 독일과 폴란드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는데 대부분이 무참하게 학살당한다.
이러한 나치의 가혹한 탄압에 대해 프랑스인들이 무조건적으로 침묵했던 것은 아니었다. 1940년 11월 11일은 1차 대전 종전기념일이었는데 독일 당국의 용인 하에 전몰자에 대한 추모 행사가 열렸다. 그간 나치 점령 하에서 강압적인 처우를 받던 파리시민들은 일단 한데 모이게 되자 점점 과격해진다. 일부 시민들은 용감하게도 레지스탕스의 상징인 ‘로렌의 십자가’를 들고 나왔고 곧이어 군중 속에서 저항의 중심인물인 ‘드골’을 외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사태를 방치할 수 없었던 프랑스 경찰은 시위대와 실랑이를 벌였다. 이후 진압을 위해 독일군이 도착했는데 즉시 인근 지하철역을 폐쇄하며 공중으로 총을 쏘는 가운데 시위대를 체포했다. 100명 이상의 학생들이 구속되었고 이 일을 계기로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교가 폐쇄되었다. 비록 본격적인 무장 투쟁은 아니었지만 이날의 시위는 독일 당국에게 프랑스인들이 언제라도 다시 저항하고 투쟁할 수 있는 민족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1943년부터 파리 시민을 비롯한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가중된다. 나치가 독일의 일손 부족에 따라 프랑스 젊은이들을 독일 내 강제노동에 동원하려 한 것이다. 프랑스 전국적으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고 2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독일군의 징용 및 강제노동을 피해 프랑스 각지에 은신했다. 이들은 훗날 마키단이라 불리는 지역별 무장 레지스탕스 조직의 핵심이 되었다.
봉기하는 도시
한편 전황의 측면에서 볼 때 1943년이 넘어가면서 조류가 바뀌기 시작했는데 5월에 북아프리카의 추축군이 튀니지에서 항복했다. 7월에는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시실리를 점령하였고 이후 이탈리아 본토에 진공 하며 점령지를 확대하였다. 드디어 9월에는 이탈리아가 추축군 중 처음으로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게 된다. 한편, 동부 전선에서는 소련군이 사상 최대의 전차전이 벌어진 쿠르스크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전쟁 전체의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아직 종전까지는 2년 정도의 시간이 더 남았지만 이제 전세는 확실히 연합군에 유리해졌다. 과거 1942년에 독일군에 막혀 무참히 실패했던 디에프(Dieppe) 상륙을 보며 연합군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던 이들도 이제는 미.영군이 조국 프랑스로 진공 할 날 만을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944년 6월 6일에 그날이 ‘도적같이’ 오게 된다. 이날 미국, 영국, 캐나다군 및 자유프랑스군으로 구성된 연합군 부대가 북프랑스의 노르망디로 진공 했다. 이들은 독일군이 철통같이 방어하고 있는 대서양 방벽 중 노르망디의 다섯 개 해변에 상륙하였다. 특히, 미군이 상륙한 오마하 해변(Omaha beach) 같은 곳에서는 한 때 방어하는 독일군에게 거의 밀려나갈 정도의 사투를 벌이며 고전했다. 하지만 연합군은 결국 교두보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며 히틀러의 콘크리트 방벽을 무너뜨리게 된다. 이후 독일군으로부터 카랭탱, 생-로 및 캉 등 노르망디 인근의 도시들을 하나씩 해방시키며 진군하고 있었다. 한편 이 시점에서 파리가 다음 목표인지에 대해서는 연합군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게 되는데 적어도 드골 휘하의 자유 프랑스군만큼은 ‘파리 해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드골은 연합군 내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프랑스군 자체적으로라도 도시를 해방할 것임을 강하게 주장했다. 프랑스인에게 파리야 말로 프랑스의 시작이자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제 파리 시민들도 해방을 위해 일어설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고 하나, 둘 행동을 개시했다. 그 시발점은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의 ‘바스티유 데이’였다. 이 날 파리의 레지스탕스들 및 시민 등 10만 명 이상이 시내 곳곳에 모이게 된다. 드디어 이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나치에 의해 금지되었던 프랑스 삼색기를 내걸었고 국가인 라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불렀던 것이다. 심지어 바스티유 광장 인근에서는 독일군과 소규모지만 총격전까지 벌어지게 된다. 4년 이상의 독일군 점령에 지쳐온 파리는 이제 폭발 직전이었고 본격적으로 저항하려 하고 있었다. 8월 10일에는 파리의 철도노동자 4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파업이 벌어졌고 이후 모든 철도 운행이 중단되었다. 15일에는 파리의 경찰이 총파업을 일으켰고 이후 우체국도 동참했다. 같은 날에 연합군이 남 프랑스에 상륙했는데 푸른 코트다쥐르 해변 및 프로방스 지방을 점령하며 북상하기 시작한다. 이제 독일군은 프랑스에서 연합군에 의해 남북 양쪽에서 압박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마침내 8월 19일, 이제는 공식적으로 ‘프랑스 국내군(FFI)’으로 이름을 바꾼 레지스탕스 및 공산당 조직이 참여하는 총봉기가 일어난다. 시내에는 독일군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촉구하는 포스터가 곳곳에 나붙게 된다. 프랑스 저항군이 주도하는 파리 해방을 위한 독일군과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당시 프랑스 내 독일군 주력인 7군과 5 기갑군은 이미 팔레즈(Falaise) 포위 전에서 만 5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5만 명이 포로로 잡히며 괴멸 직전이었다. 파리를 수비하던 독일군은 2만 명 정도였는데 상당수 주력군은 이미 빠져나간 상황이었고 남아있는 독일군은 적극적으로 진압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들은 분노에 찬 시민들이나 저항군이나 시민들에게 사로잡힐 경우 보복으로 무차별적인 구타나 혹독한 고문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한편 저항군에게도 문제는 있었는데 참여 인원들의 드높은 열정에 비해 너무나도 무기가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저항군은 과거 숨겨 놓았던 온갖 종류의 무기들을 꺼내는 것은 물론 독일군을 습격하는 과정에서 노획된 무기들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무기와 장비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파리 시민들은 경찰청이나 루브르 박물관 등 주요 시설들을 하나씩 접수해 나간다. 길거리에는 시민들이 독일군의 이동을 저지하기 위해 여기저기 바리케이드나 방벽을 쌓고 있었다. 시내 곳곳의 가로수가 베어지고 포석도로의 돌들이 파헤쳐지고 쌓여서 방어물을 구축했다. 또한 모래 주머니가 만들어지거나 노획된 트럭들이 독일군의 주요 이동로를 막고 있었다. 독일군과의 싸움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많은 여성들이나 청소년들 또는 노인들이 비무장임에도 불구하고 방어벽 구축이나 보급품 운반 등에 목숨을 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파리라는 도시’ 자체가 일어서고 있었다.
거리에 여성은 물론 아이와 노인들까지 나서는 상황을 바라보며 독일군들은 착잡한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며칠 전인 8월 7일에 파리로 부임한 군정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Dietrich von Choltitz) 장군이었다. 그는 이제 상황이 더 이상 통제 불가능한 수준임을 인식했고 향후 조치에 대해 깊이 고심하고 있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