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 함락(1453년)
- 술탄 메흐메트 2세, 콘스탄티노플 점령 직후 -
보통 일요일 오후의 술탄아흐멧(이스탄불의 마르마라 해 입구에 있는 관광 지구. 아야소피아 성당_내가 거주할 때는 박물관이었으나 지금은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된다. 일대에는 술탄아흐멧 모스크, 톱카프 궁전 등 세계적인 명소들이 모여 있다)은 전날인 토요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한가한 편이다. 이스탄불에 거주하면서 전 세계의 관광객이 몰리며 북적이는 이곳에 가게 되면, 나도 모르게 사람들의 거대한 이동 물결과 어울리며 마치 나도 관광객 중 한 명인 양 기분이 들뜨게 된다. 내가 특히 좋아했던 곳은 술탄아흐멧 모스크 옆의 히포드롬(고대 비잔틴의 원형 경기장이 있던 자리) 앞 벤치였다. 고대의 원형경기장을 따라 배열된 듯한 이곳 벤치에 앉아 있으면 우선 바로 옆의 커다란 이집트 오벨리스크가 보인다. 다른 한쪽으로는 주변에 4개의 이슬람식 미나레트(첨탑)를 세운 아야소피아의 거대한 연갈색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는 찬란한 비잔틴 제국의 정교회 성당에서 모스크로 바뀌어 버린 기구한 운명의 건축물이다. 히포드롬 앞 벤치에 앉아서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따뜻한 햇볕이었다.
특히 봄, 가을의 한적한 일요일 오후에 벤치에서 햇볕을 쐬며 잠시나마 눈을 감고 있으면 마치 나만의 특권이라도 가진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가운데 지나가는 사람들의 다양하고 이국적인 언어가 들려온다. 또한 점심이나 해 질 녘이 되면 자미(Camii, 튀르키예어로 모스크를 뜻함)에서 퍼지는 기도 소리가 흘러나왔는데 계속 듣고 있으면 터번을 쓴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이나 망토를 두른 비잔틴 인들이 당장이라도 나타날 것 같았다. 내가 앉아 있던 그곳은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보스포러스 해협이 지나고 고대의 건축물들이 현대의 시간과 만나는 너무나도 이국적이면서도 지극히 비현실적인 장소였다. 여기서부터 천천히 걸어가면 두어 시간 내로 비잔틴과 오스만 제국의 다양한 ‘정수’를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나도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명한 모스크나 궁전 또는 지하 저수조나 그랜드 바자르와 같은 유명한 관광지에 눈길이 갔다. 하지만 몇 년의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언젠가부터 좀 더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가판대에서 파는 튀르키예인들의 주식 시미트빵이나 갈라타 다리에 늘어서서 한낮에 한가롭게 낚시하는 사람들의 모습 같은 것들이었다. 더불어 술탄아흐멧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성벽에도 눈길이 가기 시작했는데 사실 이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성벽에 대해서 이미 그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 역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하루는 이스탄불 시내의 군사 박물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박물관은 튀르키예의 역사와 전쟁에 대한 다양한 컬렉션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전시 벽화와 모형 재현 디오라마(미니어처)를 통해 오스만 제국 군대가 비잔틴의 바로 이 ‘삼중 성벽’을 대포로 무너뜨리는 모습이 아주 실감 나게 구현되어 있었다. 벽화 속의 콧수염을 기른 오스만 제국의 병사들은 포격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허물어진 성벽 사이로 당장이라도 뛰어들어 갈듯이 사기가 넘쳐 보였다. 박물관에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구경의 청동 대포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관람자들은 우선 그 압도적인 크기에 놀라게 된다. 수백 년 전에 이러한 포를 운용하려면 정말 많은 노력이 들어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비잔틴 제국과 그 멸망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바라본 정식 명칭 ‘테오도시우스의 삼중 성벽(비잔틴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완공되었다)’은 볼수록 어마어마한 규모였고 현대의 기준으로 보아도 대단한 토목공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 완공이 무려 1,500년 전인 5세기 초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엄청난 규모의 성벽은 역사적으로 단 두 번만 정복당했는데 한 번은 1204년의 제4차 십자군 원정 때였다. 하지만 당시는 비잔틴 제국 내부의 배신과 정치적인 혼란에 따라 스스로 무너진 것이었고 사실상 이 성벽이 외부에 점령된 것은 1453년의 단 한 번이었다. 비록 횟수로는 한 번이었지만 그에 따른 결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도시’는 이슬람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고 이후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까지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제국 최후의 보루
