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폴리 공방전(1915~1916)
- 당시 오스만 군 지휘관이던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 적과의 결전을 앞두고 부하들에게 한 연설 중 -
4월의 따뜻한 햇볕 아래 이스탄불을 벗어나 서쪽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도 화창했다. 당시 튀르키예에 온 이후로 가장 장거리 여행을 하는 나로서는 처음 보는 곳을 가는 긴장감과 함께 묘한 흥분이 교차했다. 목적지는 튀르키예 서남부 끝 쪽에 있는 차나칼레. 우리가 그리스 신화 속의 ‘이카로스의 날개’ 이야기를 통해 다르다넬스 해협(Straight of Dardanelles)이라고 알고 있던 바로 그곳이었다. 실리브리, 초을루와 테키르다흐 같은 이국적인 이름의 지명들이 도로 표지판에 보였다. 주변의 아름다운 산들과 녹색 올리브 나무의 풍경이 새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차 안에서는 당시 막 구입한 영국 가수 베라 린(Vera Lynn: 영국 가수 겸 배우로 2차 대전 중 수많은 위문 공연을 통해 ‘병사들의 연인’이라 불렸다)의 재발매 베스트 앨범에서 노래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비록 영어로 된 가사였지만 차분하고 잔잔한 베라 린의 노래들이 튀르키예 서남부의 풍경과 기가 막히게 잘 맞아떨어졌다. 천천히 풍경을 만끽하며 다섯 시간 이상을 운전해서 마침내 다르다넬스 해협의 초입인 겔리볼루(Gelibolu, 영어로 갈리폴리)에 들어섰다. 대도시인 이스탄불과는 확연히 다른 시골의 느낌이 있었는데 중부나 동부에서 봤던 튀르키예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따라 한 시간 이상을 더 내려가서 마침내 목적지인 에세아바트의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은 해협 바로 앞에 있었는데 멀리서 보는 차나칼레와 다르다넬스 주변의 풍경은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와는 달리 마치 태고 속 원시림 같은 느낌이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 인근의 해산물 식당에 갔고 이스탄불 보다 싼 가격에 농어 요리와 문어 구이를 시켜 배부르게 먹었다. 동양 사람을 보는 것이 신기한지 몇몇 아이들이 근처에 와서 웃으면서 쳐다본다.
식사를 마치니 해 질 무렵이 되었는데 이왕 나온 김에 좀 더 드라이브를 하기 위해 서쪽으로 차를 몰았다. 목적지는 안작 코브(Anzac cove)라 불리는 곳이었는데 정확히 100년 전인 1915년 이곳에서 튀르키예군과 싸우기 위해 안작군단(ANZAC 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 호주와 뉴질랜드군의 영어 약자)이 상륙한 곳이었다. 이곳으로 가려면 겔리볼루 반도를 가로지르는 산길을 지나야 했다. 네비를 따라 이동하다 보니 한 농부가 트랙터를 몰고 가고 있었다. 지극히 초보적인 튀르키예어로 안작 코브로 가는 길이 맞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였지만 추가로 몇 마디를 더 했는데 알아들을 길이 없었다(나중에 서야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일단 길이 맞다고 했으니 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산길을 따라 10여분을 가다 보니 아예 인적이 끊겼고 내 차의 헤드라이트 외에는 그 어떤 불 빛도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가면 갈수록 점점 무서워졌다. 네비에 따르면 수십 분을 더 가야 하는데 길은 점점 비포장이 되어갔고 정말 이 길이 맞을까 하는 의심이 마음속에서 강하게 몰려왔다. 문자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오직 헤드라이트 불빛 하나만 보이고 덜컹거리는 자동차 소리만 들렸다. 순간 군대에 있을 때 전방 철책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이곳이 과거에 어떤 곳이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무서웠다. 여기서 강도라도 만나면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까지 엄습했지만 그저 빨리 차를 몰고 여기를 벗어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근 한 시간 정도를 달렸던 것 같다. 마침내 멀리서 희미하게 불빛이 보였는데 그때의 그 느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긴장이 풀려서 큰길로 나아가려는 순간, 갑자기 흑갈색 개 두어 마리가 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정말 심장이 떨어질 듯이 놀라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밖에만 나가지 않으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기까지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이동해서 마침내 안작 코브에 도착했다. 길가에 잠시 차를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아래는 어둠 속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만 보이는 높다랗고 경사가 가파른 절벽이었다. 