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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이스탄불, 로마를 넘어 이슬람의 새 장을 열다(2)

콘스탄티노플 함락(1453년)

by 이준호

생사를 넘나든 공방전

이스탄불 군사박물관에 전시된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의 재현도 및 모형

장대한 오스만 군을 상대하는 비잔틴 제국에게는 만 명 이하의 수비군이 있었는데 더불어 700명 정도 되는 제노바 출신의 용병이 외부 지원군의 전부였다. 비잔틴군에게는 병력 수나 사기 등 모든 면에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시내에는 약 5만 명으로 추산되는 가련한 제국 시민들이 두려움에 떨며 다가올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전투에 기여를 하지 못하거나 수동적으로 관망하는 상황이었다. 비잔틴군이 담당하는 콘스탄티노플의 방어선은 크게 세 곳으로 나뉠 수 있었다. 우선 서쪽에 있는 테오도시우스의 삼중 성벽이 있었다. 그리고 남쪽에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마주하는 성벽이 위치했고 동쪽으로 금각만에 세워진 성벽이 있었다. 종합적으로 보면 금각만 쪽의 성벽이 가장 취약했는데 비잔틴군도 이를 잘 아는지라 이쪽에 소규모 해군을 배치하고 입구에 적선의 출입을 막기 위한 쇠사슬을 걸어 두는 등 나름 강화하기 위해 방안을 강구했다.


오스만 군의 선두는 4월 2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이들은 성문 밖에 진을 치며 거대한 대포를 설치한다. 공격 대기 중이던 오스만 군은 드디어 4월 5일에 서쪽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대한 포격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지축을 울리는 포격 속에 오스만 군의 최정예인 예니체리 병사들이 돌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성벽은 그 명성에 걸맞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비잔틴군이 야밤에 필사적으로 수리를 하면서 전 날의 포격이 무위가 되었다. 이러한 공성 포격과 병사들의 돌격이 4월 초 내내 계속되었다. 4월 18일에는 오스만 군의 야간 돌격이 실시되었지만 비잔틴군의 헌신적인 방어로 모두 격퇴되었다. 4월 중순 이후 오스만 해군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전투선을 금각만 안쪽으로 진입시키려고 했다. 문제는 금각만 입구에 적의 진입을 막기 위한 ‘거대한 쇠사슬’의 존재였는데 오스만 해군의 진입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게 된다. 4월 20일에는 제노바의 지원선 3척이 봉쇄를 뚫고 콘스탄티노플에 접근했는데 오스만 해군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자국 해군의 어처구니없는 대처에 메흐메트 2세는 격노했다. 지금까지의 전황은 오스만 군의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방어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오스만 군 입장에서는 승리를 위해서 지금까지 와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메흐메트 2세의 머릿속에 ‘그 다른 방법’이 떠오르게 된다


