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비인 2차 포위 (1683년)
- 얀 3세 소비에스키(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 국왕), 비인 포위에서 승리한 후 카이사르의 오래된 관용구를 인용하며 -
열두 시간의 지루한 여정을 거쳐 비행기가 비인 슈베카트(Schwechat)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창문 쪽 좁은 좌석에 장시간 갇혀 있던 나는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첫 번째 비행기 탑승이 설레던 나머지 무작정 밖을 볼 수 있는 창가 쪽으로 좌석을 구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렇게 나의 첫 해외 여정이 시작되었다. 너무나 갑갑했던 비행기를 뒤로하고 비인 시내로 들어갔는데 갓 제대한 20대 초반의 짧은 머리를 한 동양 남자에게는 ‘이 도시’의 모든 것이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TV에서나 보던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늘어선 가운데 도시 전체가 인류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정신세계의 정수였다. 시내를 걸어가다 보면 건물, 건물마다 사연이 없는 곳이 없었다. 어떤 곳에는 작곡가 말러와 주페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다른 곳에는 화가 클림트나 작가 슈니츨러 또는 심리학자인 프로이트의 이야기가 묻어 있었다. 흑백 영화 ‘제3의 사나이’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비인 중앙 묘지(Zentralfriedhof)에 가면 위대한 음악가들의 무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 슈베르트, 그리고 힌데미트와 같은 음악 교과서에서나 듣던 위대한 음악가들은 물론 비인 시민들이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夫子)의 무덤이 마치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듯이 한 군데 모아져 있었다. 비인 시내는 링슈트라세(Ringstrasse)라는 환상형 도로가 지나고 있는데 그 주변의 거대한 석조 건물들이나 궁전들은 이 도시가 한때 중동부 유럽 일대를 평정했던 ‘대제국의 수도’였음을 암묵적으로 말하고 있는 듯했다. 비인 시청(Rathaus) 앞 광장에는 때때로 수준 높은 오케스트라의 야외 콘서트나 다양한 예술 행사가 열렸고 시민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하고 감상했다. 낮에는 그 유명한 도나우 강에서 사람들이 산책을 했고 저녁이 되면 시내 광장 곳곳에서 왈츠 또는 탱고 등을 추는 사람들이 보였다. 물론 옆에는 많은 사람들이 카페에서 와인이나 바이첸(Weizen: 밀로 발효하여 만든 맥주)을 마시며 춤 구경을 하거나 자신들 만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특히 바이첸은 그때까지 한국에서는 먹어본 적이 없었기에 그 맛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얼마 전까지 최전방의 긴장감 높고 딱딱한 분위기에 젖어 있던 나에게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비인의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소중하게 다가왔다. 시내의 카페에서 ‘비엔나커피’인 멜랑쥬(Mélange)를 마셨고 비인 명물인 슈니첼(Schnitzel: 오스트리아식의 돼지고기 커틀릿. 한국으로 치면 돈카츠다)을 먹었다. 재래시장인 나슈마크트(Naschmarkt)에서는 정육점에서 장도 보았는데 이곳 사람들이 잘 먹지 않는 소꼬리 같은 부위를 대단히 싸게 살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한동안 의도치 않게 꼬리곰탕이 주식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경직된 군인에서 서서히 인간생활에 적응해 가며 사람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두어 달 동안의 체류 기간 동안 되도록 많은 시간을 비인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려 노력했다. 나에게는 걷는 것이야 말로 이 도시를 알아가는 최고의 방법이었는데 유럽식 포석 도로를 계속해서 걷다 보니 결국 군대에서도 잡히지 않던 물집까지 생길 정도였다. 주말에 열리는 벼룩시장에 가면 동유럽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소련이나 심지어 나치 시대의 다양한 훈장이나 군용 물품 등을 팔았다. 이 도시는 보면 볼수록 새로운 매력들이 솟아 나왔다. 마치 끝없이 펼쳐져 나오는 경이로움의 화수분 같았다.
