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중 벌어진 모스크바 공방전(1941~1942)
모스크바의 한겨울 날씨는 너무나도 추웠다. 한 달 전인 12월에 방문했을 때 영상 10도 전후의 포근한 날씨를 경험했던 나로서는 방한 대비를 충분히 하지 않았던 것이 큰 실수였다. 나중에 전해 들었지만 한 달 전 방문 시 날씨는 모스크바 역사상 기록적인 12월의 이상 고온이었다고 한다. 주말까지 이어진 업무를 마치고 저녁을 먹기 위해 붉은 광장(중세 러시아어의 끄라스나야Красная는 ‘붉은’이란 뜻과 더불어 ‘아름다운’이란 의미도 있어 중의적으로 사용되었다. 즉 붉은 광장은 원래 아름다운 광장이란 뜻이다) 쪽으로 이동했는데 “드디어 붉은 광장을 보는구나!”하는 설렘과 동시에 “당장 이 추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지극히 본능적인 느낌이 교차했다. 마침 인근의 거대한 옥외 전광판에 있던 온도계를 보았는데 정확히 오후 6시경의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영하 23도’라고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분명히 백엽상에서 측정한 공식 온도일 테니 실제 느꼈던 체감 온도는 훨씬 더 추웠을 것이다. 그날의 날씨는 실제로도 내가 살면서 겪어 본 가장 심했던 추위였다(비슷한 추위가 군 복무 시에도 있었지만 그때는 실제 추위 보다도 마음이 더 추웠다). 해마다 5월에 실시되는 ‘대독 승전기념일’ 퍼레이드에 대규모 전차들이 들어오던 국립역사박물관을 지나 드디어 붉은 광장에 들어섰다. 삼삼오오 이동하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거의 대부분이 털모자인 샤프카를 귀까지 내린 채 착용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겨울의 털모자는 패션이라기보다는 방한을 위해 반드시 착용해야 하는 필수 생존 아이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날은 모스코비치들도 추웠는지 모두들 발걸음이 빠른 것처럼 느껴졌다. 키가 훤칠하게 큰 군인 한 명이 애인으로 보이는 여성과 유쾌하게 걸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지금도 분명히 기억나는데 그 군인은 웃는 얼굴을 하는 가운데 샤프카의 귀마개를 내리지 않았다.
곧 시야 정면에 그 유명한 ‘성 바실리 성당’의 동화 속 양파 같은 독특한 실루엣이 보였다. 광장 한쪽에 있는 웅장한 크렘린과 석탑은 희미한 조명 아래 우뚝 서 있었다. 웅장한 광장과 주변의 모습에 잠시나마 추위를 잊었지만 조명 아래 비친 강한 바람의 모습을 보며 내가 한 겨울의 러시아에 있음을 실감했다. 차갑고 무거운 공기가 나를 감싸며 강하게 짓누르고 있었는데 마치 거대한 냉동고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긴 코트의 깃을 세우고 온몸으로 들어오는 한기를 막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지만 달랑 양말 하나만 신고 있던 발은 도저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문자 그대로 추위로 인해 발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는데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일행 모두 크렘린 반대편에 위치한 ‘굼(GUM) 백화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외부의 살인적인 날씨와는 달리 백화점 내부는 전혀 다른 신세계가 펼쳐졌다. 넓고 고풍스러운 건물 안에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들이 즐비했고 연초에 쇼핑하는 모스크바 시민들로 북적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내에는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고 몸과 마음이 포근해졌다. 잠시나마 그 온기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기에 다시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빨리 저녁식사를 마치고 내일 업무를 위한 야간 회의 등의 일정을 소화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마치 심해 잠수부가 깊은 호흡을 하고 물속에 뛰어들듯이 나는 다시 한번 코트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비장한 각오를 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렇게 모스크바의 추운 겨울 밤길에 이동을 이어갔다.
이렇게 추위 속에 악전고투를 겪으면서 이동하는 나에게 오버랩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70년 전 겨울, 나와 비슷한 시점에 모스크바 코 앞까지 진군했던 독일군이었다.
