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비인 2차 포위(1683년)
날개를 단 구원군의 등장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왕인 얀 3세 소비에스키는 8월 15일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그의 중무장 군대를 이끌고 비인 구원을 위한 장대한 출정을 개시했다. 그의 군대는 총 27,000명에 달했는데 기병이 2만 명, 보병이 7,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병은 화승총과 창으로 무장했고 말이 끄는 대포도 가지고 있었다. 기병 중에는 철갑으로 무장하고 등 뒤에 날개 모양의 화려한 깃털을 단 3,000명의 중갑기병대(Winged Hussar)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대 유럽 최고의 기병대였고 폴란드가 치른 수많은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바이에른, 바덴, 프랑켄, 슈바벤 등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공국들도 군대를 출병시켰다. 규모가 컸던 폴란드군은 하루에 약 30km의 속도로 총 500km를 이동했고 9월 초에는 오스트리아 영토에 도착할 수 있었다. 9월 6일에 모든 신성동맹군들이 비인 북서쪽 30km에 위치한 도나우 강가의 툴른(Tulln)에 집결했고 이제 비인을 구원하기 위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곳에 모인 기독교 신성동맹군의 수는 총 7만 5천 명에 달했다. 전열을 가다듬던 신성동맹군은 9월 11일 조금 더 비인 방향으로 이동했고 시 북쪽의 칼렌베르크산(Kahlenberg: 현재 비인의 19 구인 되블링 Döbling)에 도착했다. 480m 정도의 높이로 비인 시내를 굽어보는 이곳이 바로 오스만 군과의 결전을 치를 운명의 장소였다. 구원군은 흰색 연기로 봉화를 피우며 자신들의 도착을 비인 수비대가 알 수 있도록 조치했다.
9월 12일의 전투는 이미 신성동맹군이 도착했음을 감지한 오스만 군이 먼저 개시했는데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들은 새벽 4시경에 신성동맹군 진지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신성동맹군도 상황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는데 로렌의 선제후인 카를 5세의 병사들이 오스만 군을 막아내며 반격을 주도했다. 이후 날이 밝으며 아침이 되었다. 신성동맹군은 격렬한 전투 끝에 누스도르프와 하일리겐슈타트 등의 주변 도시를 함락시키며 적을 압박해 나아갔다. 정오가 되자 점차 오스만 군이 밀리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러한 가운데 오스만 군은 비인의 성벽으로 최후의 공격을 감행하려 했지만 구원군이 왔음을 안 수비대는 결연히 저항했고 오스만 군은 물러설 수뿐이 없었다. 신성동맹군은 서서히 남쪽의 비인 방향으로 진격을 개시했는데 사태가 이렇게 되자 오스만 군 소속의 기독교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자 공격의 주력은 폴란드군이 되었는데 이들은 보병으로서 오스만 군을 서쪽에서 공격하며 격렬한 전투를 이어갔다. 북서쪽 방향에서는 작센과 바이에른 공국의 군대들이 공세를 이어갔고 북쪽에서는 합스부르크의 군대도 합류했다. 다방면에서의 압박을 통해 신성동맹군은 오스만 군의 중앙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때 즈음에는 오스만 군도 위협을 감지하고 그들의 지휘부를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오스만 군에게 결정타를 먹일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고 신성동맹군의 ‘거대한 주먹’이 행동개시를 앞두고 있었다.
마침내 오후 6시가 되자 폴란드 국왕인 얀 3세 소비에스키는 자신의 최정예인 폴란드 기병대들에게 최후의 공격을 명령했다. 만 8천 명의 기사들(그중 3천 명이 중장갑 기사였다)이 은빛 갑옷 뒤에 날개를 달고 창을 들며 공격하는 모습은 엄청난 장관이었고 이들의 이동으로 지축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이것은 단일 기병 돌격으로서는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이제는 방어 태세에 들어간 오스만 군은 엄청난 규모의 기병 돌격에 기가 질려 버렸다. 예니체리와 시파히 기병이 대적했지만 마치 거대한 폭풍과 같이 한 덩어리가 되어 밀어붙이는 폴란드 중갑기병대 앞에 무력하게 쓰러졌다. 약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오스만 군은 그렇게 끝장이 나버렸고 마침내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바덴바덴의 루드비히 빌헬름(Ludwig Wilhelm von Baden Baden)을 필두로 동맹군들이 성벽이 허물어진 비인 시내로 입성하기 시작했다. 남아있던 비인의 수비대와 시민들은 거의 탈진한 상태였지만 구원군을 열렬히 환영했고 슈테판 성당에서 종이 울리자 미친 듯이 환호했다. 이렇게 해서 61일간의 포위가 종료되었다. 수비대장인 슈타헴베르크는 즉시 오스만 군의 혹시 모를 재침에 대비해 성벽 보강을 명령했다. 하지만 그 후로 오스만 군은 다시는 오지 않았다. 비인 수비대의 영웅적인 투쟁과 폴란드군을 비롯한 신성동맹군의 지원을 통해 비인은 물론 합스부르크 제국, 더 나아가 온 유럽이 구원받았다.