콘스탄티노플은 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거쳐 지중해로 이어지는 그 천혜의 지리적 위치로 인해 일찌감치 고대부터 교통의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을 인정받은 곳이었다. 이미 기원전 6~7세기 경부터 마을과 촌락이 형성되며 사람들이 거주했고 거주지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초기에 이곳은 그리스 출신의 지도자였던 비자스(Byzas)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온’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기 196년에는 로마 황제 세베루스가 이곳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파괴된 도시를 재건했다. 이 도시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4세기 때의 일이었는데 당시 로마제국은 소위 ‘군인황제 시대’ 이후의 사두정(射頭政Tetrarchy: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서기 293년부터 실시된 지배 체제로 로마를 동과 서로 나누고 황제 밑에 카이사르로 불리는 부황제를 두어 4인이 공동 통치한 지역 분권 체제) 상태로 상당한 혼란 상태에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는 서방의 황제인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밑의 부황제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각각 현재의 프랑스와 영국)를 통치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사두정이라는 나름 합리적인 체제를 통해 로마 정국의 효율적 통치와 안정을 꾀했지만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론과 현실’ 사이에는 항상 괴리가 존재했다. 305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정황제 자리에서 동반으로 퇴임했고 서방에서는 콘스탄티우스가 동방에서는 갈레리우스가 정황제로 등극했다. 문제는 바로 이듬 해인 306년에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면서 그의 후계자를 놓고 갈등이 표출된 것이다. 그의 병사들은 용기 있고 군인으로서 신망 있었던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는데 사실 이것은 세습을 배제한 사두정의 원칙에 반하는 일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갈레리우스에 의해 부황제로 강등 당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일련의 모습을 지켜보며 아무런 직위도 얻지 못하게 된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아들 막센티우스(Maxentius)는 자신의 기준에 비천한 서자 출신인 콘스탄티누스가 부황제가 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결국 그는 봉기를 일으키고 만다. 이후 여섯 명의 ‘황제 참칭자들’이 나타났고 로마는 다시 한번 전면적인 내전 상황에 빠지게 된다. 막시미아누스는 자신의 아들을 돕기 위해 다시 전면에 나서는데 이들은 서방의 황제가 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격퇴하여 처형했고 동방 황제인 갈레리우스의 군대마저 물리친다. 이 와중에 막시미아누스와 막센티우스 부자 사이에 갈등이 생기며 막시미아누스는 오늘날 독일의 트리어로 도망치게 되고 서방의 부황제이던 콘스탄티누스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며 그에게 힘을 보탠다. 하지만 어색한 연합도 잠시였고 한때 황제였던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가 북방의 이민족을 토벌하러 간 사이에 쿠데타를 시도했고 결국 분노한 콘스탄티누스에게 살해당한다. 공동의 적인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는 동방 황제가 된 리키니우스와 연합하게 된다.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의 계시를 받았다는 그 유명한 로마의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전사시키며 승리한다. 콘스탄티누스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했고 로마에 평화가 찾아오나 했지만 이번에는 같은 편이었던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대결을 하게 된다. 