소련을 끝장내기 위한 장대한 계획
1941년 11월 초 크렘린의 집무실에 있던 소련 최고 지도자 스탈린의 마음은 참으로 복잡했다. 5개월 전인 6월 말 히틀러는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300만 대군을 동원해 광활한 소련을 침공했던 것이다. 히틀러에게 있어 소련의 드넓은 영토는 그의 광기가 집약된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밝혔듯이 증가하는 게르만족의 생활권인 레벤스라움(Lebensraum)을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곳이었다. 그는 이전 해에 있었던 핀란드에서의 소련군의 형편없는 졸전(소련군은 최종적으로 핀란드에 이기기는 했지만 무려 20만 명의 사망자를 내었다!)을 보며 소련군이 상당한 약체라고 생각했고 일단 쳐들어 가기만 하면 그 엉성한 체제가 순식간에 붕괴될 것으로 보았다. 서유럽을 모두 점령하고 고립된 영국만 남겨 놓은 상황에서 히틀러는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에 소련 침공 작전을 입안하도록 명령한다. 최고사령부의 엘리트들이 다시 한번 지난여름의 성공을 재현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전은 암호명 ‘바르바로사(Barbarossa: 이탈리아어로 붉은 수염이라는 의미)’라고 이름 붙여졌는데 12세기에 슬라브족 정복 왕이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당시 작전 입안에 참여했으며 훗날 스탈린그라드에서 패장이 되는 프리드리히 파울루스(Friedrich Paulus)는 작전의 성공에 대단히 자신만만했고 8~10주면 독일이 승리할 것으로 확신했다. 최초에 작전은 소련의 눈이 녹고 라스푸티차(러시아에서 눈이 해빙된 후에 생기는 진흙의 바다)가 사라지는 5월에 시작하려 했지만 갑자기 예기치 않은 변수가 발생하게 된다.
한때 히틀러의 ‘사상적 스승’이었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1940년 이후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단히 심기가 불편했다. 자신보다 한 수 아래로 보았던 독일의 히틀러가 서유럽을 순식간에 점령하며 ‘유럽의 패자’로 등극했던 것이다. 이에 가만히만 보고 있을 수 없었던 무솔리니는 1940년 10월에 이탈리아가 이미 점령했던 알바니아를 통해 국경을 맞댄 그리스를 침공한다. 하지만 메탁사스 수상이 영도하는 작은 거인 그리스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신속한 승리를 장담했던 이탈리아군은 오히려 그리스 군에 밀리며 알바니아 영토로 후퇴하게 된다. 해가 바뀌어 1941년이 되어서도 이런 사태에는 진전이 없었는데 ‘위대한 로마 제국’의 영도자 두체(Duce: 지도자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로 보통 무솔리니를 지칭한다)는 자군의 무능함에 치를 떨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이 즈음에 발칸 반도에서는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1941년 3월 25일에 발칸의 맹주 유고슬라비아는 추축국에 가입하며 친독 국가가 되었다. 문제는 불과 이틀 후 영국의 지원을 받은 반독.친영 장교들의 쿠데타가 일어나며 정권이 뒤집히게 된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5월의 소련 침공을 목전에 두고 있던 히틀러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소련과의 전쟁 시 발칸반도의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로 인해 배후의 안전이 위협받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독일군은 소련 침공을 연기하고 우선 발칸 반도를 평정하기로 결정한다. 독일과 이탈리아군은 4월 6일에 60만 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해 유고와 그리스를 동시에 침공했다. 당시 독일이라는 ‘전쟁 기계’는 그 효율성이 최고조인 상태였다. 전격전을 통한 독일 육군과 공군의 합동 작전으로 유고슬라비아는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4월 18일에 항복했다.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좀 더 강한 저항을 펼쳤던 그리스는 6월 1일에 항복하게 되었다. 더불어 그리스 지원을 위해 파병된 영연방군 1만 4천 명이 제대로 전투도 못해보고 포로로 잡혔다. 히틀러 입장에서는 다시 한번 지난해의 서유럽에서의 멋진 승리를 반복했을 뿐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목표인 소련 침공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왔다. 그 와중에도 작전은 몇 차례 연기되었는데 최종적인 날자는 1941년 6월 22일로 결정되었다. 이 날은 일 년 중 해가 가장 긴 ‘하지’였다. 이것은 그날 이후 해가 점점 짧아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그 의미를 크게 두지 않았지만 훗날 ‘이 한 달의 작전 연기’는 전쟁의 흐름 및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침공하는 독일군은 북부, 중부, 남부의 3개 집단군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그리고 키이우를 향해 쾌속 진격했다. 3개의 집단군 중에서도 중부집단군은 자타가 공인하는 독일군 중 최고의 부대였다. 사령관인 페도르 폰 복크 (Fedor von Bock) 원수 지휘 하에 프랑스 전역의 용장들인 클루게(Günther von Kluge)의 4군, 슈트라우스(Adolf Strauss)의 9군 그리고 기갑 전의 명장인 구데리안(Heinz Guderian)과 호트(Hermann Hoth)의 강력한 2개 기갑집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부집단군은 당시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의 육군이었다. 이들은 개전일부터 벨라루스 일대를 신속히 점령해 나갔는데 7월 9일까지 지역 요충지인 비얄리스토크와 민스크를 점령하였고 소련군 30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중부집단군은 바로 모스크바로 가는 중간 길목인 스몰렌스크 전투에 투입되었고 이곳에서 소련군 3개 야전군을 공격하며 압박한다. 소련군 입장에서 스몰렌스크가 뚫리면 다음 목표가 수도인 모스크바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했기에 스탈린은 조금의 후퇴도 용납하지 않았다. 소련군은 용감히 저항했지만 결국 독일군의 포위망에 꼼짝 못 하게 되었고 하나, 둘 사라져 갔다. 9월 초에 전투가 끝났을 때 독일군은 다시 한번 30만 명이 넘는 소련군 포로를 잡았다(이 중에는 비테프스크에서 포로가 된 스탈린의 장남 야코프 주가슈빌리도 있었다. 독일군은 스탈린에게 다른 독일군 고위 포로와 아들의 교환을 제안했는데 스탈린은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이후 야코프는 수용소에서 자살한다). 이제 모스크바까지의 남은 거리는 400km 정도였고 광활한 대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독일 병사들은 모두가 최후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고 누구나 할 것 없이 “모스크바로(Nach Moskau)!”라고 외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군 내부의 의사결정으로 엄청난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히틀러가 돌연 중부집단군의 ‘한쪽 주먹’인 구데리안의 2 기갑집단을 500km 남쪽의 키이우 전투에 투입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모스크바로의 쾌속 진격을 기대하고 있던 구데리안 장군은 강하게 반발한다. 훗날 그의 회고에 따르면 “키이우로 가라는 명령은 말하자면 독일로 돌아가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구데리안도 군인이었고 명령은 명령이었다. 그의 2 기갑집단은 남쪽으로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여 키이우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이때가 8월 21일이었다.