한편 비인을 ‘탐험’하던 중 마치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바로 링슈트라세 안쪽의 시내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슈테판 성당(Stephansdom)이었다. 당시 건설된 지 무려 850년 이상 되었던 이 고딕 양식의 성당은 그 높이가 무려 107m로 비인의 다른 어느 곳보다 높게 솟아 있었고 많은 경우에 있어 시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이곳은 비인, 나아가서 오스트리아인들의 신실한 믿음을 대변하는 장소인데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성가 연주를 하였고 슈베르트는 성가대인 소년합창단원으로 활약했다. 성당에는 유럽의 다른 성당들이 그러하듯이 여러 개의 종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북쪽 탑에 있는 것이다. 이 청동으로 주조된 종은 독일어로 ‘성모 마리아의 종(Marienglocke)’ 또는 간단히 ‘품머린(Pummerin)이라 불린다. 1705년에 제조된 원래의 종이 2차 대전 막바지에 부서지면서 1952년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종의 크기는 직경 3.14미터로 유럽에서는 세 번째로 큰 것이고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이브 등의 특별한 날에만 타종을 한다. 이 품머린에는 성모 마리아의 여러 신성한 모습이 새겨져 있다. 더불어 이 종 자체의 탄생과 관련된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조각도 새겨져 있다. 그 사건은 비인, 나아가서 오스트리아와 온 유럽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빠져 있던 1683년의 늦여름에 일어났다. 그리고 이후 세상의 역사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팽창하는 제국
16~17세기는 오스만 튀르키예 제국의 전성기였다. 아시아,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까지 넘나드는 3개의 대륙을 지배했던 이 거대 제국은 1299년에 아나톨리아(오늘날의 튀르키예가 있는 소아시아 반도를 일컬음)의 작은 가문 출신인 전사 ‘오스만 가지(Osman Gazi, 훗날 오스만 1세가 된다)’에 의해 시작되었다. 서서히 세력을 키우며 서진을 하던 오스만 제국은 이후 100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아나톨리아 및 주변 비잔틴 제국 영토의 상당수를 복속시킨다. 이후 유럽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오늘날의 불가리아, 그리스를 점령했고 진정한 제국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이들의 주력은 예니체리(Yeniçeri: 튀르키예어로 ‘새로운 부대’라는 뜻이며 주로 발칸 반도 출신의 우수한 기독교 출신 소년을 선발하여 구성한 부대. 점령지의 기독교 소년들에게는 이곳에 선발되는 것이 거의 유일한 출세 길이었다)로서 튀르키예군의 최선봉에서 싸운 정예 부대였다. 1453년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며 오스만 제국은 그 이름을 온 세계에 떨치게 되었다. 이후에도 정복 사업은 계속되었는데 1459년에는 세르비아, 1462년에는 왈라키아(현재의 루마니아), 1468년에는 알바니아를 점령했다. 1526년에는 헝가리의 모하치(Mohácsi) 전투에서 헝가리왕 러요시 2세(II. Lajos)를 전사시키며 크게 승리했고 헝가리는 이후 15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인다. 승기를 잡은 오스만 군은 여세를 몰아 헝가리의 부다를 비롯한 중동부 지역도 점령해 버린다. 이제 오스만 제국의 목표는 지척에 있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보석’ 비인이었다. 시간이 흘러 1529년 월 9월에 오스만의 슐레이만 대제는 친히 12만 5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비인으로 향했고 곧 도시를 포위하게 된다. 오스만 군은 수많은 기병과 보병의 정예병력에 더불어 청동으로 된 대형 대포는 물론 성벽 아래에 터널을 뚫고 폭약을 설치하고 공격하며 18일 간 다양한 전술을 구사했다. 한편 70세의 명장 니클라스 그라프 살름(Niklas Graf Salm) 장군 지휘 하에 비인의 군민들은 이슬람에 대항하는 기독교의 보루로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사명감을 분명히 인식했다. 이들은 오스만 군에 항복한 다른 도시들의 운명을 잘 알고 있었는데 싸움에 지면 학살당하고 약탈당한 후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 정해진 순서였다. 비인 군민들은 사생결단의 각오로 단결하며 싸웠고 결국 오스만 군을 막아냈다. 오스만 군이 포위를 풀며 일시적으로 물러나긴 했지만 당시는 위대한 슐레이만 대제(Süleymân-ı Evvel)가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였다. 