그들은 발칸 반도, 비잔티온 일대의 보스포러스와 남쪽의 다르다넬즈 해협에서 전투를 벌였고 결국 324년에 콘스탄티누스가 승리하며 기나긴 내전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324년부터 6년 동안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보스포러스 해협에 걸쳐 있는 ‘일곱 언덕의 도시(비잔티온에는 로마와 마찬가지로 ‘일곱 언덕’이 있었다. 현재 이스탄불에는 튀르키예어로 ‘일곱 언덕’을 뜻하는 예디태페Yeditepe란 지명이나 간판들이 곳곳에 보인다)를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그는 이곳에 로마의 모델에 따라 궁전, 성당, 수로, 지하 저수조, 목욕탕 및 포룸(광장)과 로마식 ‘빵과 서커스’ 정책을 위한 히포드롬(경기장)을 건설했다. 하나하나가 요즘의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규모의 토목공사였다. 330년에 도시는 ‘신 로마(Nova Roma)’로 명명되었고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이 도시를 사실상 건설한 ‘그 위대한 황제’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폴리스(그리스어로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의미: 이하 영어식 표현인 콘스탄티노플로 표기)라고 부르게 된다. 또한 콘스탄티누스는 도시를 방어하는 거대한 성벽을 건설하였는데 이것은 초기 도시의 주요 경계가 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6~7미터, 두께는 2미터 정도에 성벽 사이사이에 방어탑이 위치하여 당시 기준으로는 도시 방어에 충분한 수준이었다. 이후 70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 5세기가 되었다. 당시 제국의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는 훨씬 더 커져버린 대제국 수도의 위상에 걸맞은 방어 시설을 갖추길 원했다. 신설된 성벽은 이전 콘스탄티누스 성벽 보다 서쪽에 건설되었고 금각만(Golden Horn/Haliç 콘스탄티노플 내에 있는 만)과 마르마라 해를 연결했다. 성벽은 황제의 재위 기간 중인 413년부터 417년까지 4년 동안 대부분의 구조가 완성된다. 이 성벽의 특기할 만한 것은 삼중의 방어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우선 제일 앞쪽에는 해자(물로 채워진 방어용 수로)가 있는 첫 번째 흉벽이 있었고 이후 높이 5미터인 ‘제2 성벽’ 그리고 마지막으로 높이 12미터인 ‘제3 성벽’이 있었다. 성벽에는 총 96개의 망루가 있었고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적들을 철통과 같이 감시했다. 성벽의 방어력은 너무나도 강력했는데 침략해 온 적들은 그 위용에 짓눌렸고 감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강력한 훈족의 아틸라(Attila)마저 거대한 성벽의 모습을 보고 기가 질려 공격을 포기할 정도였다(대신 외교적으로 조공을 받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이후 1,0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수많은 적들이 콘스탄티노플의 삼중 성벽을 뚫으려 했지만 누구도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삼중 성벽의 강력한 방어망 아래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점령이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비잔틴 제국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1025년에 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었던 바실리오스 2세가 사망한 이후 황제의 권력이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한다. 1071년에는 소아시아의 만지케르트(현재 튀르키예의 동부 말라즈기르트)에서 셀주크 튀르크에게 대패한 후 아나톨리아 동부를 상실했다. 1204년에는 전술한 대로 ‘내부의 배반’에 의해 제4차 십자군에게 도시 자체가 점령되었으며 일시적으로 ‘라틴 제국’이 성립되기도 하였다. 십자군 원정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성립된 라틴 제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들의 지배에 저항하는 비잔틴 귀족들과 계승국들의 노력으로 비잔틴 제국은 1261년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제국의 힘은 과거의 로마제국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지고 있었다. 이후 14세기가 시작되면서 떠오르는 신흥 오스만 제국의 확장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아나톨리아 및 대부분의 발칸 반도에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렇게 비잔틴 제국은 팔, 다리와 몸통을 빼앗기게 되었고 1453년에는 그리스의 남부와 흑해 연안의 일부 제후국 외에는 제국의 심장인 수도 콘스탄티노플 하나만 남은 상황이었다.