메흐메트 2세의 지휘 아래 배를 산으로 이동시켜 금각만 안으로 옮기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4월 22일 오스만 군은 공격이 아닌 대규모 노역에 동원되어 있었다. 이들은 갈라타 쪽의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언덕을 가로질러 ‘거대한 것들’을 옮기고자 했다. 바닥에 소형 바퀴가 달린 나무를 깔아 옮긴 이 물건의 정체는 놀랍게도 오스만 해군의 갤리선이었는데 그 숫자가 무려 70척에 달했다. 왜 오스만 군은 문자 그대로 “배를 산으로 옮기는” 엄청난 일을 감행했던 것일까? 오스만 군도 비잔틴군도 금각만 안쪽의 방어선이 상대적으로 가장 취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비잔틴군은 금각만 입구에 쇠사슬을 걸어 놓았던 것인데 이 쇠사슬 앞에 오스만 해군의 진격이 번번이 막혔던 것이 지금까지의 상황이었다. 이때 답답한 상황 속에서 메흐메트 2세는 기가 막힌 방법을 착안했는데 해로가 쇠사슬로 막혀 있는 상황에서 배들을 육지를 가로질러 금각만 안으로 집어넣으려 했던 것이다! 쇠사슬을 통한 방어를 철석같이 믿고 있던 비잔틴군은 가증스러운 적들이 배를 산으로 옮기며 금각만 안으로 밀어 넣는 모습을 보고 엄청난 충격과 공포에 빠지게 된다. 이 사건은 방어군과 도시민들의 사기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제 70척의 오스만 해군이 금각만 안에 상시 배치되어 호시탐탐 공격할 기회를 노리게 된 것이다. 비잔틴군이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전투가 끝나기 전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이후 오스만 군은 포격을 지속하며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들은 정면 공격으로는 승산이 적다고 판단하고 보이지 않는 지하로 터널을 파서 성벽을 폭파하는 방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사적이었던 비잔틴군은 모든 적의 시도를 포착해서 터널을 붕괴시켰고 그렇게 오스만 군의 시도는 다시 한번 실패하게 된다. 아무리 비잔틴군이 선전한다고 해도 시간은 공격하는 측에 유리했다. 모든 면에서 유리한 오스만 군은 다시 전력을 집중하여 대공세를 전개한다. 5월 7일에는 만 명이라는 엄청난 규모로 돌격을 했고 일부 성벽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비잔틴군과 라틴 용병들의 방어는 결코 만만치 않았고 오스만 군은 다시 격퇴당한다. 5월 1일에는 육상은 물론 금각만의 해상에서도 동시다발적인 공격이 이루어졌는데 이번에는 비잔틴의 해군이 분전을 펼치며 오스만 군의 협공을 좌절시킨다.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군은 최후 승리에 대한 확신을 잃지 않았고 방어군은 어떠한 지원군도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점점 더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갔다. 그리고 5월 하순부터 오스만 군은 포격을 강화하며 최후의 공세를 준비한다. 더불어 메흐메트 2세는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도시를 점령할 시 병사들에게 사흘 간의 약탈을 허용할 것을 약속했다. 비록 오스만 군에게는 ‘약탈’이라는 짧은 한 단어였지만 비잔틴 측에는 ‘학살과 강간’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터였다. 비잔틴 방어군도 이러한 자신들의 ‘마지막’을 직감하고 있었다.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 본인이 소피아 성당에서 직접 미사를 진행했다. 그는 마지막 연설에서 “그대들은 고결한 백성들이며, 저 위대한 그리스와 로마 영웅들의 후손이다”라고 말하며 고대의 영웅답게 이교도 적을 막을 것을 강조했다. 비록 수비군과 시민들에게 적극적인 항전을 독려했지만 그 본인조차도 도시가 며칠 버티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2천 년 제국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는 메흐메드 2세(파우스토 조나로Fausto Zonaro 그림)