100년 전 절벽 아래 좁은 해변에 상륙하여 위에서 공격하는 튀르키예군과 사투를 벌여야 했던 안작 군단의 처절한 상황이 절로 그려졌다.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다시 그 산길을 내려가야 했지만 도저히 다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안전한 길을 따라 우회하는 해안 도로를 택했고 거의 자정이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경을 집중해서 장시간 운전한 탓인지 너무나도 피곤하고 힘들었다. 하지만 100년 전 이곳에 있었던 그들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노 제국의 생존을 위한 선택
1914년 6월 말의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 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이때만 해도 전쟁은 두 나라 간의 분쟁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후 세르비아의 후견인을 자처하는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렸고 독일이 러시아, 프랑스에 잇달아 선전포고를 하며 전쟁은 순식간에 세계대전으로 번져갔다. 드디어 영국 작가 H. G. 웰스(H. G. Wells)가 표현한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The war to end all wars)’이 벌어진 것이다! 한편 과거 유럽과 아프리카 및 중동 일대를 호령했던 오스만 튀르키예 제국은 유럽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전쟁을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오스만 제국은 1차 대전이 발발한 시점에서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국력을 감출 수가 없었다. 1912년에는 이탈리아와의 전쟁에서 패하며 북아프리카의 리비아를 잃었고 1913년에는 1차 발칸 전쟁에서 그리스, 세르비아 등에 패하며 유럽 내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스만은 대외적으로 중립을 표방하며 영국, 프랑스 및 독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지정학적 위치와 전략적인 가치가 중립을 유지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와 한 편이 되어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 대항하는 상황이었는데 영국, 프랑스는 무기나 물자가 부족한 러시아를 지원할 필요가 있었다. 러시아로 가는 길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북쪽의 발트해였고 또 하나는 지중해를 지나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이스탄불)를 거쳐 흑해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발트해에는 세계 2위의 강력한 독일 해군이 지키고 있었고 진입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남은 하나는 오스만 제국을 거쳐 가는 길이었는데 다르다넬스와 보스포러스라는 두 개의 기다란 해협을 통과해야 했다. 전쟁 초기에는 이 루트를 통해 러시아에 물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이것이 계속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고 이러한 의심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실권자는 제국 총참모장인 엔베르 파샤(Enver Pasha)였는데 그는 제국 내 친독파를 대표했고 친영파인 총리대신 사이드 할림(Said Halim)과 갈등 관계였다. 엔베르 파샤는 8월 초에 오스만 제국이 전쟁 참전 시 독일과 같은 편에 서서 싸우기로 이미 비밀동맹까지 합의한 상황이었다. 독일의 목적은 오스만을 통해 코카서스 산맥 쪽으로 러시아군을 끌어들여 동부 전선의 자국군에 대한 압박을 줄이고자 한 것이다.
한편 영국의 제1해군경(해군장관) 처칠(Winston Churchill)은 사라예보 사건 이후 자국 전력 강화를 중요시했다. 이러한 강화의 일환으로 그는 영국 조선소에서 건조 중이던 오스만 전함 두 척을 압류해 버리고 이들을 영국 해군 전함으로 편입시킨다. 이것은 오스만 제국 내에서 엄청난 분노를 야기했는데 이 배들은 오스만 국민들의 성금까지 모아서 건조할 정도로 국민적인 관심사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와중에 전략적으로 움직였던 독일은 8월 10 일 자국의 전함인 괴벤(SMS Goeben)과 브레슬라우(SMS Breslau)를 오스만 제국의 코스탄티니예로 보냈다. 이 두 척의 전함은 곧장 오스만 제국에 매입된다. 겉으로는 독일이 영국을 대신해서 오스만 제국에 전함을 판매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두 척의 배에는 여전히 독일 승조원들이 타고 있었고 이들이 배를 운용했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오스만 제국에는 반영 감정이 팽배했고 급격히 독일 편으로 기울게 된다.