남쪽의 우크라이나 일대와 그 수도인 키이우는 독일군 최고참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 원수 휘하의 남부집단군이 맡고 있었다. 사실 7월과 8월을 거치면서 독일군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었지만 그 대부분이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의 성과였다는 점에서 초조해진 룬트슈테트 원수는 무엇인가 행동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키이우는 러시아 역사의 발원지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대도시였고 이곳의 점령은 상당한 상징성을 띄고 있었다. 8월 23일에 남부집단군 소속 클라이스트(Ewald von Kleist)의 1 기갑집단이 드네프르 강을 도하하며 키이우 남쪽을 향해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세묜 부돈니 원수 지휘 하의 소련 남서전선군 소속 4개군 80만 명이 있었다. 히틀러는 남부집단군 만으로는 이들 병력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고심 끝에 모스크바 진공을 목전에 앞둔 구데리안의 부대를 이동시켰던 것이었다. 한편 키이우로 이동 명령을 받은 구데리안의 2 기갑집단이 남진하기 시작했다. 독일군 앞의 소련군은 허둥대며 제대로 방어선도 구축하지 못한 채 공황 상태에 빠졌고 독일 전차 부대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결국 9월 14일에 키이우 동쪽 루브느에서 클라이스트(K)와 구데리안(G)의 알파벳 머리글자를 부착한 전차들이 합류하며 독일군의 거대한 포위망이 완성된다. 포위망이 점차 좁혀지는 가운데 소련군 지휘관들이 스탈린에게 포위망을 뚫고 후퇴할 것을 건의했지만 스탈린의 답변은 냉정하게도 현 위치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진격 앞에 더 이상 지킬 현 위치도 없어졌고 9월 20일이 넘어가자 사실상 소련군의 저항은 종식됐다. 9월 26일 독일군의 작전이 모두 종료되었을 때 소련군 남서전선군은 지구상에서 사라졌고 무려 66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단일 전투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승리였다. 히틀러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느끼며 “이제 이반(러시아인)은 죽었다”라고 크게 기뻐했다. 한편 키이우에서 소련군을 소탕하는 가운데 바르바로사 작전은 두 달 가까이 지연되었고 최초에 계획된 시간표와 맞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승리에 도취된 독일군에게 이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목표는 단 하나, 바로 소련의 심장인 모스크바였다.
모스크바를 점령하라!
키이우의 전선을 정리하고 난 독일군은 모스크바에 일격을 가하기 위한 거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물론 공격은 중부집단군이 맡을 것이었지만 소련군에 대한 확실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이번에는 반대로 북부집단군 소속의 4 기갑집단을 중부집단군으로 이동시켰다(이것은 북부집단군이 레닌그라드를 점령하지 않고 포위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한 것과 함께 결정되었다). 이로써 독일이 보유한 4개의 기갑집단 중 3개가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 투입된다. 당시 공격을 위한 독일군의 숫자는 총 180만 명에 달했고 전차 1,700대 및 항공기 1,300대를 동원했다. 이에 맞서는 소련군은 120만 명 정도였는데 독.소전 개전 이래 처음으로 독일군이 병력과 무기에 있어 소련군 대비 수적인 우위에 서게 되었다. 20년이 조금 넘은 소련이라는 국가의 운명이 이제 끝나려 하고 있었다.