5월 28일 저녁 10시경부터 오스만 군 진영에는 병력과 무기 등에 대한 점검이 이루어졌다. 공격 부대는 3개의 제대로 이루어졌는데 제1대는 용병 및 점령된 속주의 병사들로 가장 먼저 희생될 선봉대였다. 제2대는 아나톨리아 출신의 병사들이었고 제3대는 최후의 돌격을 감행할 최정예 예니체리 부대였다. 곧이어 성 주위에 수천 개의 횃불이 밝혀졌는데 이것은 수비군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전술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정을 넘겨서 5월 29일 새벽 한 시에 총공격이 개시되었다. 제1대의 병사들은 비잔틴 방어군의 격렬한 저항에 성벽에 오르지도 못하고 많은 수가 전사했다. 한 시간 정도 지속된 제1대의 공격이 실패로 끝나자 곧이어 제2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포격으로 일부 무너진 성벽 사이를 집중 공격했고 비잔틴군에 대항해 칼과 창 또는 도끼로 격렬한 백병전을 치르기 시작했다. 양 측의 격렬한 고함 소리와 부상당한 자들의 비명소리가 어둠 속에서 뒤엉켰다. 곧이어 제3대인 예니체리가 공격 명령을 받으며 성벽 내 ‘성 로마누스문’의 취약한 지점으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오스만 군은 확실한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 전투는 매우 격렬히 진행되었고 제노바 출신의 비잔틴군 방어 사령관이던 지오반니 주스티니아니(Giovanni Giustiniani Longo)가 부상을 입고 후송될 정도였다. 방어의 핵심이던 주스티니아니의 후송을 본 병사들의 사기는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동틀 무렵이 되자 오스만 군은 성난 파도와 같이 성벽 안으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비잔틴군들은 공황 속에 후퇴했다. 아침 6시경에는 금각만 쪽에 있는 오스만 해군도 성벽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게 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장구한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다. 그는 철갑 갑옷과 검을 챙겨서 오스만 군을 막기 위해 성벽 쪽으로 나섰다. 황제는 시종들의 권유에 따라 배를 타고 탈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시의 건설자(콘스탄티누스 1세)와 이름이 같았던 ‘마지막 황제’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고 위대한 제국의 황제이자 전사로서 용감히 최후를 맞이했다. 전투의 혼란 속에 그의 시체는 찾을 수 없었다. 도시는 53일간의 혈투를 마친 1453년 5월 29일 오전 8시경 오스만 군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었다. 이로서 2,206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점령된 도시에서는 곧 술탄의 병사들에 의해 대규모의 약탈이 자행되기 시작했다. 약탈의 대상은 광범위했다. 소피아 대성당의 경우 전능한 신의 힘을 믿고 도망쳐 온 시민 수천 명이 피신해 있었다. 오스만 병사들이 성당의 정문을 거칠게 부수고 쳐들어 갔는데 이들은 즉시 보석으로 장식된 제단이나 십자가, 성물 등을 뜯어갔고 가치 없다고 판단된 성화와 고문서 등은 파괴했다. 정교회 사제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던 중 칼에 찔려 죽임을 당했다. 콘스탄티노플 내의 다른 수도원이나 종교 시설 또는 거주지에서도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여성들은 강간당했고 사방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이후 소피아 성당을 비롯한 여러 크리스트교 시설들이 이슬람의 모스크로 전환되었다. 3만 명 이상의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이 포로로 붙잡혔다고 전해진다. 남자들은 대부분 노예로 끌려갔고 여성들은 오스만 귀족이나 장군들의 첩이 되거나 성적인 목적 또는 하녀로 쓰기 위해 노예시장에서 매매되었다. 특히 아름다운 귀족 출신 여성들이 집중적인 희생물이 되었다. 일련의 행위들은 비잔틴 제국이라는 ‘이미 죽은 시체’에 칼질을 해대는 격이었다. 더불어 이러한 광기가 계속되자 오스만 측에서도 우려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며 전반적인 도시 기능이 마비되었다. 원래 사흘 간의 약탈이 약속되었지만 메흐메트 2세는 질서 유지 및 더 이상의 도시 파괴를 막기 위해 이틀 만에 약탈을 중단시킨다. 이후 도시 곳곳에는 오스만 병사들이 경계를 서며 약탈자들을 발견하는 즉시 체포하고 처벌했다. 운 좋은 소수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 만이 제노바의 상선 등을 통해 도시를 탈출할 수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이탈리아 및 서유럽으로 흘러 들어갔는데 ‘망국의 한’을 품은 가운데 서유럽 현지에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과 문헌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콘스탄티노플의 점령 이후 유럽에는 새로운 르네상스의 기운이 상승하였고 중세의 오랜 어둠과 굴레를 떨치며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승리한 메흐메트 2세는 소피아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고 도시의 점령을 알라신에게 감사했다. 술탄은 성당의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임을 선언하며 내부의 어떤 것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명령한다. 이후 이 메흐메트 2세는 ‘파티(Fatih: 튀르키예어로 정복자라는 뜻. 현재 이스탄불을 가로지르는 다리 중 ‘제2대교’가 그의 이름을 따서 ‘파티 술탄 메흐멧 대교’로 이름 지어졌다)’로 불리게 되었다. 이제 메흐메트 2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서 이 로마의 위대했던 도시를 자신의 수도로 전환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새로운 제국의 중심이 되다

메흐메트 2세가 건축하고 거주했던 톱카프 궁전(Topkapı Sarayı)의 입구. 두 개의 탑 모양이 인상적이다.