1914년 10월 29일 새벽, 오스만 제국 해군 소속의 다섯 척의 군함들은 흑해에서 서서히 북상 중이었다. 이들은 새벽 5시 반에 세바스토폴에 있는 러시아 함대를 공격했고 오전 7시부터는 인근 오데사의 해안 방어선을 포격한다. 공격의 선두에는 얼마 전까지 독일 전함이었지만 이제는 오스만 해군 소속이 된 ‘야부즈 술탄 셀림(이전의 독일함 괴벤)’ ‘미디를리(이전의 독일함 브레슬라우)’가 있었다. 러시아는 소형 전함 한 척이 침몰했고 십여 척 이상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으며 500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로서 오스만 제국은 독일과 같은 편이 되어 1차 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제 다르다넬스와 보스포러스 해협을 통한 연합국의 러시아 지원이 불가하며 이를 재개하기 위해서는 오스만 제국을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대한 도박을 기획하다
1914년 9월에 끝난 서부전선의 마른 전투 이후 연합군과 독일군은 스위스 국경에서 영국 해협까지 악몽과도 같은 기나긴 참호전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분 당 수백 발이 발사되는 기관총이라는 신무기의 도입은 과거와 같은 병사들의 무작정 돌격을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무용한 전술로 만들어 버렸다. 기관총 앞에 의미 없이 병사들이 죽어 나가는 가운데 무엇인가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어야 했다. 마침 10월에 오스만 제국이 참전하고 러시아와 직접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차르인 니콜라이 2세는 하루빨리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한 물자 보급을 재개해 주고 오스만의 압력을 덜기 위해 다른 곳에 ‘제2 전선’을 열 것을 요청하였다. 연합군 지휘부에 발칸반도, 중동의 시리아 및 오스만 제국의 다르다넬스 등 여러 곳이 제2 전선의 후보지로 물색되었다. 발칸반도의 경우, 이곳을 통해서 진공 시 그리스, 불가리아 등 인접국 또는 다른 관련 국가들의 명확한 태도가 아직 미지수였다. 시리아는 레반트(Levant: 시리아, 레바논 등의 동지중해 연안 지역)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노리는 프랑스가 반대하였다. 결국 영국군 지휘부는 오스만 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면서 러시아의 보급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르다넬스가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론상으로 이곳만 뚫고 가면 2주 내로 제국의 수도인 코스탄티니예를 점령하며 오스만을 조기에 전쟁에서 이탈시킬 수도 있었다. 한편 당시 서부전선의 암울한 상황을 볼 때 육군 병력을 차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작전이 바다를 통해 적의 영토를 공격하는 일이었으므로 11월부터 해군장관인 처칠이 주축이 되어 계획을 입안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오스만 군이 다르다넬스와 일대를 독일 장군 잔더스(Otto Liman von Sanders)의 지휘 하에 대포를 설치하고 요새화했다는 점이었다. 또한 해협에는 오스만 군의 포대는 물론 많은 수의 기뢰가 부설되어 연합군의 함선을 노리고 있었다. 여러 갑론을박이 계속되는 가운데 처칠은 오스만 군 대포의 탄약이 부족하다는 정보를 통해 해군 단독으로도 작전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마침내 1915년 1월, 그는 전쟁내각에 다르다넬스 공격을 위한 작전계획안을 제출한다. 심의를 하는 많은 이들에게 육군의 지원도 없이 ‘해군 단독’으로 시도한다는 점이 내심 걸렸지만 딱히 다른 대안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처칠의 작전 계획은 전쟁내각의 승인을 받았고 영국함대는 출동 준비를 한다.
