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중 벌어진 모스크바 공방전(1941~1942)
동장군과 시베리아군단의 등장
1812년 9월 14일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이 떠나버린 모스크바에 무혈입성 했다. 하지만 도시는 이미 불태워져 있었고 병사들의 보급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수도인 모스크바를 점령해도 러시아가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나폴레옹은 한 달 후 험난한 철수 길에 오르게 된다. 이때 러시아의 강력한 한파가 러시아군과 더불어 후퇴하는 그의 부대원들을 덮치며 ‘동장군(冬將軍)’이란 단어가 탄생하게 되었다(나폴레옹 군의 제복 단추는 추위에 약한 금속인 주석으로 만들어졌는데 강추위 속에 주석 단추는 가루가 되어 부서졌고 제복을 여밀 수가 없었던 병사들의 추위에 따른 피해를 가중시켰다). 최초에 참전한 원정군 60만 명 중 살아남아 귀환한 사람은 10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히틀러의 독일군도 이러한 역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러한 역사를 잘 알고 있었기에 전쟁을 겨울이 오기 전에 빨리 종결하려고 했고 이에 맞추어 보급품의 우선순위도 조정했던 것이다. 즉, 동계 방한용품 대신에 탄약 및 장구류에 우선순위를 두고 보급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독일군의 기대와는 다르게 모스크바에서 전선은 쉽사리 뚫리지 않았고 10월 말부터 시작된 추위는 그 어느 해보다 빨리 다가왔다. 사실 10월 초부터 지역 별로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이때는 그래도 기온이 영상이라 견디고 있었다. 모스크바와 남쪽의 툴라 일대에서는 10월 21일에 첫눈이 내렸는데 낮에는 영상 5도 이하였고 밤에는 영하 5도 이하로 떨어지며 병사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기본 군복(그나마 독일군 군복이 양모 소재였다는 것이 다행이었다)만 걸치고 있던 독일군에게 동상 환자들이 하나, 둘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다가올 본격적인 재앙에 비하면 아이들의 장난 수준이었다. 11월에 들어서자 기온이 영하 10도에서 순식간에 20도까지 급강하했다(12월부터는 영하 30도까지 떨어진다). 이제 전선의 독일군에게는 외부에 노출된 채 돌아다니는 것이 엄청난 고통이 되었다(바로 내가 모스크바의 겨울밤을 걸어가며 느꼈던 감정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살기 위해 러시아 민가에서 약탈한 옷가지를 닥치는 대로 끼어 입었고 심지어 숄이 달린 하얀색 식탁보를 온몸에 두르기까지 했다. 병사들의 생존을 위해 동계 피복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음식이었는데 전방에 수프를 보급하면 야전용 반합에 옮기자마자 수프가 얼기 시작했다. 분초를 다투며 수프를 입에 넣어도 얼마 후면 딱딱한 얼음으로 변해갔고 많은 경우에 있어 물기가 남아있던 스푼이 입에 달라붙었다. 이것을 떼어 내려면 살점이 뜯기고 피가 날 것을 각오해야 했다. 추위 때문에 벌벌 떨던 병사들은 잠도 휴식도 제대로 취할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전투에 투입되어 부상이라도 당하면 상처 부위가 노출된 채 그저 죽기 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더불어 총신의 윤활유가 얼어붙어 작동 불량이 되었고 냉각수가 얼어버린 전차, 트럭 등의 운행과 수리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독일군 선전부서는 러시아 전선의 병사들이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거나 아이스하키 경기하는 사진 등을 찍으며 마치 알프스나 바이에른의 동계 휴양지에 온 것처럼 선전했지만 실상 소련의 최전방은 얼음 구덩이 속의 지옥이었다. 그해 겨울에 10만 명 이상의 독일군이 동상으로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절단하고 후송되었다. 전투 중 피해까지 합치면 총사상자는 40만 명에 달했다.