떠오르는 초승달
1451년 19세의 나이로 술탄으로 등극한 메흐메트 2세는 젊은 청년 군주로서 제국의 확장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트라키아(현재 튀르키예의 유럽 쪽 영토)에 위치한 수도 에디르네에 머물고 있던 그에게는 한 가지 눈엣가시가 있었는데 바로 남쪽에 위치한 거대 도시 콘스탄티노플이었다. 14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를 거쳐 발칸반도로 진군하며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당시 오스만 제국의 한가운데 위치하여 원활한 통행과 연결을 방해하는 골치 아픈 걸림돌이었다. 이곳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통해 흑해의 여러 무역 거점들과 연결될 수 있었고 아래로는 마라마라 해를 거쳐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지중해로 나아갈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지난 수세기 동안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고 수많은 배들의 이동과 무역로를 통제해 왔다. 무역로를 통제한다는 것은 이에 수반되는 막대한 이익도 통제할 수 있음을 뜻했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플은 지난 2천 년 동안 이어온 ‘위대한 로마제국’의 마지막 후계자였다. 이곳을 점령하는 자는 스스로를 세계적인 제국의 황제로서 카이사르(로마 황제)로 칭할 수 있을 정도였다. 더구나 동방정교의 중심지였는데 이슬람인 오스만 제국이 이곳을 점령한다면 크리스트교에 대한 이슬람의 우위를 만천하에 자랑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이슬람의 맹주로서의 오스만 제국과 술탄 자신의 위상 또한 더욱 올라갈 수 있었다. 정복욕이 넘치는 혈기왕성한 약관의 술탄에게 콘스탄티노플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목표물이었다. 비잔틴과의 ‘평화 공존’을 원했던 아버지 무라트 2세와는 다르게 그는 즉위 후 즉시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비잔틴 제국이 약화되었다 하더라도 콘스탄티노플은 세계 최강의 삼중 성벽으로 방어되는 곳이었고 사실상 지난 천년 동안 거의 뚫린 적이 없었다.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성벽에 대한 공격은 물론 해군을 통한 바다로부터의 공격도 필요했다. 술탄이 가장 주목한 것은 우선 콘스탄티노플을 외부로부터 철저히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유럽의 크리스트교 동맹국으로부터 지원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우선 북쪽의 헝가리 및 세르비아 등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며 후방을 안정시켰다. 더불어 해상 강국인 이탈리아의 제노바(콘스탄티노플 맞은편 금각만에 있는 갈라타는 사실상 제노바의 관할지였다)나 베네치아와는 이들의 무역 특권을 보장하며 비잔틴과의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하도록 유도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러한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비잔틴에 대한 외부 지원 가능성을 최소화하며 피 흘리는 일 없이 전략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더불어 물리적인 봉쇄를 위해서도 노력했는데 콘스탄티노플이 최적의 전략적 요충지였지만 동시에 좁은 보스포러스 해협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즉, 이 해협만 봉쇄하면 도시를 외부의 지원으로부터 철저히 단절시키고 천천히 굶겨 죽일 수도 있었다. 술탄은 이를 위해 콘스탄티노플 동쪽에 위치한 보스포러스 해협의 유럽 쪽 절벽 위에 루멜리 히사르(Rumelihisarı)라는 요새를 건설한다. 이곳은 보스포러스 해협의 폭이 660m 정도로 가장 좁은 곳이었고 지나가는 모든 선박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데 상당히 용이한 위치였다. 세 개의 대형 감시탑과 13개의 망루를 갖춘 요새는 1452년 4월부터 건설되어 불과 5개월의 짧은 시간 내에 완공된다. 다음으로 메흐메트 2세가 주목했던 것은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이었던 ‘대포’였다. 그는 헝가리 출신의 주물과 대포 관련 기술자인 우르반(Orbán)을 고용하여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였던 ‘공성攻城 대포’를 제작했다. 이 포는 길이 8.2m, 구경 800mm의 거포로서 수십 마리의 소가 끌었으며 한 발 발사 후 열을 식히기 위해 3시간 정도의 재장전 시간이 필요할 정도로 엄청난 무기였다. 이 거포는 거대한 삼중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오스만 군의 핵심 병기였고 실제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된다. 사실 우르반은 1452년에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에게 먼저 자신의 대포를 제안했지만 국고가 파탄 직전이었던 황제는 우르반이 제시하는 막대한 봉급과 거포 제작 비용을 마련할 수 없었고 그렇게 거래는 무산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포는 오히려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려는 메흐메트 2세의 소유가 되어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을 노리게 되었다. 오스만 군은 300kg 이상의 거대한 돌덩이를 날려 보내던 우르반의 거포 외에도 총 60문 이상의 중소형 대포들을 준비하였다. 또한 오스만 군은 바다에서의 봉쇄와 공격을 위해 100척 정도의 갤리선(노 젓는 군선)을 준비했다. 이들은 마르마라해 쪽의 바다에서 보스포러스 해협으로 들어오는 길을 차단하여 혹시라도 제노바나 베네치아의 배들이 콘스탄티노플로 지원군이나 보급품을 들여오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반면에 공격하는 아군에게는 끊임없이 보급품을 전달하는 등 봉쇄와 병참 양면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이렇게 모든 준비가 갖추어져 가자 메흐메트 2세는 드디어 1453년 2월에 10만 명에 달하는 그의 군대에게 출동 명령을 내린다. 2천 년 동안 이어진 로마 제국의 종말을 향한 최후의 일전이 곧 벌어질 예정이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