패자의 유산, 승자의 권리
비록 최초로 비인에 입성하지는 않았지만 시민들이 가장 열광했던 이는 바로 결정적인 기병 돌격을 주도한 폴란드의 얀 3세 소비에스키였다. 수비대장인 슈타햄베르크 장군이 감격한 나머지 그를 직접 껴안으며 키스할 정도였다. 사실 소비에스키의 폴란드군 및 다른 동맹국들의 참전에는 조금 다른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는데 이들의 참전 과정에서 레오폴드 1세와 비용 지불 문제에 대한 이견을 조율해야 했던 것이다. 결국 문제는 돈이었다. 최종적으로 소비에스키의 폴란드군에게 오스만 군이 남긴 여러 전리품을 더 제공하는 것으로 협의가 되었다.
적이 남기고 간 전리품은 실제로 막대했다. 90문의 대포가 유기되었고 화승총을 비롯한 총기류가 만 정 이상이었다. 바로 이때 노획된 대포들을 녹여서 슈테판 성당의 ‘품머린 종’이 제작되었다. 예니체리나 지휘관들이 사용하던 보석으로 장식된 단검이나 칼 등은 그 수를 셀 수가 없었다. 또한 오스만 군은 90기 정도의 군기를 버렸고 100여 개 이상의 텐트를 버리고 도망갔다. 이중에는 최고지휘관인 카라 무스타파 파샤의 화려한 금실과 자수로 장식된 것도 있었다(현재 비인 군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특히 유용했던 것은 5,000 필의 말이었는데 후에 동맹군의 기사단이나 귀족들이 개인 용도로 사용하였다. 유럽인들 눈에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이국적인 동물이었던 낙타였는데 30마리가 포획되었다. 하지만 가장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은 자루에 담긴 ‘검은색의 곡물’이었다. 바로 오스만 군이 튀르키예어로 카흐베(Kahve)라고 부르던 진귀한 콩이었다. 훗날 유럽인들에게 ‘카페’ 또는 ‘커피’로 알려지게 된 이 곡물은 대단히 값진 것이었고 1,000 자루 이상이 적의 텐트 주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이 커피콩을 통해 비인뿐만 아니라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들이 문을 열게 된다.
이 중의 한 명이 폴란드인 쿨지츠키였는데 시내 레오폴드슈타트에 커피하우스인 ‘블루보틀 하우스(Hof zur Blauen Flasche)’를 오픈한 것이다. 사실 그는 비인 시민의 영웅이었다. 쿨지츠키는 오랜 기간 유럽의 여러 곳에서 거주하며 외교관 및 무역 업무를 했다. 해외 경험을 통해 그는 모국어인 폴란드어는 물론 튀르키예어, 독일어와 루마니아어를 비롯한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쿨지츠키의 이러한 능력으로 그는 포위 막바지에 오스만 군 복장을 하고 적진을 헤치며 나가서 구원군인 로렌 공국의 군대와 연결이 되었고 상황을 확인한 후 다시 비인으로 몰래 들어오는 엄청난 모험을 완수했다. 쿨지츠키가 가져온 구원군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수비대는 끝까지 버틸 것을 결정했고 마침내 적을 물리쳤던 것이다! 그의 영웅적인 공적을 인정한 레오폴드 1세와 시 위원회는 금전적 보상과 함께 건물 하나와 오스만 군의 커피를 전리품으로 주었다. 이렇게 해서 유럽에 본격적인 커피 문화가 시작되었고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사실 비인에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연 것은 아르메니아인이었던 요하네스 디오다토(Johannes Diodato)였다. 커피하우스와 관련된 쿨지츠키의 이야기는 그의 영웅적 행적에 흥미를 더하기 위해 후대에 일부 창작된 것이다. 비록 그가 최초는 아닐지라도 쿨지츠키는 분명 영웅이었고 초기 비인에 커피하우스를 열며 커피의 전파에 기여한 인물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 비인의 4 구인 비덴(Wieden)에 그의 이름을 딴 도로(Kulczycki Gasse)와 석상이 건물 벽에 불어 있다.
비인에서 물러난 오스만 군은 무려 9만 명이 희생되며 오스만 제국 역사상 가장 큰 패배를 당하게 된다. 이를 총 지휘한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비난과 책임을 피할 길이 없었다. 술탄 메흐메트 4세는 자국군의 패배에 크게 분노했고 이를 제국의 수치로 생각했다. 술탄은 즉시 그의 처형을 명령한다.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1683년 12월 25일, 이슬람력으로 라마단 기간 중 눈발이 휘날리는 베오그라드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양쪽에서 두 명이 당기는 비단 끈으로 교살당했는데 이렇게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이는 방식은 오스만 제국에서는 나름 사형수에 대한 명예를 보장하는 처형 방식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오스만 제국 내 고위직들에게 실패에 대한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 지를 보여주는 살벌한 경고였다.