비록 자신이 파괴하고 점령했지만 메흐메트 2세에게 콘스탄티노플은 ‘자랑스러운 보석’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를 당시 북쪽에 위치한 에디르네에서 이곳으로 옮기려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에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었다. 우선 혼란 속에 망가진 도시의 기능을 다시 살려야 했다. 약탈의 중단 이후 엄중한 오스만의 지배가 시작되었고 도시에 다시 질서를 회복시켰다. 메흐메트 2세는 바로 그가 파괴했던 삼중 성벽과 로마 시대의 수도교, 교량, 도로 등 도시의 인프라를 하나하나 재정비했다. 하지만 도시만 정비한다고 해서 기능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도시에 거주할 사람들이 있어야 했다. 술탄은 제국 각지의 상인, 수공업자 및 기술자들을 이곳으로 모으기 위해 노력했고 이들에게 면세 혜택 등의 특권을 부여했다. 또한 이들이 마음 놓고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거대한 시장도 조성했는데 바로 그랜드 바자르(Kapalıçarşı)였다. 이곳은 유럽, 중동은 물론 아시아에서까지 사람들이 모여드는 ‘국제무역시장’으로 성장하였다. 시장에는 금, 은 등의 보석은 물론 카펫, 도자기, 공예품 및 향신료 등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상품들을 거래하였다. 모여든 사람들은 무슬림과 크리스트교인 또는 유대교인 등 온갖 종류의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메흐메트 2세는 이들에게 종교의 자유 또한 보장했다. 점령 바로 이듬해인 1454년부터는 그리스 정교회도 허용되었다. 술탄은 타 종교에 관용을 베풀면서도 이슬람교도로서 정체성 또한 분명히 하였다. 그는 새로이 예윱 술탄 모스크(Eyüp Sultan Camii)와 같은 거대한 사원도 건립하였고 크리스트교 수도원을 이슬람의 신학 교육 기관(Medrese)으로 전환시키기도 했다. 더불어 궁정 관료 및 제국의 엘리트 양성을 위해 엔데룬 궁정학교(Enderun Mektebi)와 이슬람 신학이나 수학 발전을 위한 교육 기관도 설립하였다. 주요 시설들이 하나, 둘 건립됨에 따라 도시는 제국의 수도로서 위용을 급격히 갖추어 갔다. 이제 위대한 술탄에게 걸맞은 거처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메흐메트 2세는 금각만과 보스포러스 해협이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톱카프 궁전’을 건축한다. ‘대포의 포구’라는 의미를 지닌 톱카프 궁전은 1459년 착공하여 1465년에 완공되었는데 술탄의 거처이자 오스만 제국의 정치, 외교, 행정을 비롯한 모든 권력의 중심지였다. 톱카프 궁전이 완공된 1465년부터, 이미 튀르키예식인 코스탄티니예(Kostantiniyye)로 이름이 변경된 도시는 공식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궁전 안에는 모세의 지팡이나 이슬람 선지자인 마호메트의 수염 또는 칼 등이 전시된 성물 전시관이 있다. 또한 그 유명한 여성들만의 공간인 ‘하렘(Harem)’이 위치했는데 이곳은 술탄의 가족과 수많은 후궁들이 거주하는 매우 특별한 공간이었다. 인원이 많을 때는 전 세계에서 모인 최대 1,000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하렘에 거주했다고 한다. 톱카프 궁전은 1856년 보스포러스 해협 한가운데 유럽 식의 돌마바흐체 궁전이 새로 건축되며 술탄의 거처가 옮겨지기 전까지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영욕을 함께했다.


메흐메트 2세의 적극적인 인구 확장책을 통해 코스탄티니예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는데 비잔틴 제국 시절 5만 명 규모였던 인구는 1470년대가 넘어가자 8만 명에 육박하였다. 이후 16세기에는 인구가 20만 명 이상으로 성장하며 다시 한번 대제국의 수도이자 로마 못지않은 동서양 교류의 중심지로 등극하게 된다. 이렇게 콘스탄티노플은 점령과 약탈, 학살을 겪으며 새로운 제국의 수도인 코스탄티니예로서 번영하게 되었다. 한편 강력한 오스만 제국의 팽창으로 인해 베네치아 등의 해양 국가들은 이집트와 콘스탄티노플을 연결했던 동방의 중요한 무역로를 상실했고 상당한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된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오스만의 도전과 확장은 이후 유럽 해양 국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무역 항로를 찾는 ‘모험의 길’을 떠나도록 자극했다. 결국 이러한 자극들이 모여 결실을 맺게 되는데 1492년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라는 제노바인이 ‘서쪽의 새로운 땅’을 발견하면서 인류의 역사를 ‘새로운 영역’으로 안내했다. 이후 역사는 서구 국가들이 주도하며 세상을 이끌어 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1453년 늦봄 보스포러스 해협 앞의 거대한 성벽 앞에서 펼쳐진 처절한 전투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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