이들은 이슬람의 맹주였고 자신의 위대한 알라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아직도 할 일이 많았다. 비인은 도나우 강을 통해 북쪽의 독일과 남쪽의 지중해로 연결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또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로서 막대한 부를 가진 도시였고 이후 서유럽을 압박하는데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오스만의 술탄들에게 비인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대단히 매력적인 먹잇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과거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자신들의 ‘적신월 깃발’을 비인 성벽에 꽂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유럽은 신구교의 갈등이 깊어졌고 ‘30년 전쟁’이라는 당시로서는 세계대전급의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다. 일련의 전쟁 과정을 통해 프랑스가 유럽의 강자로서 부상했고 합스부르크 제국은 그 패권이 흔들리고 있었다. 비록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기독교 내에서 가톨릭(구교)과 프로테스탄트(신교) 간의 갈등은 계속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가톨릭의 맹주였다. 한편 오스트리아 인근의 헝가리는 중부와 동부가 오스만의 지배 아래 있었고 서부와 북부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며 분리된 상태였다. 한편 합스부르크는 자신들이 지배하는 헝가리 내에서 가톨릭을 강요하며 신교도들을 압박했다.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던 헝가리 내 프로테스탄트 및 반합스부르크 세력이 귀족인 임레 퇴쾰리(Imre Thököly)를 주축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결국 이들은 합스부르크의 강압적인 지배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반합스부르크 반란 이야말로 오스만 제국에게는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반란에 즉시 호응하여 오스만 제국은 1682년 퇴쾰리를 헝가리의 왕으로 인정했고 그는 <상부 헝가리 왕국>을 수립한다. 이런 와중에 퇴쾰리의 반란세력과 합스부르크 군대가 헝가리 중부에서 충돌하게 되었다. 퇴쾰리는 오스만에게 충성을 약속했고 합스부르크에 대항한 본격적인 개입을 요청한다. 콘스탄티니예(현재 이스탄불)에 있던 술탄 메흐메트 4세는 이러한 상황 전개를 대단히 반겼다. 그는 과거의 ‘가장 위대한 술탄(슐레이만 대제를 지칭한다)’ 조차도 성공하지 못했던 일을 해내기 위해 대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Kara Mustafa Pasha)’를 통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제 합스부르크와 오스만의 전면전은 시간문제였다. 마침내 1682년 8월에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전쟁 계획을 메흐메트 4세에게 보고했고 최종 승인을 받는다. 그리고 1683년 1월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한 전쟁이 선포되었다.
사실 이전부터 비인 공격을 열망했던 대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에게 헝가리에서의 반합스부르크 반란과 이후의 충돌은 그가 원하는 이상적인 명분을 제공했다. 그는 대외적인 팽창을 통해 제국의 고위직 관료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오스만 제국의 위상을 끌어올리고자 했다. 기독교 세계의 맹주인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비인은 그의 목표에 더없이 적합한 목표였다. 즉시 군대를 모으고 대포와 탄알 및 장기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엄청난 규모의 병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과거 1차 원정 때처럼 일련의 승리에 도취된 무모한 공격이 아닌 장기 간의 포위까지 염두에 둔 준비였다. 오스만 군대는 1683년 3월에 에디르네(현재 튀르키예 북서쪽 끝에 위치한 도시)에서 진군을 개시했다. 이들은 5월에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 도착했고 계속 이동을 하는 가운데 속국이던 트란실바니아(루마니아 서부 지역)와 퇴쾰리의 헝가리 지원군이 합류했다. 7월 초에는 4만 명의 용맹한 ‘크리미아 타타르’ 부대까지 비인 동쪽 40km에 도착했다. 이렇게 해서 모인 오스만 측의 총 병력 수는 무려 15만 명에 달했다.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지휘하는 오스만 제국의 대군은 마침내 1683년 7월 14일,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비인에 도착했다. 멀리서 비인의 성벽과 슈테판 성당의 높이 솟은 첨탑이 보였다. 성벽 밖에는 엄청난 수의 오스만 군 천막과 형형색색의 깃발로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야 말로 150년 전의 패배를 설욕하고 거대한 슈테판 성당을 코란이 울려 퍼지는 ‘신성한 모스크’로 바꾸어 버릴 때였다. 그리고 그 목표는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유럽의 운명을 건 전투