스탈린에게 첩보를 보내던 전 세계의 소련 스파이들 중 도쿄에 있던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는 단연 최고의 에이스였다. 독일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차 대전 이후 제국주의 전쟁에 환멸을 느끼며 공산당원이 되었다. 이후 상하이를 거쳐 일본 도쿄에서 나치당원이자 독일 신문사의 특파원으로 위장한 그는 특유의 언변과 인간적 매력을 바탕으로 일본 주재 독일대사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두었다. 결국 대사 부인과 내연 관계까지 가졌던 조르게는 다양한 고급 정보를 빼돌려서 소련에 전달했다. 조르게가 보낸 정보 중 최고는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소련을 침공한다는 것이었고 6월 22일이라는 정확한 날짜까지 알려 주었지만 소련 내에서 묵살당했다. 하지만 조르게는 멈추지 않았고 계속 정보 수집을 가속화하는데 1941년 9월에 일본이 소련의 시베리아가 아닌 동남아의 미국, 영국 식민지를 공격하려 한다는 초특급 정보를 타전한다. 당시 소련과 만주국의 국경 일대에는 50만 명의 시베리아 및 극동 방면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1941년 4월에 맺은 일본과 소련의 불가침 조약을 맺기는 했지만 조약은 어차피 종이 쪼가리일 뿐이었다(소련은 불과 6개월 전에도 독일에게 당하지 않았던가!). 스탈린은 9월에 조르게의 정보를 받기 전까지도 일본이 시베리아를 공격해 독일과 양쪽에서 공격할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 전선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결국 조르게의 정보를 신뢰하게 되었고 시베리아에 배치된 부대들을 대륙횡단 열차를 통해 유럽 쪽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당장 독일군에게 병력 수에서 밀리고 있던 소련군에게 이들의 도착은 천군만마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소련군의 이런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11월 초 독일군은 모스크바로의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 11월 7일(구 러시아력으로 10월 25일)은 소련의 10월 혁명 기념일이었는데 소련 당국으로서는 국면 전환을 위한 강력한 제스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혁명기념일 당일 굵은 눈발이 내리는 붉은 광장에서는 일단의 소련군 장병들이 사열을 준비하고 있었다. 총 8천 명 정도의 병력들은 두툼한 동계 복장과 각종 무기를 들고 크렘린의 사열대 앞을 지나갔다. 사열대 가운데에는 국방상 세묜 티모센코, 주코프 장군은 물론 최고 지도자인 스탈린이 서 있었다. 그는 이 날 사열대에 서서 “결국 독일군이 패배할 것이며 승리는 기필코 우리의 것”이라는 요지의 전투 의지를 불태우는 연설을 했다. 이것은 최고 지도자가 결코 수도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대내외에 보여주었고 적의 침입을 목전에 두고 있던 모스크바 시민들에게 내부의 단결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이후 사열에 참여한 병사들이 독일군을 막기 위해 곧장 전선으로 투입되었을 정도로 전황은 급박하였다. 하지만 이 날 스탈린의 연설과 병사들의 사열을 통해 시민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자신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메시지를 수취했고 당국은 이들의 애국심과 항전 의지를 고취시킬 수 있었다. 이날 이후 기온이 점점 더 내려갔다. 11월 말 독일군 중 헤르만 호트의 3 기갑군 예하 2 기갑사단 정찰 부대의 일단이 모스크바 북서쪽에 위치한 ‘힘키(Khimki)’까지 접근했다. 이곳은 모스크바 북서쪽에서 직선으로 18km 거리에 위치한 곳으로써 모터사이클을 탄 선두의 독일군은 점령이 아닌 정찰 임무만 수행하고 철수했다. 이때가 독일군이 모스크바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시점이었는데 이미 기진맥진한 독일군은 이후 두 번 다시 이곳에 오지 못했다(오늘날 힘키에는 독일군이 이곳까지 진군했고 소련군이 막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붉은색 바리케이드 모양의 조형물이 서있다).
그리고 이제 신중하게 증원된 소련군이 반격할 차례가 왔다.
