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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베를린, 냉전에 맞섰던 따뜻한 인간의 도시(2)

미-소 간의 냉전(1945~1990)

by 이준호

강철의 전차에 돌로 맞서다

동베를린 봉기 시 소련군 전차에 맞서 돌을 던지고 있는 동베를린 시민

서베를린이 소련의 봉쇄에 대항하며 생존을 위한 투쟁을 끝내갈 무렵인 1949년 5월 23일에 서부 독일에는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를 수상으로 독일연방공화국(BRD, Bundesrepublik Deutschland서독)이 수립되었다. 이제 독일의 분단은 기정사실이었고 5개월 후인 10월 7일에 동부 독일에는 독일민주공화국(DDR,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동독)이 세워진다. 동독의 실권은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의 서기장인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가 쥐고 있었다. 다른 공산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울브리히트 역시 스탈린의 하수인이었는데 급진적인 공산주의 경제 정책들을 도입하며 ‘인민의 지상낙원’을 만드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자영업자가 사라지고 농업집단화 정책이 도입되었으며 산업은 중공업 위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정부에서 발표하는 수치상으로 동독은 마치 엄청난 성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농업의 생산성은 떨어져만 갔고 중공업에 집중하다 보니 일반 대중을 위한 생필품이 모자랐다. 상점에는 물건들이 하나, 둘 안 보이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전기도 부족하여 산업은커녕 일반 가정에도 단전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1952년 말에는 모든 국영공장에서 임금 인상 없이 추가 10% 생산을 강제하는 노동할당제를 도입하였는데 이는 노동자들의 상당한 불만을 야기하였다. 이전부터 소련군의 점령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서독으로 넘어갔는데 강압적인 공산주의 정책으로 경제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더욱 많은 이들이 서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규모 경작지를 관리하던 농민들의 탈출은 농작물 수확을 더욱 악화시켰다. 1951년에는 16만 명이 서독으로 탈출했고 1952년에는 18만 2천 명이 넘어갔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동독 당국은 서독과의 국경을 봉쇄하고 감시를 강화했다. 하지만 대중은 이미 마음이 떠났고 이들의 탈출 물결은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1953년에 더욱 가속화되었는데 최초의 4개월 동안 무려 12만 명 이상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가운데 1953년 3월 5일 모스크바에서 엄청난 뉴스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로 인민들의 지배자이며 공산권의 ‘대형(大兄 Big Brother)’이었던 스탈린이 뇌졸중으로 사망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의 시기가 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스탈린 사후 수상에 취임한 게오르기 말렌코프(Georgy Malenkov)는 6월 초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울브리히트를 접견하고 동독의 상황에 상당한 우려를 표명했다. 말렌코프는 급진적인 정책들을 일부 중단하고 보다 ‘인민 친화적인’ 방식으로 추진할 것을 울브리히트에게 전달(사실상 명령)한다. 동독으로 귀국한 울브리히트는 소련의 권고를 수용하여 강제적인 집단화를 유예하고 생필품 공급을 위한 소비재 투자를 증대하며 종교에 대한 강압도 거두겠다는 내용을 당 기관지에 발표한다. 하지만 이 발표에는 결정적인 것이 빠져 있었는데 바로 불만의 핵심이었던 노동할당제를 그대로 유지한 것이었다. 동독의 대중들은 정부의 발표 자체가 일종의 공산당의 실패를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냉담하게 반응했다. 더구나 많은 불만을 야기하였던 노동할당제의 유지는 대중의 분노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6월 12일부터 베를린 주변 브란덴부르크 일대에서 5천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모여 시위를 벌인다. 6월 15일에는 동베를린의 건설노동자들이 노동할당제 폐지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당시 총리였던 오토 그로테볼(Otto Grotewohl)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총리는 이를 가볍게 무시한다. 이제 대중의 분노가 점차 임계점을 넘기 시작했다. 6월 16일 오전 9시, 프리드리히샤인 병원 및 주변에 있던 300명가량의 노동자들이 노동할당제 폐지를 요구하는 현수막을 걸고 시위를 시작했다.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시위대는 점차 세를 늘렸고 중심가인 운터 덴 린덴을 거쳐 정부 주요 기관들이 몰려 있던 라이프치히 거리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라우드 스피커를 장착한 차량까지 입수하여 그들의 목소리는 점차 커지고 있었다. 노동계 간부나 정부 장관들이 나와서 시위대를 진정시키고자 했지만 4만 명으로 불어난 그들의 목소리는 이미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동독 지도부는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 노동할당제의 철회를 발표한다. 이날 저녁에 시위대는 조용히 해산했지만 문제는 이들의 소식이 뉴스와 입소문을 통해 동독 전역으로 펴져 나갔다는 것이다. 그동안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사람들에게 잠복해 있던 모든 불만들이 하나, 둘 터지려 하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정치 문제를 얘기했고 자유 총선거를 요구하고 있었다. 동독 전체의 80% 지역에서 반정부 및 반소련 시위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소련군정 책임자에서 주 동독대사가 된 블라디미르 세묘노프(Vladimir Semyonov)는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갈 것을 예견했고 모스크바와 협의 후 동독 지도부에 소련군을 투입할 것임을 전달한다. 그렇게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운명의 6월 17일이 다가왔다.