소련 입장에서 이제 독일군의 다음 목표가 모스크바라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소련군은 모스크바를 방어하기 위해 도시 외곽에 3중에 이르는 거대한 방어선을 구축한다. 제1방어선은 모스크바에서 200km 이상 떨어진 비야즈마에서 브리얀스크에 이르렀다. 제2방어선은 모스크바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모자이스크에서 칼루가 등을 연결했는데 소련군의 주력 방어선이었다. 최후의 보루인 제3방어선은 모스크바 40km 이내에 힘키, 루블리노 등 시외곽을 순환하며 구축되었다. 9월 중순부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스크바 및 주변의 주민들 25만 명과 군인 20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고 거대한 참호와 철조망 및 대전차 방어선이 구축되었다.
10월 2일, 마침내 독일군 전차들이 암호명 ‘타이푼(Taifun: 태풍)’이라 불리는 모스크바 공략 작전을 위해 시동을 걸었다. 새로 중부집단군에 차출된 4 기갑군(히틀러는 당시 전차 부대의 사기 진작을 위해 ‘기갑집단 Panzergruppe’을 ‘기갑군 Panzerarmee’으로 승격 개칭하였다)이 선봉에 섰고 브야즈마 일대에서 소련 서부전선군 소속 4개군 80만 명을 포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워낙 엄청난 병력이 포위망에 갇히는 바람에 독일군은 다시 한번 이들의 소탕을 위해 진격을 멈추어야 했다. 소탕에는 10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60만 명 이상의 소련군이 포로로 잡히며 포위망은 정리되었는데 이제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소련군 주력은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 오판하며 최후의 일격을 준비한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독일군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들이 등장했는데 그 첫 번째는 바로 가을장마 후에 나타난 ‘라스푸티차’였다. 소련의 도로는 대부분이 비포장이었는데 이러한 곳에 비가 내리면 도로는 순식간에 진흙의 바다로 변해 버린다. 이러한 진흙바다에 마차, 오토바이 및 트럭은 말할 것도 없고 23톤의 무게를 가진 주력 3호 전차 등이 예외 없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진격이 느려지자 가뜩이나 연료 및 보급이 어려워지고 있던 독일군의 상황은 점점 더 어려운 형국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소련군도 진흙에서 고생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공격하는 독일군 측이 훨씬 더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소련 측으로서는 천운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독일군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통나무로 도로를 만드는 등의 임시변통 방법을 사용했고 거대한 매머드가 천천히 움직이듯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전선은 이토록 힘들게 움직였고 아직 모스크바 점령 까지는 좀 더 시간이 소요될 듯 보였지만 독일 지도부는 전과에 대한 자만심과 상황에 대한 오판으로 10월 10일에 대외적으로 소련전의 공식적인 승리를 발표한다. 이러한 나치 지도부의 자만과 오판에 응답하듯이 독일군은 4 기갑군을 앞세워 10월 18일에는 2차 방어선의 핵심인 모자이스크를 무너뜨렸고 북, 서, 남쪽의 3개 방향에서 동시에 진격을 계속했다. 특히, 남쪽의 툴라에서는 최정예인 구데리안의 2 기갑군이 진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때 스탈린은 동쪽의 쿠이비셰프로 정부를 이동하도록 명령했는데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며 모스크바 시민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사실 이때의 소련군은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독일군의 상대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많은 서방 측 인사들도 소련이 이미 전쟁에 졌다고 생각했다. ‘강철’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지닌 스탈린 조차도 이때만큼은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결코 저항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고 독일군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그렇게 스탈린이 절망의 심연에 빠져 있는 가운데 그에게 한 사람의 인물이 떠올랐다. 그는 바로 레닌그라드 방어를 힘겹게 수행하고 있던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 장군이었다. 외부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주코프는 1939년 8월 만주에서 벌어진 할힌골 전투를 통해 일본군을 격퇴했고 이후 일본이 두 번 다시 소련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다(이후 일본이 소련이 아닌 태평양 방면으로 공격하게 된 배경에는 분명히 할힌골에서 주코프의 소련군에게 패배했던 경험도 작용했다). 또한 레닌그라드에서 극도로 어려운 전선을 수습하며 방어전을 치른 경험이 있었다. 모스크바로 온 주코프는 휘하 참모와 병사들을 강하게 다그치며 군기를 잡고 방어선을 강화해 나갔다. 그의 다그침에 부응하듯이 소련군의 방어는 점점 더 필사적이 되었고 독일군의 진격 속도를 더욱 느리게 하였다.
10월 하순이 되자 모스크바를 공격하려는 독일군에게 진흙 바다와 명장 주코프에 이어 또 하나의 장애물이 다가왔다. 이전의 것들과 차이가 있다면 이번 장애물은 독일군의 전투 수행에 있어 그 ‘파괴적 영향력’이 훨씬 더 심각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러시아의 전통적인 겨울 복병인 ‘동장군’이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