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 베를린, 냉전에 맞섰던 따뜻한 인간의 도시(1)

미-소 간의 냉전(1945-1990)

by 이준호

“모든 자유인들은, 그들이 어디에 살든 베를린 시민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의 자유인으로서 저는 자랑스럽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


-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 1963년 서베를린 방문 시 시민들에게 한 연설 중 -

쿠르퓌르슈텐담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 전쟁 시 페허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베를린의 쿠르퓌르슈텐담(Kurfürstendamm)은 파리나 런던의 중심지에 비하면 아담한 편이었다. 주변의 유서 깊은 카페하우스에서 커피 한잔을 먹고 시내를 돌아다녔고 가판대에서 베를린식 카레 소시지인 커리부어스트(Currywurst)를 맛보았다. 한참 대로를 걷다 보니 전쟁 때 부서져 버린 ‘빌헬름 황제 기념교회’가 보였는데 지붕이 대파되어 버린 모습을 통해 2차 대전 당시의 치열했던 폭격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베를린 시내에는 유럽 어느 곳보다 다양한 인종의 모습이 보였다. 튀르키예나 아랍 계통으로 보이는 얼굴들이 제일 많았고 의외로 동양 사람들의 모습을 간간히 볼 수 있었다. 지인의 설명을 들어보니 시내의 동양인들은 대부분 베트남 출신이었는데 구동독 시절 같은 사회주의권에서 근로자로 건너온 이들과 그 후손들이라고 했다. 매년 베를린 영화제가 펼쳐지는 도시인지라 추-팔라스트(Zoo-Palast) 주변에는 영화 관련 포스터나 기념품을 파는 곳들이 많았다. 카사블랑카(Casablanca)나 블루 엔젤(Der blaue Engel) 같은 고전 작품들에 관심이 많던 나에게 이곳은 그야말로 신천지였다. 과거 냉전의 한가운데 있던 미군의 ‘찰리 검문소(Checkpoint Charlie)’는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로 북적댔고 인근에는 베를린 장벽의 일부 구간이 남아 있어서 과거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통일 전 기준으로 서베를린 지역을 둘러본 후 동베를린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열차(S-Bahn)를 탔다. 열차가 지상으로 나와 어느 철교 비슷한 길을 가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슈프레 강변의 베를린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열차는 서에서 동으로 이동 중이었다. 우중충한 6월의 독일 날씨 속에 서베를린의 밝고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사라지자마자 동쪽에는 전혀 새로운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 눈앞에는 사각형의 회갈색 콘크리트 건물들이 끝없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불과 20초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우중충한 이미지가 너무나도 강렬하게 나를 강타했다. 그 건물들의 딱딱한 모습과 획일화된 색깔에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그리고 마치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근 30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 회갈색 콘크리트의 우중충하고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 공상과학 영화 속의 암울한 디스토피아 장면이 현실에 펼쳐진 느낌이었다. 시간이 정지한 듯 멍하니 있는 가운데 열차는 구동베를린의 역에 도착했다(그곳이 프리드리히 슈트라세Friedrichstrasse역이었음은 나중에 알았다). 베를린 사람들은 열차가 멈추기 전에 문을 여는 것이 특징이라고 일행 중 한 명이 말하는 동시에 파란색 작업복을 입은 한 소년이 능숙하게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당시만 해도 유럽 지하철들은 대부분 정차 전후 승객이 직접 문을 열고 출입하는 형태가 많았다). 소년의 복장이나 스타일을 볼 때 동독 출신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당시는 통독 후 6년이란 시간이 흘렀을 때였지만 외국인의 시선에도 동서 독일 양쪽의 차이는 확연하게 드러났다. 베를린은 이러한 차이를 좁은 공간에서 비교하며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독일 문학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알렉산더 플라츠(Alexander Platz)는 너무나 단조로웠고 위치가 동베를린에 있다는 선입견 때문인지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베를린 전투 당시에 희생된 소련군 묘지인 트레프토버 공원(Treptower Park)에는 독일인들 보다는 소수의 러시아인 관광객들이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40분 거리의 포츠담으로 넘어가자 유럽의 여느 궁전 못지않게 화려한 ‘상수시 궁전(Schloss Sans souci: 프랑스어로 ‘근심이 없는’이라는 뜻이다. 그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답다)’이 있었는데 이 궁전은 프로이센을 일으킨 ‘프리드리히 대제(Friedrich der Grosse)’의 유산이다. 설명을 하는 가이드는 자신이 동독 출신임을 밝히며 왕조 시절 이곳에는 화장실이 충분치 않아 지체 높은 여성 왕족들도 커다란 치마아래 그대로 볼 일을 봤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구동독 시절에도 화장실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서구 사회에 살고 있던 여러분들은 이런 열악했던 실상을 상상도 못 했을 거라며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상수시 궁전 옆에는 포츠담 회담이 열렸던 체칠리엔 호프 궁전(Schloss Cecilienhof)이 있었다. 바로 여기서 1945년 7월에 트루먼, 처칠, 스탈린 등 연합국 대표가 모여 ‘세계의 운명’을 결정지었는데 이들이 회담했던 원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연합국은 이곳에서 일본에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일본은 거절했고 결국 원자폭탄 두 발을 맞은 후 무조건 항복하게 된다. 이처럼 베를린과 그 주변에는 뜨거웠던 2차 대전과 이후에 벌어졌던 ‘차가운 전쟁’을 대변하는 수많은 장소와 기념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베를린, 20세기의 카르타고