오스만의 위협에서 벗어난 합스부르크 제국은 여세를 몰아 다른 동맹국들과 함께 역공을 가한다. 이후 16년 동안 ‘대 튀르키예 전쟁’이 벌어지는데 된다. 합스부르크 제국을 위시한 폴란드와 베네치아 공화국 그리고 러시아 제국 등이 함께 오스만 군을 밀어붙였다. 1699년 1월에 맺어진 카를로비츠 조약을 통해 합스부르크 제국은 헝가리의 대부분과 트란실바니아를 획득했다. 또한 폴란드는 키이우를 포함하는 우크라이나 서부의 땅을 회복했으며 베네치아 공화국은 오늘날의 크로아티아인 달마티아 해안을 점령한다. 지난 4세기 동안 오스만의 공격에 당하기만 하던 유럽으로 힘의 균형이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일련의 패배를 통해 이슬람의 맹주에서 그 영문 이름 그대로 ‘칠면조(Turkey)’가 되어가고 있었다. 비인의 폐허와 불구덩이를 넘어서 유럽은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
한편 비인을 구원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유럽의 구원자가 되었던 폴란드에게는 좀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를로비츠 조약 이후 세력을 강화하던 폴란드는 주변의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강성해지는 가운데 내부 귀족들의 분열로 내정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와중에 에카테리나 2세 치하 러시아의 개입이 점차 확대되었고 1764년 이후에는 사실상의 꼭두각시 정권으로 전락한다. 결국 1772년 프로이센과 러시아 그리고 폴란드에게 큰 빚을 진 오스트리아에 의해 분할되며 역사의 주역 자리에서 물러난다. 폴란드 입장으로서는 어이없는 배신을 당했지만 그것이 국제정치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는데 이후 1793년과 1795년의 폴란드는 2차, 3차 분할을 거치며 나라 자체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다시 그 이름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야 했다. 한 때는 피를 나눈 두 국가 간의 야릇한 운명이었다.
성벽을 허물고 세계 도시가 되다
오늘날 비인의 성벽은 몇몇 곳을 제외하고는 볼 수 없다. 1857년 당시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의 명에 의해 대부분의 성벽이 철거된 것이다. 철거의 이유는 분명했는데 우선 시대가 변하면서 늘어나는 인구 수용을 위해 도시를 확장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또한 무기 체계의 발달로 인해 성벽은 더 이상 유효한 방어 수단이 될 수 없었다. 더불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로서 비인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목적도 있었다. 오스만 군을 막았던 성벽의 자리를 따라 5.3km의 대형 순환도로인 ‘링슈트라세’가 건설되었고 많은 공원과 공공건물들의 건설이 뒤를 이었다. 또한 그 좌우에는 비인 시청, 국회의사당, 국립 오페라 극장, 비인 대학교, 및 미술사/자연사 박물관 등이 건설되었다(이곳 이야말로 내가 비인을 걸으며 체험할 당시 메인 코스였다). 신축되는 건축물들은 네오고딕과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만들어졌고 건물들 간의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미적인 요소들이 세심하게 고려되었다. 일부 노동자 계층으로부터 부르주아나 귀족 중심의 도시 미화 작업이라고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도시 계획 자체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이렇게 비인은 유럽의 문화와 예술을 리딩하는 일류 도시로서 다시 한번 우뚝 서게 된다.
오늘날 비인 시민들에게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적의 노획품에서 시작된 이 검은색의 음료에는 비인 시민들의 문화와 삶의 방식이 투영되어 있다. 어느 청량한 가을날에 비인의 17 구인 헤날스(Hernals)에 있는 여느 고풍스러운 카페에 가서 ‘멜랑쥬’를 한잔 주문해 보자. 오래된 왈츠풍 유행가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주위에는 조용히 커피잔을 응시하며 편안하게 리듬을 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인 사람들에게 카페는 ‘두 번째 거실(Das zweite Wohnzimmer)’이자 수많은 대가들의 문학 작품이 탄생한 장소이다.
비인의 가장 상징적인 문화가 한때 가장 증오했던 적으로부터 유래됐다는 이 아이러니야 말로 비인이라는 도시와 그 시민들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들은 적으로부터 얻은 이 ‘검은색의 가루’를 통해 모두가 열광하는 새로운 문화로 창조했던 것이다. 더불어 자신을 지켜 주었던 성벽을 허물며 “보다 개방적이고 근대적인 세계 도시”로 한걸음 더 전진했다. 비인은 그렇게 작곡가 요한 슈람멜(Johann Schrammel)의 행진곡 제목처럼 “비인 다움을 유지하며 우뚝 서있다(Wien bleibt Wi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