17일 새벽부터 많은 노동자들이 다시 한번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정부 부처들과 관공서가 몰려 있는 포츠담 광장 등의 시내 중심가로 향하고 있었다. 시위대는 우선 8천 명에 달하는 동독 전투경찰과 마주쳤는데 같은 독일인인지라 상호 공격의 의도는 내비치지 않았다. 이때 T-34/85 전차를 앞세운 2만 명의 소련군이 시위대를 향해 출동했다. 소련군이 자동소총과 기관총 등으로 발포를 시작했고 사람들이 쓰러져갔다. 시위대는 지도부가 없었고 그저 우연한 기회에 뭉치게 된 일단의 사람들로서 전혀 조직화된 집단이 아니었다. 총과 전차로 무장한 소련군이 다가오자 시위대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이들은 순식간에 흩어졌고 곧 진압되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강철의 전차를 향해 돌을 던졌다.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이것은 소련군 점령 이후 쌓여 있던 동독인들의 모든 분노가 집약된 행동이었다. 시위는 동베를린뿐만 아니라 동독 전체에서 벌어졌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동베를린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동독 당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125명의 사망자가 있었다고 하지만 이것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은 없었다. 이후 동독 경찰에 체포되거나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수백 명이 추가로 희생당했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동독 전체에서 무려 150만 명의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사회주의 인민 낙원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노동자들이 정권에 반대해 들고일어나는 상황에 소련과 동독 지도부는 놀랄 수뿐이 없었다. 사회주의 정책은 완화되었고 동독 당국은 집단화 보류나 임금 인상 등을 통해 대중의 마음을 얻으려 했지만 이미 많은 동독인들이 정권에 마음을 돌렸고 서독으로 탈출하고자 했다. 동독 정권은 비밀경찰인 슈타지(Stasi)를 동원하여 감시망을 촘촘히 하였고 이전에 비해 국경을 훨씬 더 강하게 단속했는데 이를 통한 탈출이 막히자 동독인들은 다른 루트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바로 수도인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는데 50년대를 통해 이러한 탈출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서방으로의 엑소더스(Exodus)는 1960년으로 접어들자 동독 당국이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


장벽에 갇혀 버린 도시

베를린 장벽을 건설 중인 동독 군인들과 인부들

동베를린에서 봉기가 일어난 후 수년 동안 서방으로 탈출한 사람은 점점 더 늘어만 갔다. 1953년부터 1961년까지 그 숫자는 무려 240만 명에 달했는데 당시 동독의 인구가 1,730만 명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나라의 성장과 존망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서독으로의 탈출자들 중에 고학력의 우수한 인재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다시 생산성의 저하로 연결되었고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바탕인 국가발전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다수의 사람들이 아직 통행이 가능했던 베를린을 통해 서방을 넘어왔고 심지어는 동유럽의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 이 루트를 이용했다. 더 이상 상황을 좌시할 수 없었던 동독의 울브리히트는 대형인 소련에게 동독인들의 탈출을 막기 위한 긴급한 대안을 제시한다. 강제로라도 이들을 가두어 놓아야 했다. 이런 와중에 스탈린그라드의 영웅이자 소련의 실권자였던 흐루쇼프는 1958년 말에 베를린에서 점령국들이 모두 철수하고 베를린을 동독에 귀속시키자는 일방적인 최후통첩을 보낸다. 베를린을 통째로 먹으려는 소련의 의도를 간파한 서방 측은 당연히 제안을 거부했고 베를린에는 긴장이 나날이 높아져만 갔다.