점령된 베를린에 모인 연합군과 소련군 장성들. 좌측부터 몽고메리(영), 아이젠하워(미), 주코프(소), 타시니(프)

1945년 5월 9일 베를린에서 소련 및 연합군에 대한 두 번째 항복 조인식(첫 번째는 그 전날인 5월 8일에 프랑스 랭스에서 거행되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소련이 주도하는 별도의 조인식을 원했고 바로 다음 날 빌헬름 카이텔 Wilhelm Keitel 원수가 참석한 제2의 항복조인식을 베를린에서 실시했다)이 열리며 유럽에서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독일인들이 ‘영시(零時Stunde Null: 2차 대전이 끝난 후 모든 것이 제로로 돌아간 1945년을 뜻함)’라고 불렀던 시기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죽음이 있는 가운데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음에 감사했다. 하지만 살아남은 독일인들에게 삶은 가혹했다. 특히 수도인 베를린은 연합군의 폭격과 대규모 공방전으로 인해 도시의 30~40% 정도가 파괴되었다. 소련군이 도시를 공격할 때 거리마다, 건물마다 전투가 벌어졌고 30만 명 이상의 양측 병사들과 독일 민간인이 죽어갔다. 결국 소련군은 베를린의 점령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고 자신들을 ‘열등인간(Untermensch)’으로 부르며 무시하고 핍박했던 나치와 독일인들에 대해 가혹하게 약탈하고 복수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전리품으로 유난히 시계를 좋아했는데 시민들의 손목시계를 빼앗은 뒤 팔뚝에 주렁주렁 차고 다녔다. 한편 이들의 또 다른 복수의 대상은 당시 베를린 시민 중 다수를 차지했던 가련한 여성들이었다. 베를린 시의 통계에 따르면 베를린에 거주했던 여성 중 10만 명 이상이 전후 소련군의 성폭행에 시달리며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 와중에 수치심과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사람들의 숫자는 알 길이 없다. 도시 전체가 무너진 벽돌더미와 먼지로 가득했고 특히 동부에서 전 재산을 버리고 피난 온 이들은 거처할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모든 가능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일부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소련군의 애인이 되었고 음식과 신체의 보호를 받으며 생존하고자 했다. 동시에 많은 여성들이 폐허를 치우는 노동일에 동원되었는데 이를 통해 약간의 보수나 무엇보다도 소중한 빵 한 조각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베를린 시민들에게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어 보이는 날들이 끝없이 계속되는 듯이 보였다. 소련군은 조직적으로 베를린의 철도나 발전소 설비를 뜯어서 본국으로 가져갔다. 1945년의 베를린은 마치 고대 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고 완전히 초토화되어 버린 한니발(Hannibal)의 카르타고(Cartage)와 같은 처지였다. 승자는 결코 천사가 아니었다.