1915년 2월 19일 쌀쌀한 늦겨울의 날씨 속에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함대 16척이 에게해에서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기함인 전함 퀸 엘리자베스(HMS Queen Elisabeth)에 있던 지휘관은 영국 지중해함대 사령관인 색빌 카든(Sackville Carden) 제독이었다. 오전 7시경 연합함대는 해협 아시아 쪽에 있는 쿰칼레의 오스만 군의 요새를 목표로 장거리 포격을 가했다. 하지만 안갯속에 시계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포격은 그다지 효과가 없었는데 정오 이후 기상이 악화되며 함대는 일단 철수한다. 이후 일주일 간 다시 공격을 가하면서 연합함대는 오스만 군의 포진지를 다수 파괴했다. 하지만 진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바로 해협에 마구 살포된 기뢰였다. 아무리 포진지를 박살 내었다고 해도 오스만 군이 야간에 집중 설치한 기뢰 때문에 더 이상의 진격이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연합함대는 3월 18일에 총공세를 준비하는데 사실 이때까지도 기뢰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다. 연합함대는 영국 전함 12척과 프랑스 전함 6척으로 구성되어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위풍당당했다. 함대는 해협을 따라 천천히 북상했다. 18척의 거대 적함의 출현으로 오스만 군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다가왔다. 하지만 적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던 오스만 군의 25개 포대가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고 이 과정에서 전설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전투 도중 오스만 군의 거포 하나에 장전 장치가 파괴되었는데 ‘세이트 차북’이라는 괴력을 가진 병사가 무려 275kg짜리 포탄을 세 번이나 맨손으로 들어서 장전을 완료하는 기적을 실현했던 것이다! 이러한 기적 같은 노력과 연합군이 제거하지 못한 기뢰의 도움으로 영.프의 함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영국 전함 이레지스터블(HMS Irresistible)이 기뢰에 당했고 이를 구조하려던 오션(HMS Ocean) 역시 기뢰와 포탄에 격침되었다. 프랑스 전함 부베(Bouvet)와 영국 전함 인플렉서블(HMS Inflexible)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외에 두 척의 전함이 오스만 포대에 격침되면서 연합함대는 투입된 18척 중 총 6척의 전함이 격침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영국 해군이나 자존심 강했던 그 수장 처칠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순간이었지만 이것이 해군 단독작전의 무모한 결과였다. 이제 다르다넬스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바꾸어야 할 때가 왔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마침내 연합군은 해군 단독작전을 포기하고 상륙군을 참여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상륙에 투입할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이전의 영국군이나 영연방 소속 병사들 치고는 다소 생소한 병력들이었다.
안작 군단의 투입
1차 대전은 전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이었고 각국은 그 규모만큼이나 엄청난 숫자의 병력을 동원했다. 대영제국의 경우 전 세계에 있는 자신의 자치령과 식민지에서 병력을 차출했는데 이것은 캐나다, 인도는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에게도 해당되었다. 그중에 머나먼 남반구에서 온 호주와 뉴질랜드의 병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사실상 처음으로 자신의 지역을 대표해서 파병되었는데 1914년 말에 훈련을 위해 이집트로 이동했다. 원래 이들은 서유럽 전선에 파병되기로 예정되었지만 운명의 여신은 ‘남반구의 용사들’을 전혀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그 장소는 바로 튀르키예 서남부의 다르다넬스였다. 당시 영국은 서부전선에서 육군을 빼낼 여력이 없었다. 마침 튀르키예와 가까운 이집트에 주둔해서 훈련 중인 안작 군단이야 말로 최단 시간에 다르다넬스 전장으로 투입할 수 있는 자원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영국군의 피해가 나날이 늘어가는 상황에서 영국인이 아닌 호주와 뉴질랜드군을 투입하는 것은 대영제국이라는 큰 틀에서 ‘제국의 모두가 함께 싸운다’는 거창하고 인상적인 대의명분을 제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안작 병사들이 이집트에서 일으켰던 여러 사건과 사고들은 ‘런던의 높으신 분들’이 말하는 대의명분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호주와 뉴질랜드의 용사들은 혈기왕성한 20대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자국과는 전혀 다른 이집트의 이국적인 풍경 속에 깊이 빠져들었다. 병사들은 훈련 외의 시간에 카이로의 유흥가를 배회했고 ‘최선을 다해’ 술을 마시고 유흥을 즐겼다. 이런 가운데 페니실린도 없던 시절에 많은 병사들이 매독이나 임질 등의 성병에 걸리게 된다(많게는 15~20%의 병사들이 성병에 감염되었고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다르다넬스에 파견되기 직전인 4월 초에는 안작 병사들이 카이로의 유흥가에서 대대적인 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은 술집에서 행패를 부리는 것에 더해 성병을 옮긴다는 이유로 매춘업소에 방화를 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까지 벌이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수십 명의 안작 병사들이 체포되었고 일부 영국 군사경찰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영국군 지휘부는 안작 병사들에 대해 상당히 깊은 불신을 가지게 된다. 한 마디로 영국군 장교들의 눈에 안작 병사들은 거칠고 규율이 없어서 ‘도저히 통제가 안 되는 남반구의 망나니들’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곧 다르다넬스의 중요한 전선에 투입되어 오스만 군과 일전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들 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고 안작 병사들이 전투에 돌입해야 할 운명의 순간이 서서히 다가왔다.