구원된 도시
1941년 12월 5일 새벽, 영하 20도 이상의 지독히도 추웠던 날씨 속에 독일군은 소련군보다는 눈앞의 추위에 신경 쓰고 있었다. 이들은 살기 위해 멀리서 적이 볼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참호 속에서 불을 피워대고 있었다. 어차피 불을 안 피워도 얼어 죽을 운명 임은 마찬가지였다. 이미 독일군은 육체적, 심리적으로 한계에 달했고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바로 이때를 놓치지 않고 위장용 설상 방한복을 입은 주코프의 소련군이 북쪽의 칼리닌, 중앙의 모스크바 전선의 2개 방면(이후 남쪽의 브랸스크에서도)에서 반격하기 시작했다. 전선의 독일군은 적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지만 많은 병사들이 육체적으로 한계 상황에 도달했고 무기의 기능 고장으로 제대로 된 반격이 불가능했다. 사방에서 소련군의 전차와 보병들로 인해 전선이 뚫리기 시작했다. 일선의 독일군 장군들이 제대로 된 보급과 재정비를 위해 후방으로의 후퇴를 강력히 요청했지만 이번에는 이전의 스탈린이 그랬듯이 히틀러가 절대 용인하지 않았다(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히틀러와 스탈린은 비록 이념은 달랐지만 서로 묘하게 닮은 구석이 많았다. 한 가지 반대였던 것은 전쟁 초반에 많은 성공을 거둔 히틀러는 점점 더 작전에 개입하는 일이 많아졌지만 초기에 많은 실패를 경험한 스탈린은 시간이 갈수록 부하들에게 현장을 일임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전쟁의 승패를 가른 주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10일 이상이 지나자 독일군은 히틀러의 후퇴 불가 방침에도 불구하고 최대 200km 이상을 밀리며 후퇴하게 된다. 사실 많은 일선의 독일군 장군들이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히틀러 몰래 조금씩 후퇴를 감행했다. 이러한 후퇴와 방어의 과정에서 데미얀스크 같은 곳은 소련군에 10만 명 이상이 포위되었고 이듬해 봄에 구출될 때까지 항공 보급으로 버텨야 했다. 일련의 상황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히틀러는 육군 총사령관인 브라우히치(Walther von Brauchitsch)를 해임시켰고 본인이 직접 그 자리에 오르게 된다. 더불어 클루게, 구데리안, 클라이스트, 회프너 등 독일군의 최고 에이스 장군들을 대거 몰아낸다. 소련군의 반격을 통해 독일군은 최초의 ‘전략적 패배’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우수한 장군들이 대거 쫓겨나며 전반적인 전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후 독일군의 주류인 프로이센 장교단은 히틀러의 완전한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소련군의 공세는 1월 중순까지 한 달 이상 계속되었는데 공세가 길어 짐에 따라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결국 공세는 탄력을 잃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스탈린이 장군들을 닦달하며 독일군을 당장 몰아내고자 난리를 쳤지만 당시의 소련군의 능력으로는 한계인 것이 분명했다. 이후 양측은 전선이 고착되며 일시적인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와중에 일본이 12월 7일에 미국의 진주만을 공습했는데 히틀러는 동맹국 편을 들며 미국에 선전 포고하게 된다. 이 결정은 그의 전쟁 중 전략적 실수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었는데 이런 결정을 통해 그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본격적인 양면 전쟁이 현실화될 판이었다. 더불어 이것은 머지않은 시기에 미국의 무기대여법(Land Lease)을 통한 대량 지원이 소련으로 향할 수 있음을 뜻했다. 자원이 부족한 독일에게는 지극히 불리한 시나리오였다.
비록 독일군이 아직도 자국의 많은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지만 소련은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 해 겨울을 기적과 같이 버티어 냈고 불굴의 모스크바는 살아남게 되었다. 아직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모스크바를 수호하는 과정에서 소련의 병사와 시민들은 독일군도 더 이상 무적의 존재가 아니라는 커다란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 자신감은 눈덩이처럼 불리어져 갔고 이후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라는 또 다른 지옥을 거치며 더욱 단단해졌다. 그리고 1945년 5월 9일 베를린에서 나치의 항복 조인식을 통해 그 정점을 찍게 된다. 이 모든 것이 1941년에서 42년 사이의 겨울에 자신들의 애국심과 열정으로 혹독한 추위마저 녹여버린 모스크바 시민들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후 유행한 소련의 프로파간다 슬로건처럼 “모스크바는 파시스트의 무덤”이 되었다.