오스만 군의 주력 부대는 7월 14일에 비인에 도착하여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이교도 적들이 공격해 온다는 말에 비인 시민들은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된다. 오스만 군의 잔인한 학살과 약탈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황제인 레오폴드 1세(Leopold I)는 반드시 구원군을 보내겠다고 약속하며 6만 명의 시민들을 이끌고 남부 바이에른의 파사우로 후퇴했다. 사실 오스만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황제는 3월에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상호 동맹을 맺었다. 더불어 독일에 있는 많은 공국들과 신성동맹을 맺고 군을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레오폴드 1세는 비인을 지키기 위한 지휘관으로 45세의 노련한 슈타헴베르크 백작(Ernst Rüdiger von Starhemberg)을 임명한다. 슈타햄베르크는 직업 군인으로서 폴란드, 프랑스 및 스페인 등 유럽 여러 곳에서 전투에 참가했던 베테랑 군인이었고 전술적인 안목을 인정받았다. 그의 휘하에는 만 천명의 군인들과 약 5천 명의 시민 지원자들이 있었다. 숫자로만 비교해 본다면 오스만 군이 거의 9배에 달했다. 수비대에게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약 300문의 대포가 있었는데 이것은 개전 초에 오스만 군보다 두 배 정도 많은 숫자였다. 하지만 전투가 지속됨에 따라 가동 가능한 대포 숫자는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저히 승산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7월 15일에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비인 수비대에 항복하라는 제안을 보낸다. 수비대장인 슈타햄베르크는 절대로 항복할 생각이 없었는데 비인 남쪽의 페르히톨드스도르프(Perchtoldsdorf)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오스만 군이 이곳을 포위하고 있던 중 항복을 권유했고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보았던 시장이 직접 시의 열쇠를 오스만 군에게 바치며 항복했다. 하지만 항복의 대가로 돌아온 것은 시민들에 대한 살육과 약탈이었다. 남자들은 죽였으며 여자들과 아이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노예로 팔기 위해 끌려갔다(당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일대에서 5만 7천 명의 합스부르크 제국민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60m의 감시탑이 버티고 있던 이 마을은 오스만 군에게 철저히 짓밟혔고 이러한 사실이 전파되며 비인 수비대의 투지는 더욱 강해졌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수비대는 장렬히 싸우다 전사할 일만 남은 듯이 보였다.
본격적인 오스만 군의 공격은 7월 17일부터 시작되었다. 비인 수비대는 성벽(이 당시의 성벽 자리가 바로 구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현재의 링슈트라세이다) 외곽의 여러 집들을 철거시키며 개활지로 만들었다. 공격해 오는 오스만 군의 위치를 파악하고 은폐물을 없애기 위한 의도였다. 오스만 군은 공격하기 전에 가공할 심리전부터 시작했다. 바로 메흐테르(Mehter)라는 ‘세계 최초의 군악대’를 동원했던 것이다. 이들은 커다란 북과 심벌즈 및 관악기로 구성된 대규모 군악대를 운용하여 적의 사기를 꺾고 아군의 공격 의지를 강하게 했다. 이후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대규모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이후 예니체리를 중심으로 한 오스만 보병들이 돌격하며 파상 공세를 퍼 붓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메흐테르 군악대는 리듬과 소리를 더욱 강하게 연주하며 병사들의 진군 속도를 조정하고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러한 광경을 보았다면 웬만한 수비병력들은 이미 심리적으로 전의를 잃고 움츠리게 된다. 이전 아나톨리아나 발칸 반도의 많은 도시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오스만 군에게 함락되었다.