종전 후 혼란했던 시기가 지나갔고 소련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니콜라이 베르자린(Nikolai Berzarin) 상급대장은 시 경찰을 동원하여 치안과 질서를 회복시키려 노력했다. 280만 명에 달하는 시민 및 피난민들에 대한 음식, 식수 및 전기와 가스 등의 공급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련군 당국은 6월까지 이러한 인프라 복구를 위해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비록 얼마 전까지 적국의 시민들이었지만 이제 새로운 세상에서 이들을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세력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7월 1일이 되자 미군과 영국군 등 서방 연합군의 선발대가 베를린에 도착했다. 베를린은 소련군 점령 지역 한가운데 있었지만 제3제국의 수도로서의 상징성 때문에 4개국이 공동 관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전에 소련 측과의 합의에 따라 이들 국가들은 서베를린 지역을 점령하였다. 미군은 템펠호프, 노이쾰른 등이 있는 시의 서남부에 진주하였고 영국군은 슈판다우(전후 나치 전범들 중 많은 수가 이곳에 위치한 감옥에 갇히게 된다), 샤를로텐베르크 등의 서부를 맡았으며 프랑스군은 서북부 지역을 할당받았다. 7월 17일에는 포츠담에서 회담이 열렸고 주요 4개국의 독일 및 베를린 분할 점령이 확정된다. 서방 연합군이 들어오면서 서베를린은 동쪽의 소련군 점령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시내에는 카페나 공공시설들이 하나, 둘 다시 영업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나치 시대에는 금지되었던 미국의 여기저기서 재즈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미군과 영국군들이 소련군에 비해 신사적이기는 했지만 이들도 어차피 과거의 적군이자 현재의 점령군이었다. 프랑스군은 소련군만큼은 아니었지만 나치의 4년 점령을 통해 독일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찔렀고 독일인들을 차갑게 대했다. 가치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라이히스마르크(Reichsmark)’를 대신해 ‘럭키 스트라이크(Lucky Strike)’로 대표되는 미제 담배가 화폐 기능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서베를린 점령지구에서는 성폭행에 대한 걱정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독일 여성들은 다시 생존을 위해 담배 몇 개비에 자신의 몸을 팔아야 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가운데 암시장(Black Market)이 성행했고 사람들은 집에 있는 귀중품을 닥치는 대로 가지고 나와 팔기 시작했다. 그렇게 패전국의 비참한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베를린 공수작전