1960년대로 들어오면서 미국의 지도부에 변화가 생겼다. 이전의 아이젠하워를 대신해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대선에 나선 존 F. 케네디가 1961년 1월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역전의 용사 흐루쇼프는 케네디를 경험이 미숙한 ‘부르주아 부잣집 도련님’으로 보았고(사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그의 역량을 시험해 보고자 했다. 1961년 6월 3일부터 4일까지 미.소 양국의 정상은 오스트리아 비인에서 정상 회담을 실시하게 된다. 흐루쇼프는 이때 다시 한번 베를린을 자유도시로 만들고 미소영불의 4개 점령국이 동시에 철수하자고 제안한다. 문제는 베를린은 동독의 한가운데 있었고 4개 점령국이 철수한다면 오래지 않아 소련의 영향권으로 들어갈 것이 너무나도 뻔했다. 케네디는 흐루쇼프의 제안을 ‘일종의 트릭’으로 이해했고 이를 거절하며 서베를린에서의 철수가 절대 불가함을 천명했다. 케네디의 베를린에 대한 단호한 태도와는 달리 이때의 회의 과정에서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생각보다 유약하다고 판단했고 케네디는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끌려 다녔다. 또한 흐루쇼프의 여러 발언이나 대화에서 당황하거나 때로는 우유부단한 모습도 노출했는데 노련한 흐루쇼프는 이러한 찰나의 순간들을 놓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흐루쇼프는 소련이 베를린에서 ‘특정 행동’을 해도 케네디가 크게 대응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이것은 다음 해에 발생한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마침내 울브리히트가 애걸하던 동독인들의 탈출을 막기 위한 방안을 승인한다. 그것은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의 건설이었다.


1961년 8월 13일 일요일 아침 일단의 동독 군인들이 동베를린의 서쪽 경계를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루머로만 떠돌던 베를린에 장벽이 설치되는 순간이었다. 우선 경계를 따라 철조망이 설치되었고 이후 수개월 동안 벽돌과 콘크리트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동독군은 이 과정에서 서쪽으로 탈출하거나 공사를 방해하는 사람들은 사살하도록 명령을 받은 터였다. 서베를린의 경찰들과 연합군 점령군들은 분노에 차서 장벽이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은 베를린 전체에 대한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하는 포츠담 협정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었다. 동독은 겉으로는 이것이 서베를린의 파시스트 세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주는 '반파시스트 방벽(Antifaschistischer Schutzwall)'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공산주의가 체제 경쟁에서 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뼈아픈 증거가 되었고 심지어 헝가리 등 같은 공산권 내에서도 비판이 일었다. 불시에 소련에게 당한 미국은 전투기를 급파하고 1개 전투여단을 서베를린에 파병하는 등 대응하는 모양새는 보였지만 더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미국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자 서방 언론에서는 소련이 포츠담 협정을 위반했다며 난리가 났다. 특히 서독에서 “미국이 소련에 대항하려는 의지가 있는 것인가?”라며 강한 비판이 쏟아졌다.


아무리 서방 측에서 분노하고 난리가 났다 하지만 장벽을 통한 최대의 피해자는 동베를린을 더 이상 탈출하지 못하는 시민들이었다. 순식간에 서베를린의 지인이나 친인척들과 교류가 끊겨 버린 이들은 총을 들고 사살하려는 국경경비대 앞에서 탈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장벽 건설 초기에 철조망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콘라드 슈만