2025년 5월 9일, 다시 모스크바
2025년 5월 9일 러시아 현지 시간 오전 10시,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스파스카야탑에서 종이 열 번 울리며 올해도 어김없이 대독승전기념일 행사가 진행되었다. 현재 서구권 국가들에서는 대독승전기념일을 독일군 알프레드 요들(Alfred Jodl) 대장이 프랑스 랭스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한 5월 8일로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스탈린은 소련이 주도하는 별도의 항복조인식을 실시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고 5월 9일에 베를린에서 ‘대장’보다 계급이 높은 빌헬름 카이텔(Wilhelm Keitel) 원수를 불러서 별도의 조인식이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 다른 서구 국가들보다 하루 늦게 ‘대독 승전기념식’을 여는 배경이다.
80주년을 맞는 올해 행사를 위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3일 간 휴전한다고 선포했다. 그만큼 이 행사는 러시아라는 나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이다. 붉은 광장에서 실시된 기념식의 첫 번째 순서는 독.소전 개전 시 소련 국민의 사기 진작을 위해 작곡한 ‘신성한 전쟁(Svyashchénnaya voyná)’의 장엄한 연주로 시작된다. 민간인 출신 국방장관 안드레이 벨로우소프(Andrei Belousov)가 검은색 정장에 붉은 타이 차림으로 행사를 진행했는데 군복이 아닌 민간 정장을 입고 행사를 주재하는 것은 이번 행사가 처음이다. 과거 내가 지독히도 추워했던 그곳이 지금은 5월의 햇살 속에 너무나도 따뜻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푸틴의 연설에 이어 2차 대전 당시 소련군 복장을 한 여러 부대들이 ‘수도 모스크바 행진곡’을 시작으로 사열을 진행한다. 이후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중국 및 베트남 등 구소련 또는 러시아와 친선 관계에 있는 13개국 군대들의 사열이 이어졌다. 브라질의 룰라와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등의 모습도 보였다. 시진핑과 푸틴은 연신 대화하며 양국 간 우호를 과시한다. 세간의 예상과는 다르게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 중인 북한군은 열병에 참가하지 않고 대표단만 있었다. 나름의 국제 정치적인 의미가 있으리라. 곧이어 러시아군의 각 병과별로 사열할 때마다 ‘카츄샤’, ‘전진!’ 등 멜로디 익숙한 소련 군가들의 향연이 이어졌다. 기갑 차량이 대거 등장한 행사 후반부에서는 우리에게 악연이 많은 T-34/85 전차(2차 대전 시 소련의 주력 전차인 동시에 한국전 시 북한군의 주력 전차)가 트베르스카야 거리와 역사박물관을 지나며 광장에 나타났다. 화려한 행진곡인 ‘승자의 환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성 게오르기우스 리본’을 단 소련군 시절의 기갑차량들이 대열의 선두를 이끌었는데 묘한 감정이 교차했다. 행사의 피날레로 러시아 국기 색깔의 연기가 퍼져 나가는 가운데 전투기들이 분열했고 그렇게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푸틴은 상당히 만족한 듯이 행사에 참석한 북한군을 포함한 장군들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악수했다.
이번 행사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가장 대규모로 진행된 행사였다. 과거 2010년에는 미국, 프랑스 등 서방군대들도 대거 행진에 참석했지만 이번에는 확실한 친러 국가들 위주로 참가했다. 물론 붉은 광장의 사열 부대들이 독일군과 싸우러 바로 전선으로 가야 했던 1941년 11월만큼의 긴박함은 없었다. 하지만 2025년의 붉은 광장은 그 자체가 국제 정치를 통한 미묘한 이합집산이 그대로 노출된 또 하나의 전쟁터였다. 국제 관계의 역학에 따라 내년 행사에도 특정 국가가 추가되거나 제외될 것이다. 그것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가운데 2025년 5월의 모스크바, 붉은 광장은 많은 질문을 남겨 놓았다. 과거 소련 시대 영화 제목처럼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더불어 다른 어떤 것도 믿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