1915년 4월 9일에서 10일 사이 호주 제1사단과, 호주/뉴질랜드 연합사단으로 구성된 2만 5천여 명의 안작 병사들은 여러 척의 수송선에 나누어 타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이동을 개시했다. 이들의 목적지는 오스만 제국의 갈리폴리 반도였는데 병사들은 ‘왈칭 마틸다(Waltzing Matilda 떠돌이 방랑자의 이야기를 담은 호주의 비공식 국가와 같은 노래)’를 우렁차게 부르며 배에 승선했다. 사실 안작 병사들을 비롯한 연합군은 오스만 군을 열등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이전의 이탈리아나 발칸의 전쟁에서 오스만 군이 무기력하게 패퇴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그들이 또다시 힘없이 무너질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수송선은 갈리폴리로 가는 중간지점에 있는 그리스령 림노스 섬에 기항했는데 이곳이 연합군의 중간 보급기지 겸 작전지휘소 역할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4월 24일 저녁 소형 상륙보트에 나누어 탄 병사들은 갈리폴리 반도의 서쪽 해변에 직접 노를 젓으며 상륙하려 했다. 상륙은 새벽 4시 반부터 5시 사이에 이루어졌다. 안작 군단은 원래 반도 남서쪽에 있는 가바테페에 상륙하려 했으나 강한 조류와 조타 과정에서 실수가 겹쳐 북쪽으로 8km 지점에 상륙했다(이곳이 바로 내가 방문했던 ‘안작 코브’이다). 상륙 지는 좁은 해안과 바로 이어지는 능선과 절벽 그리고 관목으로 이뤄진 천연 장애물이 있어 공격군에게 절망스러울 정도로 불리한 지형이었다. 방어하는 오스만 군은 능선 위에서 독일제 기관총을 사용하여 결사적인 방어를 실시했다. 이들은 지난 3월의 연합군 해군 공격 이후 흘러간 한 달 여의 시간을 독일군 장교들의 지휘 하에 방어진지를 강화하고 병력과 보급품을 보충하는데 집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오스만 군의 해안 방어망은 생각보다 견고했다. 아침 8시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상륙군은 겨우 해변의 좁은 교두보를 구축할 수 있었지만 내륙으로 더 진입하는 데는 실패했다. 한때 호주군 지휘관들이 배로 돌아가 재승선을 할 것인지를 고민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오스만 군의 지휘관은 훗날 튀르키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훗날 그의 이름에는 ‘튀르키예의 아버지’라는 뜻인 아타튀르크Atatürk가 추가된다) 중령이었다. 중령의 직급으로 사단급 병력을 책임지던 그는 유능하면서도 엄격했다. 케말은 병사들을 강하게 몰아붙였고 이곳을 빼앗기면 조국이 무너진다는 심정으로 싸울 것을 주문했다(실제로 이곳이 뚫렸다면 오스만 제국은 무너졌을 가능성이 컸다). 안작 병사들도 능선을 거의 기어오르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공격했지만 오스만 군의 기관총 앞에 더 이상의 진격은 무리였다. 해 질 녘이 되자 양 측은 참호를 파고 서로 대치했고 마치 서부전선의 데자뷰(Deja-vu)가 벌어지며 악몽 같은 교착 상태가 시작되었다. 상륙 첫날에만 안작 병사들 2천 명이 죽거나 부상당한다. 오스만 군도 비슷한 숫자의 피해를 입었다. 앞으로 이 전투가 얼마나 지속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온 첫날 희생자 숫자는 남은 기간에 발생할 어마어마한 사상자에 대한 불길한 암시였다.
(2편에서 계속)