하지만 곧 온갖 기발한 방법이 동원되며 동베를린 시민들이 장벽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장벽이 지나는 곳 중에 베르나워 거리(Bernauer Straße)에는 건물의 창이 서베를린 쪽으로 난 곳이 있었다. 한동안 이곳 일대에서는 창문을 통해 뛰어내리기만 하면 서베를린으로 갈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상황을 파악한 동독 당국이 창문을 벽돌로 막고 폐쇄해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지상의 장벽을 피해 지하로 터널을 파기 시작했다. 서베를린 쪽의 조력자들의 지원을 받고 터널을 통과한 사람들은 자유를 맛보았지만 이후 동독군은 지하 터널도 폐쇄하고 뒤지기 시작했다. 개조한 차에 몰래 숨어서 탈출한 사람도 있었고 더 대담한 몇몇은 소련군의 군복으로 위장을 한 채 탈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장벽 건설 초기에 탈출한 콘라드 슈만(Konrad Schmann)이었다. 동독군 경비부대 출신의 슈만은 벽이 본격적으로 올라가기 전인 8월 15일에 탈출했는데 그의 극적인 탈출 장면이 사진으로 남으며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동독인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1961년 장벽 건설 이후 이곳을 넘다가 사살당한 사람들은 136명이었다. 반면에 5천 명 이상이 탈출에 성공하며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1963년 6월 26일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서베를린을 방문했다. 2년 전 동독이 장벽을 건설할 때 무력하게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답변이라도 하듯 그는 서베를린의 시청사인 쇤네베르크(Rathaus Schöneberg) 앞 광장에서 서베를린 시민들을 직면했다. 무려 45만 명의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그는 자유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도 베를린 시민(Ich bin ein Berliner)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서베를린 시민에게는 미국이 더불어 전 세계의 모든 자유진영이 함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이 날의 연설을 통해 케네디는 그동안 흐루쇼프에게 끌려 다녔다는 유약한 이미지를 한 방에 날려 버렸고 무엇보다도 서베를린 시민과 전세계 자유 진영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하지만 불과 5개월 후인 11월 22일에 케네디는 암살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명연설도 굳건한 장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1980년대가 되자 ‘한 사람’의 등장과 함께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벽을 허물 때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벽을 허물고 냉전을 끝내다

마침내 무너진 장벽 위에 올라간 서베를린 시민들

1985년 3월 54세의 미하일 고르바쵸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ev)가 소련 공산당 최연소 서기장에 취임했을 때 그는 자신이 생각보다 많은 문제들에 직면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소련은 겉은 그럴싸해 보였지만 이미 과거의 초강대국이 아니었다. 70년 동안 계속된 공산주의 체제는 사방에서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관료들은 부패했고 인센티브도 없는 직장에서 사람들은 근로 의욕을 잃었으며 거의 모든 산업에서 생산성이 떨어졌다. 1979년부터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판 베트남 전쟁’으로서 엄청난 전쟁 비용이 지출되었고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를 갉아먹었다. 이 와중에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저유가(1986년에는 유가가 배럴당 $14 수준으로 전년 대비 절반 이상 떨어졌다)는 석유자원이 최대의 수출품이었던 소련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이제는 더 이상 냉전의 라이벌인 미국과의 군비경쟁이나 우주개발 등을 거론할 상황이 아니었다. ‘레닌이 세우고 스탈린이 확장한 체제’의 생존을 위해 무엇인가 대안을 찾아야 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고르바쵸프는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로 불리는 정책을 본격적으로 도입한다. 그는 과거의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나 안드로포프(Yuri Andropov)와 같은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지도자상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를 추구했다. 소련의 젊은이들과 지식층이 고르바초프에게 열광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변화는 소련이 맹주로 있던 동유럽 국가들에 퍼지기 시작했다. 훗날 발매된 스콜피온스(Scorpions)의 노래처럼 서서히 ‘변화의 바람(Winds of change)’이 불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 앞에서 연설 중인 레이건 대통령