베를린 공수작전 당시 물자를 싣고 서베를린으로 진입하는 미군 C-54 수송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과거의 혈맹이었던 서방 연합국과 소련 간의 갈등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실 전혀 다른 두 체제의 갈등은 처음부터 예견되었고 종전 후 소련이 동유럽 각국 및 독일에 진주하면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소련은 이들 국가들에 자신의 영향력을 노골적으로 강화하며 공산주의 위성국가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티토(Josif Broz Tito)가 버티고 있던 유고슬라비아를 제외한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이 이러한 운명을 겪고 있었다. 1946년 3월 영국의 처칠(Winston Churchill)은 미주리주 풀턴에서 그 유명한 ‘철의 장막(Iron curtain) 연설을 통해서 소련의 팽창 야욕에 대해 경고했다. 마침 이 자리에는 미주리가 고향이었던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도 함께 있었다. 그는 포츠담 회담 이후 스탈린의 팽창정책을 확실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결국 트루먼은 1년 후인 1947년 3월에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하며 공산주의 위협이 증가하고 있는 그리스와 튀르키예에 대한 군사 및 경제 원조를 공언한다. 이후 6월에는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통해 전후 유럽의 부흥을 지원하여 서유럽 동맹국들의 경제를 향상하고 이들 국가에 침투하려는 소련의 야망을 좌절시키고자 했다. 미국의 의도를 눈치챈 소련은 동유럽 위성국가들의 마셜 플랜 참여 금지를 지시한다. 드디어 양 측은 서로를 분명한 적으로 인식했고 과거처럼 화기로써 싸우는 전쟁이 아닌 ‘냉전(冷戰Cold War)’이라는 ‘다소 기묘한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비록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 간의 직접적인 충돌은 피하고 있었지만 언제라도 뜨거운 열전(熱戰)으로 불똥이 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전후 서방과 소련에 의해 나뉜 독일이야 말로 이러한 냉전의 직접적인 전선이었고 그중에서도 소련군 점령지구 한가운데 있는 서베를린은 적에게 포위된 요새이자 섬이었다. 1946년 6월에 소련은 동독에서 토지개혁 및 국유화를 단행했고 7월에는 연합군 중 미국과 영국이 자국의 점령지를 통합했다. 양측은 점차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1948년 상반기부터 연합군 측은 서방 연합군 점령 지역(서부 독일)에서 자유선거에 기반한 정부 수립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미 1948년 3월부터 소련은 연합군 공동통치위원회에서 탈퇴하였고 동부 독일 지역은 소련 측의 거부로 투표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독일은 분단의 길로 가기 시작한다. 4월부터 동부 지역을 제외한 11개 주에서 정부 수립을 위한 사전 단계로서 주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또한 서부 독일에서는 경제 측면에서도 개혁이 이루어지는데 6월 18일에는 가치가 없는 라이히스마르크를 대신하여 새로운 화폐인 도이치마르크(Deutschmark)를 전격적으로 도입한다. 도이치마르크는 ‘육지의 섬’과 같았던 서베를린에도 공급되었다. 자신들의 점령지 한가운데 ‘제국주의자들의 더러운 돈’이 유통되는 상황에 소련 측은 강하게 반발했다. 분노한 소련은 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와 철로를 봉쇄했고 소련군의 철저한 수색 및 감시 하에서만 출입을 허가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강하게 밀어붙이면 연합군이 결국 베를린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나름의 합리적 계산이 있었다. 일이 잘만 되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서베를린이라는 전리품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압박의 수위를 높이는데 21일부터는 일반 물자는 물론 연합군 점령군의 보급품마저 반입될 수 없었다. 사태는 점입가경이었는데 6월 24일 자정을 기해 소련은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전기를 차단했다. 오전 6시부터는 육로, 수로를 비롯한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교통 및 운송 수단이 봉쇄되었다. 다음 날인 6월 25일에는 식수원인 상수도마저 끊어버렸다. 이제 서베를린 시민 220만 명의 생존이 직접 위협을 받게 되었다. 베를린 및 주변에는 50만 명의 소련 점령군이 있었고 이에 대항하는 연합군 병사들은 불과 2만 2천 명의 소수였다. 서방 측은 2차 대전 종전 후 대규모 감군으로 병력 수 자체가 소련에 상대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육상에서의 공격이나 전쟁은 처음부터 선택지가 아니었다(물론 당시 소련도 2차 대전의 피해로부터 재건 중이었고 핵무기도 없는 가운데 전쟁을 다시 시작할 상황은 아니었다). 연합군 수뇌부는 크게 당황했다. 지난 전쟁에서 지칠 대로 지쳐버린 영국과 프랑스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미국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벌어진 절망적인 상황에서 미국도 신통한 해결책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워싱턴의 고위관료들과 장군들 중에서도 서베를린에서 철수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는 부정적인 주장이 흘러나왔다. 이때 한 사람이 강하게 서베를린의 사수를 주장한다. 바로 독일의 미군정 사령관인 루시어스 클레이(Lucius Clay) 장군이었다. 그는 전투 병력과 무기의 추가 투입을 통해서라도 서베를린을 수호하고자 했다. 하지만 전투는 답이 아니었고 대안으로 클레이 장군은 서베를린에 육로가 아닌 항공기를 동원한 물자 수송을 제시하였다. 미군 유럽사령부(EUCOM)와 영국 공군이 머리를 맞대고 계산한 결과 하루 최저 3,600톤의 물자 수송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는데 모두들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숫자는 당시의 수송기나 공항 등의 제반 상황을 감안할 때 불가능한 물량이었다. 하지만 소련이라는 적을 앞에 두고 서베를린 시민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결국 트루먼 대통령은 대규모 항공수송을 통해 서베를린을 구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이제 작전의 성패는 직접 수송을 담당할 연합군 공군의 손에 달렸다.