하지만 비인의 수비대들은 다른 병사들과는 달랐다. 수비대장 슈타햄베르크는 오스만 군이 당연히 대포로 공격할 것을 예상했고 성벽 전반에 보강 작업을 지시한다. 성벽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수많은 꼭짓점을 가진 별 모양 같았는데 꼭짓점 끝에 해당하는 곳에 소형 요새와 같은 성벽 돌출부(Bastei)가 있었다. 성벽 자체는 높이 8m에 두께가 최대 3m 수준이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유럽의 웬만한 성벽 이상의 수준이었다. 여기에 흙으로 보강 공사를 더했고 성벽 위에는 바로 포대를 배치하여 공격하는 오스만 군을 직격 했다. 더불어 성벽 밖의 집들을 없애서 무인 지대에 예전부터 있던 나무 울타리도 다시 보강하였다. 또한 개활지 곳곳에 구덩이를 파서 진격하는 적의 속도를 늦추게 했다. 수비병들은 주로 사거리 100m 정도인 화승총을 사용하여 적을 제압했는데 연사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은 탓에 석궁이나 장궁 등의 예비 무기를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또한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에게는 초기의 수류탄 형태인 화약병을 던지며 필사적으로 성벽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려 했다. 이러한 수비대의 다양한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비인은 포위 한 달 반이 지난 8월 말까지도 무너지지 않으며 굳건히 버티고 되었다. 오스만 군은 쉽게 무너뜨리라 자신했던 비인 수비대가 격렬히 저항하자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수비대의 성벽이 서서히 손상을 입고는 있었지만 아직 건재했다. 무엇인가 다른 해결책이 나와야 했다. 결국 오스만 군은 과거 비인 1차 포위 때 사용했던 방법을 다시 사용한다. 즉, 성벽 밑의 지하에 터널을 뚫고 화약으로 폭파시키는 방법이었다. 수비대도 성벽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성에서 외부 방향으로 터널을 뚫으며 필사적으로 오스만 군 공병과 화약을 찾으려 했다. 결국 오스만 군의 화약은 이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던 수비대에 발견이 되었고 폭파 시도는 좌절되고 만다.
격렬한 포위 전에 양 측이 지쳐갔다. 오스만 군은 전투 중 예니체리를 포함한 수많은 정예 부대들이 무너졌다. 자존심 강했던 크리미아 타타르군은 고압적인 카라 무스타파 파샤의 지시와 태도에 극도의 불만을 드러내며 나중에는 명령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 트란실바니아와 같은 속국 출신의 병사들 중에는 같은 기독교 군대를 공격하는 상황에 심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이 이를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고 있을 뿐이었다. 오스만 군은 8월 말까지 2만 명 이상의 전사자가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깨끗지 못한 물과 열악한 야전의 위생 및 환경으로 인해 이질과 티푸스가 돌기 시작했다. 더불어 포위가 두 달 가까이 되어가자 보급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오스만 군은 주변의 마을 등에서 약탈하며 버텼지만 8월 말에는 더 이상 빼앗을 것도 없었고 이들의 주요 보급로를 합스부르크 제국 편인 신성동맹의 척후대들이 공격하며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결국 배고픔에는 장사가 없었는데 오스만 군은 군기가 무너질 대로 무너지며 대규모 탈영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오스만 군 중 4분의 1이 탈영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오스만 군의 열악한 상황도 성 안에서 한정된 자원과 식량으로 버티고 있던 비인의 수비대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포위가 시작될 때 슈타햄베르크는 곡물이나 말린 고기와 식수 등을 성안에 최대한 저장하도록 명령했지만 시간 앞에서는 모든 것이 소용없었다. 병사들은 굶주려갔고 말, 개, 고양이는 물론 나중에는 쥐까지 잡아먹거나 가죽 제품을 끓여서 수프로 먹는 형편이었다. 식수 문제는 더욱 심각하였는데 성 안 우물의 수질이 악화되며 오스만 군과 마찬가지로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슈타햄베르크는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매일 병사들을 돌며 임무를 치하하는 격려 연설을 실시했다. 물론 이것이 기진맥진한 수비대의 사기진작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이들의 극단적인 배고픔까지 해결할 수는 없었다. 상황이 절망적으로 치닫는 가운데 9월 8일에는 오스만 군이 성벽 중간에 있던 돌출부 사이를 파고들며 무너뜨렸고 낮은 성벽의 일부를 점령했다. 마침내 비인 성벽의 일부가 뚫린 것이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남아있는 수비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최후의 시가전을 준비하며 신의 가호를 바라는 것 외에는 없어 보였다. 바로 그때 ‘신의 가호’가 마치 천둥을 치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