1987년 6월 12일 브란덴부르크문이 바라다 보이는 베를린 장벽에서 한 사람이 연설을 하고 있었다. 청중은 서독의 정치가들과 서베를린의 시민들이었고 연사는 당시 미국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었다. 그는 개혁과 개방을 추진 중인 소련의 고르바초프에게 외쳤다. “고르바초프 서기장, 평화를 원한다면 여기로 와서 이문을 여시오. 이 벽을 허무시오!(Mr. Gorbachev, tear down this wall!)” 놀라운 것은 소련 측이 레이건의 도발과 같은 연설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분명 소련이 이전 같지 않다는 중대한 시그널이었다. 1989년 1월 동유럽의 헝가리는 자유선거를 도입하고 1956년의 ‘헝가리 폭동’을 ‘의거’로 재지정했다. 좀 더 서유럽에 다가가고자 했던 헝가리는 5월에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있는 철조망도 제거하기 시작한다. 이때 기회를 엿보던 수많은 동독인들이 휴가를 빙자하여 헝가리로 건너왔는데 이들은 곧장 오스트리아를 통해 서독으로 건너가 버린다. 여름 내내 이러한 월경 탈출 사건이 전세계인들의 탑뉴스가 되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도 국경을 열었는데 프라하의 서독대사관에는 수많은 동독 탈출자들이 몰려들며 난민 신청을 했다. 1989년 봄부터 탈출했던 동독인들의 숫자는 무려 34만 명에 달했는데 이제는 동독 정부도 더 이상 거대한 탈출의 물결을 어찌할 수 없었다. 9월에서 10월 초까지 베를린과 라이프치히 등 동독 각지에서 연일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반정부 시위가 열렸다. 결국 강경파인 동독 서기장 호네커(Erich Honecker)는 10월 18일에 실각하게 된다. 사태를 안정시키기 위해 11월 6일에 동독 정부는 새로운 여행 규정을 발표하게 되는데 여전히 복잡한 당국의 사전 허가절차에 동독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사흘 후인 11월 9일 동독 정부 대변인인 귄터 샤보프스키(Günter Schabowski)는 서독이나 해외로의 개인 여행을 ‘아무런 조건 없이(서방에 친척이 없어도)’ 신청할 수 있음을 발표한다. 이때 한 이탈리아 기자가 그 조치가 언제부터 발효되느냐고 물었다. 마침 휴가에서 돌아와 정신이 없던 샤보프스키는 순간 의도치 않게 ‘지금 바로(Sofort, unverzüglich)’라고 말해 버린다(사실은 그다음 날부터 천천히 적용될 계획이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베를린 전체에 전파되었고 동.서 베를린의 수많은 시민들이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것을 본 동독 국경수비대는 긴장했지만 동베를린 시민들이 “당신 국경개방에 대한 뉴스도 보지 않았냐?”며 얘기하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한다. 이들은 시민들의 물결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방관하며 국경을 개방하게 된다. 이후 몇몇 사람들이 망치와 정을 들고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동서 양쪽의 사람들이 뚫린 벽을 통해 손을 잡고 장벽 위에 올라가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스러운 순간을 함께 나누었다. 그렇게 28년 동안 베를린을 가르며 서있던 장벽이 무너졌고 44년 동안 지속되었던 ‘냉전’이 막을 내렸다. 1년 뒤인 1990년 10월 3일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가 울리는 가운데 동서독은 마침내 하나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통일된 독일의 수도로서 베를린은 다시 한번 그 역할을 맡게 된다. 1994년 8월 31일 베를린에서는 과거 소련군(러시아군)의 서부집단군 사령부 및 경비여단의 공식적인 철수가 종료되었다. 이들은 1945년 4월 이후 베를린에 주둔했던 러시아군의 마지막 잔존 부대였다. 그렇게 베를린은 완전한 독일로 돌아왔다.


이전 여행에서 10여 년이 지난 2005년경 나는 다시 베를린을 찾았다. 업무 차 간 일정이라 많은 곳을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베를린은 많은 것이 변해 있었고 급격히 변해가는 중이었다. 도시 곳곳에 차양막을 친 공사장들이 보였고 과거 동베를린 쪽 시내에도 서구식 쇼핑몰 속에 글로벌 브랜드들의 가게와 광고판이 현란했다. 마치 자신의 우중충한 회색 빛 콘크리트 과거를 뒤로 하고 밝고 새로운 생명으로 부화하려는 듯이 베를린은 변신을 하고 있었다. 이제 베를린은 독일의 확고한 수도이자 유럽의 중심으로 우뚝 서있다. 이 도시가 현재의 번영을 이어가고 과거와 같은 비극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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