작전의 수행이 결정되자 클레이 장군은 연합군 공군 및 병참 지휘관들과 에른스트 로이터(Ernst Reuter) 서베를린 시장과 만났고 공수를 통한 지원 가능 범위와 수요 등에 대해 협의했다. 공수 작전의 실무 총책임자는 유럽주둔 미 공군 사령관인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 장군이었다. 그는 과거 독일과 일본을 전략 폭격을 통해 불바다로 만들었던 강인하고 불독 같은 사나이였다. 이번 임무는 과거의 폭탄 투하에 비해서는 다른 성격의 것이었지만 규모나 성공 가능성으로 봐서 훨씬 더 어려워 보였다. 르메이 장군은 작전의 규모로 볼 때 조종사와 수송기의 확보가 가장 중요함을 간파했다. 즉시 전 세계의 미군 수송기와 조종사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봉쇄 2일 차인 6월 26일에 드디어 첫 번째 수송기들이 서베를린에 도착했다. 문제는 32대의 C-47로 구성된 첫날의 항공기들이 고작 82톤의 물자만 운반했을 뿐이었다. 3,600톤이라는 목표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유럽에 있던 미국과 영국의 수송기들을 모두 합쳐봐야 200대 남짓했는데 7월 초에 겨우 500~750톤의 일일 수송량을 달성하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서베를린에 한 달 분의 식량 및 연료의 재고가 있어 버티고는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재고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도 르메이 장군의 지칠 줄 모르는 추진력에 힘입어 7월 말에는 수송기의 대수가 800대까지 증가했다. 무엇보다도 도움이 되었던 것은 ‘C-54 스카이마스터’ 수송기였는데 10톤의 월등한 화물 적재를 통해 전체 수송량을 끌어올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시점에 르메이가 전략공군사령부로 영전을 하게 된다. 후임에는 과거 인도에서 히말라야를 거쳐 중국까지 이어지는 험난한 항공 수송작전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윌리엄 터너(William Tunner) 중장이 임명되었다. 사실 그는 대규모 수송작전에 최적임자였다. 터너는 당장 미군과 영국군의 기종을 동일화했고 철도 시간표처럼 3분 단위의 이착륙 시스템을 확립했다. 물자를 하역한 수송기는 바로 이륙하여 공중에서 대기하는 다른 비행기의 착륙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7월 말에는 일 2천 톤의 물자가 서베를린에 도착하였고 아직 목표 대비 절반 수준이었지만 서서히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8월 중순이 넘어가자 적어도 석탄이나 의약품 등은 목표치를 공급할 수 있었다. 한편 시스템의 개선과 더불어 공항의 확장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기존에 사용되던 템펠호프와 가토프 공항 등은 이미 포화상태였고 결국 제3의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때 낙점이 된 곳이 베를린 서북쪽 프랑스 점령지구의 테겔이었는데 8월 초부터 미군 공병대의 주도로 공항 건설이 시작되었다. 활주로의 길이는 2,400m에 달했는데 이것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긴 것이었다. 테겔 공항은 불과 3개월 만인 11월 초에 완공하여 가동을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수송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수송량이 증가했지만 양 측간에 갈등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테겔 공항 인근에는 소련군의 송신탑이 있었고 연합군 수송기의 진로에 방해가 되었다. 연합군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소련 측은 이 시설을 의도적으로 방치했는데 결국 화가 난 프랑스군이 다이너마이트로 송신탑을 날려 버렸다. 연말이 되고 겨울이 왔지만 서베를린은 아직도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해가 넘어가서 1949년이 되었는데 연합군의 첫 3개월 동안 물량 수송량은 일일 평균 ‘5,800톤’에 달했고 그해 부활절에는 무려 ‘13,000톤’이라는 경이적인 물량이 공급되었다. 이러한 연합군의 압도적인 대응에 소련 측은 놀라움을 넘어 경악했지만 이제는 그들이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인도적인 물자를 수송하는 항공기를 격추했을 때 국제적인 여론이 어떻게 돌아오리라는 것은 어린아이조차도 판단할 수 있었다.

베를린 아이들에게 사탕과 초콜릿 폭탄을 던져준 게일 할보르센(Gail Halvorsen) 대위(전역 후 모습)

수많은 수송기들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미.영군 조종사들이 지상의 폐허에서 자신들을 쳐다보며 손을 흔드는 독일 어린이들에게 동정심을 품었다. 그중 일인이 미 공군 소속의 게일 할보르센(Gail Halvorsen) 대위였다. 그는 템펠호프 공항에 착륙한 후 휴식을 취하던 중 공항 밖 철조망에 몰려 있던 수십 명의 독일 아이들을 보게 된다. 이들에게 가지고 있던 껌을 주자 무려 수십 조각으로 나누어서 먹는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는 다음날에도 아이들에게 껌을 전달해 주었고 이후 비행기에서 투하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아이들이 그의 비행기를 알아볼 수 있도록 껌 투하 전에 비행기의 날개를 흔드는 것으로 사전에 얘기를 해 놓았다. 그때부터 그는 부조종사와 함께 껌과 사탕 및 초콜릿을 사비로 잔뜩 사 모았고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손수건 낙하산을 이용해 투하한다. 어린 나이에 세상의 험한 꼴을 다 겪으며 부드러운 것에 굶주렸던 활주로의 아이들은 그의 사탕과 초콜릿을 맛보며 잠시나마 천국을 경험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보르센은 터너 장군의 호출을 받게 되는데 그의 개인적인 일탈 행위에 대한 문책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장군의 지시는 사탕 투하 작전을 확대하라는 것이었다. 장군의 통찰은 아이들에 대한 이러한 접근이 연합군의 이미지를 ‘과거의 적’에서 보다 ‘친근한 미군 아저씨’로 만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투하 작전은 미군에 의해 적극적으로 홍보되었고 곧 미국 본토에서도 호응을 하여 대규모의 사탕과 초콜릿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사탕 투하 작전을 ‘리틀 비틀스(Little Vittles)’라 부르며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그렇게 과거의 적이었던 서방 점령군과 독일인 사이의 감정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대규모 항공수송작전의 성공을 지켜보며 속이 쓰리던 소련은 더 이상의 봉쇄가 실익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1949년 5월이 되며 양 측은 서베를린의 봉쇄 철회에 합의하게 되었다. 봉쇄는 5월 12일에 공식적으로 해제되었고 마침내 서베를린은 구원되었다! 1년에 걸쳐 진행된 공수작전을 통해 연합군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총 25만 회 이상의 비행을 통해 233만 톤의 화물을 공급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군과 영국군 조종사 및 정비요원들 150명이 사망하게 된다. 베를린 공수작전이야 말로 기나긴 냉전의 과정에서 사실상 서방 측에 ‘최초의 승리’를 안겨준 사건이었다. 또한 이후 서독 및 유럽 각국이 ‘같은 편’으로서 소련에 대항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2편에서 계속)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